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빛 단편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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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휘(晨輝)
작품등록일 :
2022.05.02 21:28
최근연재일 :
2023.11.18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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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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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조가 (2)

DUMMY

또다시 6시 반이 되었다. 어제 그 꼴을 보고도 야구를 볼 생각이 드는 것인지. 이제 정말 끊어야지 생각이 들면서도 몸은 멋대로 티비 앞으로 가고 있었다. 역시나 경기의 행방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진행됐다. 초반부터 그야말로 탈탈 털렸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정신건강을 위해서 티비를 끄고 컴퓨터를 켰다. ‘이건 완전 백수의 생활이잖아.’ 싶다가도 일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라는 말로 변명하며 무의미한 날을 반복했다.


컴퓨터를 보니 낮에 만났던 남자가 생각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일을 확인했다. 읽지 않은 메일 수백 통 중 제일 위에 새로 온 것이 보였다. 열어보니 첨부파일과 함께 장문의 글이 있었다. 메일로 이렇게 장문을 보내는 사람은 처음이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작곡의 콘셉트, 방향 등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물론 다 읽기는 귀찮아서 앞부분만 조금 읽고는 나머진 대강 훑어보기만 했다. 나중에 읽을 마음이 들면 자세히 보기로 하고 첨부파일을 열었다.


꽤 많은 악보와 파일이 있었다. 충분히 앨범 하나 정도는 내고도 남을 정도였다. 윤성은 차례로 살폈다. 첫 번째 음악을 듣는 순간 좀 전까지 귀찮음으로 가득했던 사람은 어디 가고 직업 정신으로 불타오르는 남자 하나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아까 대충 넘겼던 민서의 글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작사가가 작곡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멋대로 가사를 붙일 수는 없을 테니.


윤성이 특별히 노래를 가려서 작사해 주는 그런 부류는 아니다. 그것도 경제사정이 넉넉한 경우에나 성립되는 것이지 윤성의 경우엔 가려 받고 자시고 했다간 제대로 생계유지도 힘들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맘에 드는 음악은 있기 마련이다. 윤성에겐 민서의 음악이 바로 그러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음악. 윤성은 민서의 노래에 가사를 쓰기로 결정했다. 곧바로 민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제는 이별로 잡았다. 이것은 윤성이 아닌 작곡자인 민서의 의지였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선택한 곡만큼은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이별에 괴로워하는 남자. 윤성은 민서에게 경험담이냐고 물었다. 민서는 윤성의 질문을 못 들은 척했다.


단순한 이별보다는 사별이 어떨까. 절대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테니 더욱 안타깝겠지. 연인의 죽음 이후 괴로워하는 남자. 미친 듯이 슬퍼하는 것으로? 아니야. 그것보다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슬픔을 꾹꾹 누르는 듯한 분위기로.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히 고백하듯이.


대강의 줄거리는 잡았다. 가사를 쓰기 위해 간단하게 내용을 만들어 내는 건 당연했다. 그때부터 민서는 작사를 시작했다. 가사를 짓는 동안에는 주변의 연락도 잘 받지 않았다. 여자 친구이자 곧 결혼을 하게 될 진희의 연락조차도 가볍게 무시했다. 스스로는 예술가가 아니라 말하지만 이때의 모습만큼은 정말로 예술가 같았다.


앨범 타이틀로 쓸 노래의 제목은 단순하게 지었다. 회상.




***




민서의 새 앨범이 나오고 처음 서는 무대였다. 하지만 윤성은 민서의 노래를 들으러 갈 수 없었다. 자신이 작사한 노래를 처음 선보이는 무대는 웬만해서는 반드시 갔던 그였는데. 그러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어쩌다 알게 된 사이인 그의 콘서트에 가줄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수술실 문 앞에서 기도했다. 이런 일은 상상 속에서나 있을 뿐이라, 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초조했다. 연락이 온 지 꽤 긴 시간이 지난 후다. 그런데 왜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는 걸까. 시간이 더해갈수록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붉게 물든 단풍이 좋다고


가을엔 함께 여행을 가자 그렇게 말하곤 했죠.


하지만 내게 약속 지킬 기회조차 주지 않고


떠나버린 그대를 원망하게 되네요.





진희는 유난히 단풍을 좋아했다. 붉은색이 예쁘다나. 윤성은 그런 진희에게 핀잔을 주곤 했다. 어차피 다 떨어져 쓰레기가 되는 게 뭐가 예쁘냐고. 그럴 때면 그녀는 그게 왜 쓰레기냐며 반박했다. 그녀는 가을에 단풍 구경 가자고 말했다. 어차피 길거리에도 있는 거 뭐 하러 멀리까지 가서 구경해야 되냐고 답했다. 그녀는 소원이라 말하며 이번 가을엔 같이 가자고 때 썼다. 윤성은 마지못해 그녀에게 약속했다.


수술 중이라 써진 빛은 도저히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이리도 더디게 가는 걸까. 앞으로는 더 잘할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괜찮을 거라고 말해줘.





입어보지 못한 흰 웨딩드레스


상자에 담겨있는 약속의 증표


그대가 가져야 할 모든 걸


하늘은 한순간에 전부 빼앗아 버렸죠.





결혼식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결혼식이 있을 6월이면 만난 지 꼭 4년째다. 드레스를 고르며 기뻐하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였다. 프러포즈 받을 때 한 번 껴본 반지는 상자 속에 고이 담겨있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내가 그런 내용의 가사를 쓰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까. 불길한 상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살아 있을 거라 그렇게 믿고 싶었다. 교통사고를 낸 운전사를 욕했다.


수술 중이라는 불빛이 꺼졌다. 온통 초록색 옷을 입은 의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윤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민서의 노래는 예상외로 큰 인기를 얻었다.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민서만의 독특한 음색이 거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작사가는 저작권으로 돈을 버는 직업인 만큼 노래가 인기를 끌수록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필연적으로 가수가 잘 되길 바랄 수밖에 없다. 기대도 안 했던 이가 생각지도 못한 인기를 받게 되었으니 기뻐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작사가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가사를 썼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은 노래의 가사에 더욱 공감했고, 그것은 노래를 부른 가수의 애절한 목소리와 어우러져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흰색의 웨딩드레스 대신 흰 수의를 입게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그녀의 가족 얼굴을 보면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후회였나. 아니, 단순히 후회라고 단정 짓기엔 좀 더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이다. 슬퍼야 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같지 않을 거라, 남들과는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나 또한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나 봐요.


눈물이 완전히 마를 때에야 그대를 잊을 수 있을까.





역시 맘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것. 잘 모르면서 멋대로 지껄이는 사람에게 닥치라고 말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그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에도 너무 지쳐있었다.


거리를 지나가다 민서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거리에서 틀어주는 음악으로 인기를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아, 정말로 이 노래가 대박을 터뜨리긴 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노래라 해도 신나는 댄스곡들 놔두고 발라드 음악을 틀어놓다니. 이게 뭔가 싶었다.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가사에 담긴 내용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윤성은 자신이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될 줄은 추호도 생각해 본 적 없기에 더욱 착잡했다. 노랫말을 듣고 감상에 빠지는 일 따윈 정말 한심한 짓인 것만 같았는데.


조금 더 걸어가니 아이스크림 매장이 보였다. 진희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특히 민트 맛을 그녀는 가장 좋아했다. 매장을 지나쳤다. 액세서리 가게 앞을 지나쳤다. 그녀는 가다가 액세서리 파는 것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곤 했다. 그녀가 뭘 좋아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사소한 것까지도 선명하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뛰어서 신호등 앞까지 다다르니 때마침 빨간 불로 바뀌었다. 처량하다. 하필이면 이럴 때 우산은 또 없다. 안될 때는 뭘 해도 안 된다. 근처에 편의점이라도 있나 돌아봤지만 눈에 보이는 편의점이란 횡단보도 맞은편에 있는 것뿐이었다.


윤성은 비를 맞으며 걸었다. 자신이 지은 노래의 가사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작사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사를 지었다고.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어떤 것이 먼저인지가 뭐가 중요하냐고, 그렇게 얘기하기도 한다. 글쎄···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럴지도······.


이제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죽게 만든 게 자신이 아니라 믿고 싶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다. 우연일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머리로는 인정해도 가슴이 받아들이질 않는다. 알지 못하면서 멋대로 추측하고, 또 그것이 정말인 듯 말하고 그 과정이 쌓여 어느새인가 사실이 돼버렸다.


정말로 그게 아닌데··· 윤성은 잘못에 대해서 면죄부를 받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면죄부를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괴롭게 만든다.


이상했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리고 그 이후 장례식장에서도. 이상하게 그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았다. 노래 가사 따위보다 그것이 더 미안했다. 내가 정말 그녀를 사랑하긴 한 걸까. 그런데 왜 눈물이 나오지 않는 걸까.


하늘을 보았다. 빗물 한 방울이 눈에 들어갔다.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빗물은 그의 온몸을 적시고 떠내려갔다. 그제야 볼을 타고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가사로 써도 괜찮은 문구가 빗물이 그려내는 파장과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늘에서는 눈물의 비가 내리겠지요.




***




그대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이제는 어디에서도 그댈 찾을 순 없죠.


사랑했던 기억도 그 추억들도


소중히 간직할게요. 영원히.





노래가 끝났다. 윤성은 감았던 눈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커피 향은 자그마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적응이다. 카페에 머무른 사이 익숙해져 버린 탓이다. 이런 게 여기에만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은 가까운 대상에 대해 너무도 쉽게 익숙해져 버린다.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는지 뒤늦게 깨닫고. 아메리카노 안의 얼음 하나를 입에 물었다. 정신이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사람이란 대체 어떤 존재일까. 고작 일 년 전의 일인데도 아주 먼 옛날의 일인 것만 같았다. 정말로 사랑했었나. 몇 년,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도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소설 속 주인공과는 달리 현실에서의 인물들은 너무나 쉽게 잊어버린다. 그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에 묻혀 녹아들었다.


노래를 듣기 위해 남아있었던 카페였던 만큼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남아있던 커피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는 카페 밖으로 나갔다. 그가 느끼지 못한 옷에 밴 커피 향만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회상



붉게 물든 단풍이 좋다고

가을엔 함께 여행을 가자 그렇게 말하곤 했죠.

하지만 내게 약속 지킬 기회조차 주지 않고

떠나버린 그대를 원망하게 되네요.


입어보지 못한 흰 웨딩드레스

상자에 담겨있는 약속의 증표

그대가 가져야 할 모든 걸

하늘은 한순간에 전부 빼앗아 버렸죠.


보고 싶다 말을 해도 볼 순 없죠.

이젠 어디에서도 그댈 찾을 순 없네요.

사랑했던 기억도 그 추억들도

모두 하룻밤의 꿈인 것만 같아요.


오래된 앨범을 뒤지다 보면

우리가 함께했던 수많은 시간

환하게 웃음 짓는 모습을

이젠 사진 속에서 밖에 볼 수 없네요.


보고 싶다 말을 해도 볼 순 없죠.

이젠 어디에서도 그댈 찾을 순 없네요.

사랑했던 기억도 그 추억들도

모두 하룻밤의 꿈인 것만 같아요.


같지 않을 거라, 남들과는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나 또한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나 봐요.

눈물이 완전히 마를 때에야 그대를 잊을 수 있을까.


그대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이제는 어디에서도 그댈 찾을 순 없죠.

사랑했던 기억도 그 추억들도

소중히 간직할게요.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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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어느 화가의 이야기 (1) 23.04.24 43 0 13쪽
58 피노키오 (2) 22.09.29 64 0 11쪽
57 피노키오 (1) 22.09.29 26 0 9쪽
» 황조가 (2) 22.06.22 53 0 12쪽
55 황조가 (1) 22.06.21 44 0 14쪽
54 첫 번째 휴식 (4) 22.06.20 89 0 12쪽
53 첫 번째 휴식 (3) 22.06.19 43 0 12쪽
52 첫 번째 휴식 (2) 22.06.18 53 0 13쪽
51 첫 번째 휴식 (1) 22.06.17 37 0 13쪽
50 서로의 부족함을 알기에 22.06.16 73 0 15쪽
49 잿빛 눈방울 (2) 22.06.15 49 0 11쪽
48 잿빛 눈방울 (1) 22.06.14 84 0 12쪽
47 추억 22.06.13 37 0 17쪽
46 최고의 하룻밤(wonderful night) 22.06.12 66 0 18쪽
45 한 (3) 22.06.11 46 0 15쪽
44 한 (2) 22.06.10 63 0 13쪽
43 한 (1) 22.06.09 77 0 14쪽
42 Lost Heaven 22.06.08 68 0 8쪽
41 동백(冬柏) - Epilogue 22.06.07 41 0 5쪽
40 동백(冬柏) (2) 22.06.07 71 0 12쪽
39 동백(冬柏) (1) 22.06.06 36 0 15쪽
38 Drama 22.06.05 42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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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고양이입니까? (8) 22.06.02 7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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