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남매
역사는 반복된다.
세 남매가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느티나무 아래 섰다.
“아버지, 저 무솔이 동생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어머니를 모시지 못해 송구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무솔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아버지 앞에 울었다.
아직 몸이 완전하지 못해 무릎을 꿇을 때 상처 부위가 찌릿했다.
해솔과 예솔이도 절을 하고 무솔 옆에서 함께 울었다.
느티나무에 무솔이 매단 헝겊이 다 헤어져 바람에 펄럭였다.
무솔은 동생들과 함께 건너편 외가댁으로 갔다.
외가댁 식구들이 피난을 갔다가 이 순신의 통제영이 고금도로 들어오자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솔이 외가에서 쉬고 있는데 센이 찾아왔다.
“라나님에게서 연통이 왔어요.”
센이 라나의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라나의 편지를 읽던 무솔의 손이 떨렸다.
겨우 진정을 한 무솔은 품에서 물건을 꺼냈다.
그의 손에 작은 청동검과 청동방울이 들려져 있었다.
울돌목 싸움 이후 일본 수군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이 순신의 공포에 사로잡혀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대군을 이끌고도 박살이 난 일본 수군 대장들은 서로의 막사에서 나오지 않고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파괴된 배만 오십여 척, 역류하는 물길에 배들끼리 부딪쳐 군데군데 부서진 배가 백여 척이 넘었다.
잃어버린 병사들은 숫자를 세기도 어려웠다.
장수로는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간 마사카게가 목숨을 잃었고 다카도라가 다쳤다.
군감으로 참여한 모리 다카마사가 물에 빠져 익사할 뻔했다.
처참하게 박살이 난 일본 수군은 이 순신이라는 공포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그나마 이 순신이 서해로 조금 물러나자 마지못해 군산 근처까지 따라 올라갔다.
하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일본 수군은 육군의 후퇴 소식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해안으로 줄행랑을 쳤다.
일본 수군이 패전하여 움츠러들자 한성으로 진격하던 일본 육군도 명나라가 직산에서 막아서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임진년의 악몽을 떠 올리며 철수했다.
육군과 수군이 서로 네 탓을 하며 철수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분함을 이기지 못해 이 순신의 가족들을 수소문했다.
아산에 가족들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특수부대를 보냈다.
기요마사의 무사들이 아산 이 순신의 집이 있는 마을로 찾아가 마을 사람들과 이를 저지하는 이 순신의 막내아들 면을 죽였다.
그렇게 일본군은 울돌목의 패전을 앙갚음했다.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내려와 성을 구축하고 겨울을 지냈다.
더 이상 전쟁은 무의미했다.
이 순신이 바다를 지키고 있는 한 조선을 삼킬 수가 없었다.
혹독한 겨울나기로 병사들의 사기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전쟁터에서 죽음 앞에 선 그들은 그저 돌아갈 날만 꼽으며 성에 박혀 있었다.
무솔은 고금도를 멀리 바라보며 지난날을 떠 올렸다.
벌써 세 번째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가는 것이다.
처음 떠날 때는 연서가, 두 번째는 피비린내로 얼룩진 조선의 혼이 배웅을 해주었다.
멀리 연서가 다시 손을 흔들고 있다.
종하가 옆에 서서 사라져 가는 무솔을 보고 있는 것이 지난날과 달랐다.
아니 이전에는 무솔 혼자 떠났지만, 지금은 옆에 센과 하이난이 함께 했다.
연서가 이번에는 결코 혼자 남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웠지만 끝내 무솔은 허락하지 않았다.
“저 여자는 되고 왜 나는 안 되는데.”
연서의 말에 무솔은 마음이 아팠다.
자신으로 인해 많은 여인이 가슴 아파하는 것으로 인해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뒤따랐다.
옆에 서 있던 하이난이 난처한지 고개를 돌렸다.
“연서야, 지난번처럼 꼭 돌아올게. 해솔이와 예솔이를 부탁해.”
무솔은 두 동생을 외가에 맡겼지만 전쟁 통에 안심이 되지 않았다.
연서는 겨우 진정하고 무솔을 배웅했다.
이 순신에게 패한 패잔병들 일부가 몰래 조선을 탈출했다.
일부가 아니라 육군과 수군을 따지지 않고 많은 병사가 부대를 빠져나와 고향으로 향했다.
혹독한 겨울나기에 동상으로 손가락이며 발가락이 잘려 나가자 조선이라는 땅이 무섭고 싫었다.
아니 이 순신이 무서워서 그들은 군령을 어기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몰래 배를 띄웠다.
그들의 눈빛은 모든 것을 포기한 눈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전쟁터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몸부림친 그들, 배에 탄 그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한겨울에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해 얼굴이 앙상했으며, 얇은 옷으로 추위에 동상이 걸려 발가락이 떨어져 나간 병사도 있었다.
얼굴은 헝겊으로 칭칭 감았고, 무기는 어디에 두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략 잡아도 스무 명이 넘었다.
그런 탈영병들 속에 무솔과 일행들이 섞여 있었다.
고금도에서 배를 타고 일본 진영 속으로 숨어들다 탈영하는 배를 발견하고 음식과 옷가지들을 주자 승선할 수가 있었다.
배가 표류하여 제주도에 닿았다.
그곳에서 민가를 약탈한 탈영병들이 다시 배를 일본으로 띄웠다.
아직 초봄이라 바닷바람이 살을 베려는 듯 불어 닥쳤고 밤이 되면 손발이 꽁꽁 얼어붙었다.
탈영병들과 무솔 일행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따닥따닥 붙어서 서로의 체온으로 버티어 나갔다.
낮에는 동남쪽으로 가던 배가 밤이 되면 바람에 흔들렸다.
조선 남해를 떠난 지 한 달이 더 지나서야 우여곡절 끝에 후쿠에섬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무솔은 일행과 함께 큐슈로 들어와 세토내해를 지나 오사카로 들어갔다.
고금도를 떠난 지 꼬박 두 달이 지나서였다.
조선과 달리 일본은 평화로웠다.
길거리에는 파릇파릇 새싹들이 돋아나고 여기저기에 봄꽃들이 피고 있었다.
하지만 백성들의 속내를 들여 다 보면 말이 아니었다.
많은 병력이 전쟁터로 갔고 군량미와 병기들을 만들어 내느라 백성들이 수탈당했다.
겉으로는 평화롭고 한가로워 보였지만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산속으로 도망을 가거나 해적이 되었다.
교토의 강변 여각에 무솔과 센, 그리고 하이난이 여장을 풀었다.
센이 라나에게 연통을 넣어 무솔이 왔다는 것을 알리자 어떤 사람을 만나면 도움이 될 것이라 하여 무솔이 후카쿠사 뒤 찻집을 찾아갔다.
차를 마시며 무솔이 강을 바라보고 있는데 무사 하나가 찻집으로 들어와 누군가를 찾는지 두리번거렸다.
좀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무솔밖에 없자 다가와 앉았다.
“혹, 라나님을 아십니까?”
무사는 통성명하고는 내일 후시미성으로 들어오라는 전갈을 전하고는 사라졌다.
다음 날 무사가 주고 간 의복을 단정하게 입은 무솔이 후시미성의 한 저택으로 들어갔다.
경비병들은 모 저택의 누군가를 만나러 왔다며 통행증을 보이자 바로 들여보내 주어서 성 입구를 무사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무솔이 들어간 저택은 히데요시의 측근이 사는 곳이었다.
방에 앉아 창 너머 정원을 구경하고 있는데 소년 하나가 들어와 무솔 앞에 앉았다.
“양 부하라고 합니다. 라나님을 찾아오신 분이신가요?”
“그렇소. 혹 조선 사람이오?”
“하하하. 제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무솔은 당돌하게 웃고 있는 양 부하를 쳐다보았다.
‘어리지만 당돌하고 똘똘하게 생겼다.’
“내 이름은 료우타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소이다.”
무솔은 혹시 몰라 일본 이름을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무솔님 이라고도 하죠! 라나님께서 부탁하셨습니다. 조선으로 출병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무솔은 양 부하가 자신의 조선 이름을 말하자 순간 긴장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양 부하는 조선의 상황에 대해 궁금한지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조선 사람인데 어떻게 해서 일본에 오게 되고 히데요시의 귀여움을 받게 되었는지를 말해 주었다.
“라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소?”
“하하하. 급하시네요.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라나님께서 저에게 잘해 주셔서 특별히 두 분을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태합 전하께서 아시면 라나님과 제 목이 달아날지도 모릅니다. 헤헤.”
양 부하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천진난만했다.
무솔에 대한 경계나 의구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양 부하를 만나 라나를 만날 수 있는 날짜를 통보받을 때까지 하루 더 머물렀다.
무솔이 아이루를 찾아갔다.
오미츠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무솔은 오미츠로부터 그동안 있었던 일들과 여러 정보를 수집했다.
특히 후마 코타로와 주조의 움직임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후마의 공격으로 한조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어요. 물론 후마도 한조 무리의 공격으로 많은 동료를 잃고 도망 다닌다고 해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조선과 일본의 전쟁처럼 여기도 닌자들의 전쟁이군요.”
“그런데 그 후마가 오토모 호소인을 만났다는 정보도 있어요.”
“호소인과 후마라? 음, 조선에 있는 미츠나리가 마음은 여기에 두고 있나 봅니다.”
미츠나리가 한조의 움직임을 둔화시키기 위해 코타로를 움직인 것이다.
“일설에는 주조도 코타로를 쫓고 있다는 말도 있어요.”
“주조가? 한조가 죽었다면 당연히 그 후계자가 나왔을 것이고 그자도 주조를 활용하고 있겠지요. 오모토 호소인에 대한 정보는 더 없나요?”
“네, 그자는 그 정보 외에 없어요. 움직임이 없을수록 무엇인가 꾸민다고 봐야 해요.”
“후마와 호소인 그리고 주조와 한조라? 아 참, 내 정신 좀 봐. 고로오는 잘 있나요?”
“네, 오라버니는 아이루 일을 돕고 있어요. 오라버니가 닌자라는 것을 아무도 몰라요. 그냥 제 먼 친족이라고 하여서 들어와 일하고 있어요. 부를까요?”
“아, 아니요. 괜히 나 때문에 신분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되잖아요. 안부나 전해주세요.”
무솔이 밤이 깊어지자 오미츠와 작별을 고하고 밖으로 나왔다.
대문을 나서자 누군가가 미행했다.
한적한 곳으로 발길을 잡은 무솔이 옛 오마찌 건물이 있던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만 나오시게.”
“······.”
“폐허가 되었어. 지난날의 아름다웠던 인연들이 저 잡초들처럼 쓸모가 없어지면 안 되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잘 지냈나? 료우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무사하지. 넌 어때? 아이루에서 일한다며.”
“나야말로 동생 덕으로 잘 지내지. 지긋지긋한 생활하지 않아도 되고.”
고로오가 지난날 닌자로, 아니 간자로 일하던 때를 떠 올리는지 말이 없다.
“혹, 포주 진에몬이 요즘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나?”
“글쎄, 에도와 교토를 오고 가면서 에도의 정보는 교토에, 교토의 정보는 에도에, 뭐 양쪽의 간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래? 주조의 움직임은 어떤 것 같아?”
고로오가 오마찌 별채 자리를 한 바퀴 돌았다.
“난 더 이상 간자도 닌자도 아니야. 그저 기루에서 일하는 일꾼일 뿐이야.”
“미, 미안. 내가 그만. 후후후.”
무솔은 고로오의 말에 진심으로 사과했다.
고로오의 얼굴이 편안했다.
“로우타, 아니 무솔이라고 했지. 여전하구나. 순진하고 넉넉한 품이······. 혹시 오미츠가 말하지 않았나? 주조의 움직임이 근래에 들어와 수상해. 자주 가기야초 거리에 들르고 있어. ······얼마 전에는 아이루를 찾아왔었어.”
“그야 당연히 자주 오던 곳이니까.”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포주를 만나는 것 같아. 모습을 드러내 놓고 올 때는 오미츠를 만나기도 하지만, 몰래 숨어들 때는 포주 방으로 숨어들고 있어. 그럴 때는 사방 경계가 강화되고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아.”
“음. 고맙다 고로오. 이제 더 이상 아는 척하지 않을 거다. 잘 살아야 해.”
무솔은 무슨 다짐을 했는지 고로오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그런 무솔을 바라보던 고로오가 갑자기 무솔을 안았다.
무솔은 가슴이 찡했다.
“고맙다. 무솔. 너도 행복해야 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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