시체의 기억을 보는 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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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2.04.11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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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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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검 결과

DUMMY

김경수의 집무실 안에 라이언이 말한 비밀공간이 진짜 있었다.


하지만 밀실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허술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잠금장치는커녕 문손잡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문처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게 목적이어서 겉으로 보이는 손잡이나 도어락 같은 걸 설치하지 않았다 치자.


그렇다고 저렇게 아무나 밀고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보안시설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나. 귀중품, 라이언이 말한 금두꺼비 같은 걸 숨겨두기엔 매우 불안한 시설이었다.


어쨌든, 나는 일단 문을 밀었다. 그리고 라이언과 차례로 안으로 들어갔다.


비밀 공간의 내부는 잠금장치의 부재보다 더 의심스러운 모습 투성이었다.


“우리가 기대하던 밀실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손가락으로 물건들 위로 쌓여 있는 먼지를 쓱 닦으며 말했다. 먼지가 자욱한 창고 수준의 공간.


“겨울에 쓰던 난로, 낡은 여름에 쓰는 선풍기, 겨울 스키 세트에 가을 캠핑 용품까지... 뭐, 사계절 용품들이 다 있네.”


라이언이 쭉 둘러보며 말하더니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나를 돌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안에... 또 다른 비밀 장소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러더니 한쪽 발로 바닥을 쿵쿵, 두드리듯 굴렸다. 공명하는 곳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라이언이 발을 굴리는 모습을 허탈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내 눈에 특이한 점이 한가지 발견되었다.


“여기... 뭐가 있었던 거 같은데?”


전체적으로 먼지가 자욱한 어두운 색 바닥 중에 한 부분에만 먼지가 쌓여 있지 않았다. 지름 30cm 정도의 원형 모양으로.


내가 가리키는 곳을 본 라이언의 눈동자가 커지며 한 손으로 무릎을 탁, 쳤다.


“거봐, 내 말이 맞지? 여기 뭔가 있었어. 바닥이 둥그런 거 보니까 진짜 금두꺼비 아니야? 와, 이정도 크기면 장난이 아니었겠는데!”


아무리 저승사자라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도 아니면서. 값어치 있는 물건을 이런 창고 바닥에 그냥 뒀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원형 모양의 자국 위로 먼지가 하나도 쌓이지 않은 걸로 봐선 여기에 있던 것이 무엇이든 아주 최근에 옮겨진 건 확실했다.


이곳에 뭐가 있었을까. 바닥이 둥그런 모양의 어떤 것. 이번 살인사건과 관련이 있을까.


먼지 때문에 자꾸 기침이 나왔지만 나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아주 내부 전체를 샅샅이 뒤지고 꼼꼼히 확인했다.


라이언 역시 계속 발을 구르고 벽을 쳐봤지만 나나 라이언이나 새롭게 발견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창고를 나온 우리는 책상 뒤편에 있는 미닫이 창문을 끝까지 열고 바깥 공기를 마시며 폐를 정화시켰다.


생각보다 꽤 많은 양의 먼지를 마셨는지 잔기침이 오랫동안 계속됐다.


잔기침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창문을 열어둔 채 집무실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건 당일날의 내부와 달라진 건 없었다.


“화이트보드가 꽤 크네. 저기에다 청소 스케줄이나 예약, 연락처, 주소 같은 걸 적어 놨겠지.”


라이언이 책상에 걸터앉아 정면에 보이는 화이트보드를 감상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도.”


나도 라이언 옆으로 가서 나란히 걸터앉았다.


“근데 왜 싹 다 지웠을까. 살인자가 한 짓일까? 만약 그랬다면 꼭 지워야만 하는 뭔가가 적혀 있었던 거겠지?”


내가 혼잣말처럼 묻자 진지한 표정이 된 라이언이 요즘 추리할 때 부쩍 짓기 시작한 특유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생각엔 말이야, 청소 스케줄표에 적혀 있던 어떤 건물의 관계자가 이번 살인사건과 관련이 있게 아닐까 싶은데? 자신과의 연관성이 탄로날까 봐 지우다 보니 그냥 다 지워 버린 거지..”


정말 그런 걸까. 저 화이트보드에 살인자의 단서가 적혀 있던 걸까.


화이트보드는 지워져 있었지만 여전히 보드 마커의 거뭇거뭇한 자국은 남아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면 커다란 표를 그려 놓은 가로세로 줄의 흔적이 보였고 몇몇 글자들의 흔적도 보였다.


오랫동안 지우지 않고 두어서 보드마커의 잉크가 화이트보드에 일부 흡수된 흔적이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화이트보드의 맨 위에 6개의 얼룩이 눈에 띄었다.


꽤 오랫동안 그곳에 적혀 있었는지 보드마커의 검정색 잉크 얼룩이 가장 진하게 남아 있었다.


“저기 저 위에 6개의 얼룩 말이야... 뭐라고 적혀 있었을까? 꽤 오랫동안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음...”


라이언이 턱을 만지고 미간을 좁히며 칠판에 적힌 수학 난제의 답을 찾는 천재 수학자의 모습으로 칠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 생각엔 말이야... 음...”


그리곤 답을 찾은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호명 아닐까? 단골 건물 상호명. 장기 계약이 되어 있는. 늘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청소를 가야하니까 저 위에 상호명이랑 날짜, 시간을 적어 둔 거지. 따로 예약전화를 안 해도 잊지 말고 가야하니까.”


상호명과 날짜, 시간....?


그런데 그때였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한창수 선배였다.


“아, 네, 선배. 오케이, 알겠어요. 부검실로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라이언을 돌아보며 말했다.


“국과수 부검실. 결과 나왔대.”

“나도 들어야겠다.”

“직접 갈 거야?”

“응. 곧 따라갈게.”


입자 형태로 흩어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라이언이지만 시신에 대해 직접 듣고 싶은 호기심이 불편한 느낌을 이겼다.



***



“복부에 자상이 총 다섯 갭니다.”


김희애 부검의가 나와 한창수 선배를 보며 말했다. 새로 부임했다는 여자 부검의였는데 안경 너머에 있는 눈빛이 꽤 날카로워 보였다.


워낙 솜씨가 좋고 숨겨진 사인을 귀신같이 밝혀 내서 진짜 귀신과 소통하는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초현실적인 일들을 보면, 뭐,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다섯 개요?”


한창수 선배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원한이라고 보기엔 수가 적고 우발적이라고 하기엔 수가 많죠.”


김희애가 한 선배의 질문 의도를 파악한 듯 자연스럽게 답변을 해 주었다.


“그런데 그보다... 다섯 개의 자상이 조금 특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이한 양상...? 나와 한 선배는 궁금증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동시에 김희애를 바라보았다.


“다섯 개의 자상의 강도와 깊이가 서로 확연히 다릅니다.”


순간 내 귓가에 바람이 휙 불었다. 아주 약하게 내 주변에만 불어서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라이언이 왔다는 인기척이다.


“같은 신체 부위에 여러 번 찔린 경우에는 강도와 깊이가 다 같거나 아니면 점진적이거나 둘 중 하난데... 이 시신의 자상은 중구난방입니다.”

“중구난방이요? 어떤 식으로 중구난방입니까?”


내가 묻자 김희애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역시,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다.


김희애가 몸을 돌려 높이 설치 돼 있는 모니터를 켰다. 김경수의 자상이 클로즈업 된 사진이 떴다.


말할 때마다 해당 자상을 포인터로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다섯 개의 자상 중에 여기 하나는 매우 얕습니다. 주저흔도 보이고요. 그리고 이쪽 자상은 깊게, 끝까지 찔렀지만 마찬가지로 칼날이 들어가는 중간중간에 주저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 나머지 세 개. 이 세 개는 아주 깨끗하고 깊습니다. 세 번 다 한 번에 세게 찌른 거죠.”


김희애가 오른손에 가상의 칼을 쥐고 있는 것처럼 주먹을 세게 쥐고는 빠르고 강하게 세 번, 허공을 찔러댔다.


찌르는 동작이 하도 절도 있고 리얼해서 순간, 내 배가 찔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창수 선배 역시 나와 똑같이 느꼈는지, 자신의 배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리얼한 찌르기로 우리에게 겁을 준 당사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화로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따라서, 이 자상은 한 사람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세 사람,”


김희애가 우리를 향해 확신의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세 사람이 번갈아가며 입힌 상해입니다.”


세 사람... 지금 떠오르는 세 사람의 얼굴. 당연히 이종호, 장기호, 그리고 김수미.


한창수 선배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약하게 찌른 건 김수미일 확률이 높고... 나머지 두 종류의 자상은 각각 누구의 것일까.


“그럼 세 종류의 자상 중에 치명상은 어떤 겁니까. 그리고... 수면제는 얼마나 검출됐습니까?”


마음이 급해졌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질문을 하는 나를, 김희애는 빤히 쳐다 보았다.


“왜... 그렇게 보시죠?”

“먼저 사인을 물으셔야죠.”

“네?”


칼에 복부를 다섯 번 찔린 사람의 사인이 뭐겠어. 나는 김희애가 한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미간을 좁혔다.


“여기 김경수 사망자의 사인은 심정지로 인한 쇼크사입니다. 자상은 심정지 직후에 입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뭐라고? 사인이 심정지라고...?


김희애가 하는 말을 귀로는 들었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수면제를 포함한 약물성분은 일체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김희애의 말을 들으며 나는 혼란에 빠졌다. 라이언 역시 혼란스러운지 입자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옅은 바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심장마비로 죽은 남자. 죽은 남자의 복부를 번갈아가며 찌른 사람들.


대체 이 기괴스러운 죽음의 동기는 무엇이며 밝혀내야 할 자초지종은 무엇일까.


잠시 후, 문쪽으로 바람이 이동했다. 라이언이 부검실을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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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네 번째 기억을 삼키다 22.05.16 376 9 12쪽
35 두 얼굴의 여자 +1 22.05.13 418 13 11쪽
34 사라진 그림들 22.05.12 417 9 12쪽
33 엿듣다 +2 22.05.11 452 11 11쪽
32 여동생 22.05.10 546 11 11쪽
31 또 다른 영혼 +1 22.05.09 597 10 11쪽
30 2막 엔딩 +1 22.05.06 598 12 11쪽
29 1막 22.05.05 616 1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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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나쁜 새끼 22.05.02 616 12 12쪽
25 카메라에 담긴 그날 22.04.29 626 13 12쪽
24 세 번째 기억을 삼키다 +2 22.04.28 634 12 12쪽
23 하우스 웨딩 22.04.27 643 1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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