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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카덴의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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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연재 주기
그우주
작품등록일 :
2022.05.11 10:13
최근연재일 :
2022.08.09 10:00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1,047
추천수 :
136
글자수 :
126,776

작성
22.07.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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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글자
18쪽

기억이 겹치는 밤 - 카덴의 마지막 칼날 (4)

DUMMY

레가브는 태연히 걸어오는 글렌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글렌이라면 혼자서도 남은 늑대의 무리를 충분히 처치할 것이라 믿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글렌이 눈앞의 괴수를 당해 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어떤 힘을 가졌건, 인간이라면 이 짐승 신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가 짐승 신을 막고 있는 동안 어서 도망가십시오!”


여기서 글렌이 괴물에게 죽는다면 일족은 명예도 잃고 목숨도 잃는 것이었다.

레가브는 어떻게 해서든 명예만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괜찮아요. 이제 모든 것을 끝낼 테니까.”

레가브의 걱정에도 글렌은 한 걸음씩 떼며 짐승에게로 나아갔다.


글렌은 주변의 참혹한 광경을 보았다.


무너진 카덴에서처럼,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과 부서진 무기.

글렌에겐 그날의 카덴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짐승은 그날의 비참한 상처를 끄집어냈지만, 그때와는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이 큰 뱀이 아닌, 그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칼 좀 빌릴게요.”

글렌은 레가브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짐승에게로 나아갔다.


레가브는 스치듯 지나간 글렌에게서 두려워하는 기색을 찾지 못했다.

다만 미간을 찌푸린 글렌이, 억누른 분노를 쏟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너희에게 더는 물을 것이 없다. 그러니 이만 사려져라!”

칼라이스가 입에 기를 빨아들이니, 바람이 그 입으로 흘러가 고였다.


힘이 점점 모일수록 레가브의 두려움 또한 같이 커져만 갔다.

압축된 바람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처럼 위태로웠다.


‘괴물 놈, 아직도 저런 힘이 남아있었던 건가···!’

피폐해진 레가브는 칼라이스의 공격을 피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바람의 기운은 도망치려는 의지마저 녹일 정도로 더 없이 위협적으로 보였다.


마침내, 짐승의 입에서 한계까지 억눌린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터져 나왔다.


바람은 땅의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며 분쇄하였다.


하지만 그 앞을 글렌이 태연자약하게 막아섰다.

어떠한 망설임과 동요도 없이, 단지 폭풍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글렌은 다가오는 바람을 응시하며 칼에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

대해의 파도 같이 밀려오는 힘이 글렌으로부터 발산되었다.

일족은 그 힘의 주인이 글렌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거친 폭풍이 바로 자신의 지척까지 이르렀음에도, 글렌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글렌은 요동치는 바람을 단번에 베어버렸다.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의 기운은 글렌의 칼 앞에 반으로 갈라졌다. 바람이 사라진 초원은 그 흔적 따위는 찾을 수도 없이 고요했다.


자신의 공격이 맥없이 사라진 것에 칼라이스는 적지 않게 당황한 눈치였다.


“그 힘··· 네놈이로구나? 초원의 손님이. 네가 숨어있는 바람에 애꿎은 놈들만 죽어났지.”

하지만 이내 괴수의 얼굴에 희열이 번졌다.


“인간의 모습을 취한 것을 보니 네 녀석, 태고 신인가?”

짐승은 그토록 찾아다니던 초원의 이방인을 찾아낸 것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거듭된 칼라이스의 질문에도 글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짐승 신을 향해 달려들 뿐이었다.


칼라이스 역시 글렌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날카로운 손톱을 뻗었다.


칼라이스의 손과 검이 부딪히자, 쇠붙이끼리 맞부딪치는 금속음과 파동이 일었다.


그 충격파로 인해 근처에 있던 레가브와 수인대가 지면에서 밀려났다.

곧이어 폭발과 함께 빠르게 퍼진 흙먼지가 그들을 덮쳤다.


“호오, 제법 버티는군. 그래도 한 지역의 신이라는 것이냐.”

칼라이스는 온갖 신들의 힘 흡수하여 힘을 늘려왔기에 자기 능력을 과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글렌이 자신과 대등하게 맞서는 것이 신기했다.


“그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아라, 짐승.”

괴물의 건방짐이 결국 무겁던 글렌의 입을 열게 했다.

글렌도 더는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글렌은 고리의 힘을 휘감은 칼을 그대로 내질러 앞발부터 베어 올렸다.


‘어떻게 된 거지?’

레가브는 안개처럼 자욱한 먼지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떨어진 칼을 간신히 잡고서, 글렌을 돕기 위해 먼지를 뚫고 다리를 끌며 나아갔다.


그 순간,

먼지 속에서 섬광처럼 요란한 검광이 빛나며, 무언가를 가르는 쇳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린 것은 그 후였다.


끄아아아아!


다만,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괴성이 귀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먼지가 걷히자 비명의 전말이 드러났다.


“감히, 내 팔을! 그냥 죽이지 않을 것이다! 산 채로 간을 끄집어내 먹고, 갈기갈기 찢어 버리겠다!”

괴수는 고통스러워하며 핏대가 선 눈으로 글렌을 노려봤다.

사라진 팔로 인해, 힘의 차이는 생각나지도 않을 만큼 분노가 괴물의 눈에 서렸다.


글렌의 주변에는 괴물의 한쪽 팔이 토막 나 곳곳에 널려있었다.


“대체 어떻게···.”

레가브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이 저 괴물을 당해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너는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레가브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이나스가 말했다.


이나스는 한쪽 다리를 끌며 레가브에게로 다가왔다.


“다만, 네가 믿지 않으려는 것이지.”


이나스의 말처럼 은빛 머리를 갖고 카데넬의 불을 사용하는 자가 초원의 조상 외에 또 있을 리 없었다.


“정말, 카데닌이라고···?”

레가브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분노해라, 오만한 짐승이여. 네가 내 분노 이상을 보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글렌은 지독하리만큼 살기 짙은 분노를 표출했다.


‘대체, 그토록 나를 증오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칼라이스는 자신을 향한 끝없는 증오와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짐승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하더라도, 글렌은 이미 놈의 흔적을 이 땅에서 지워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비록 찰나의 안식일지라도,

누구도 초원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절대로, 그날의 일들이 반복되게 놔두지는 않겠다!’

글렌이 오른손을 앞으로 뻗자, 그의 고리가 새벽 별처럼 초연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열풍(熱風)이 회오리치듯 글렌 주위를 감싸며 솟아올랐다.

그 영향으로 글렌의 머리카락이 솟구쳐올랐다.


“어리석구나! 내 앞에서 바람을 일으키다니, 네 힘이 너를 분쇄할 것이다!”


그러나 칼라이스는 바람을 다스리는 힘을 가졌음에도 그 바람을 통제하지 못했다.


자신의 앞발로 직접 바람을 억누르려 했으나, 바람에서 새어 나오는 불꽃으로 인해 화상을 입고, 튕겨 나가듯 손을 뗐다.


“불꽃?”

범상치 않은 힘을 보고, 칼라이스는 짐승들이 아직 ‘하나’였을 적 일을 떠올렸다.


불타는 성읍과 낭자한 피의 연못 위에서, 만찬을 즐기던 자신을 도망치게 한 존재.


저 불은 큰 뱀이었던 자신을 불태운 ‘그’의 의지였다.


괴물의 눈앞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그렇다면 저놈은⋯!’


“제길! 아직도 살아있는 카데닌이 있었다니!”

옛 공포를 떠올린 짐승 신은 잘린 앞발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방금까지의 분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시로코(sirocco)!”


글렌의 외침에 응답한 열풍이 한기 서린 북풍을 찢어발기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열풍은 격동하는 글렌의 분노에 동화되어, 달아나는 짐승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일족은 짐승의 입을 통하여 글렌이 카데닌인 것을 알게 되었다.

레가브는 그의 정체가 사실로서 확인되니 벅차오르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바나타 일족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격정(激情)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가에는 자신도 모르는 눈물이 조금씩 맺히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낱 전설로만 여겨지던 조상의 존재가 고난의 시간을 버텨온 일족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카데닌이 있는 줄 알았다면, 이딴 곳은 오지도 않았을 텐데! 빌어먹을 년에게 속다니!”

자신이 바람에 쫓기는 신세가 될 거라고 칼라이스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뒤따라오는 열풍으로 인해, 짐승은 날개가 할퀴어져 상처를 입고 휘청거렸다. 잘려 나간 앞발만큼 힘이 빠져나갔고 균형이 맞지 않아 비행하는 것도 어려웠다.


이대로는 결국, 지독한 바람에 따라잡혀 찢겨 죽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벗어나야 한다. 날개를 잃고 땅을 기더라도 도망가야 한다.’

칼라이스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날아갔다.

뒤를 보는 순간 따라잡힐 걸 알았기에 그저 앞만 보고 날아갔다.


그러나 끝도 없는 추격이 계속해서 이어진 탓에, 칼라이스는 심장이 뜯겨 나갈 것처럼 숨이 차올랐다.


이 도망에는 정해진 기약이 없었다.

결코, 도망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칼라이스는 곧,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바람 기운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인가, 이렇게도 쉽게?’

의심을 거두지 못한 칼라이스는 두려워서 뒤를 돌아볼 수 없었지만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 쾌락은 더없이 달콤했다.


칼라이스가 긴장을 풀고 안심한 그 순간,

찬란한 기적의 빛이 괴물의 등 뒤로 떠올랐다.


그 빛으로 인해, 괴수에게도 활공하는 자신의 그림자가 땅에 보일 정도였다. 그 크기는 작지만 태양과도 같이 강렬한 빛이었다.


그리고, 하늘을 가르는 듯한 외침이 들렸다.

“니샤르드의 파편들이여!”

그 소리에는 파괴당한 카덴의 응어리진 울분이 담겨 있었다.


칼라이스는 짐승들을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어느새 다가온 글렌이 광명의 창을 던지려 하고 있었다.


그 형태대로 빛을 가둔 창의 눈부심 때문에 달빛조차 희미해 보였다.

투박한 외형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화려했다.


“이곳에 카덴의 마지막 칼날이, 카덴의 분노가 내려왔노라!”


뇌성(雷聲)같은 글렌의 목소리가 초원의 너머까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칼라이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짐승에게 고하는 소리였다.


일순간 창을 든 글렌의 모습에서 분노한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짐승은 옛 공포가 다시 실현됨을 느꼈다.


“이제 너희 눈으로 직접, 목도하여라!”

글렌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징벌의 창이 그의 손을 떠나 겁에 질린 짐승에게로 날아갔다.

사선으로 빠르게 내리꽂히는 창은 괴수의 심장을 일순간에 꿰뚫었다.


창에 박혀 빠르게 타들어 가는 짐승의 몸은 마치 유성처럼 떨어졌다.


그 몸의 조각들이 하늘에 수많은 재의 잔해를 남기며, 짐승의 정신과 아득히 멀어졌다.


칼라이스는 몸이 점점 사라져가며 그녀가 한 말을 떠올렸다.


-네가 그 힘을 네 것으로 만든다면, 널 상대할 수 있는 신은 없을 거다.

흰 대례복을 입은 여사제의 신탁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이 땅의 모든 신이 이 힘을 빼앗을 수 없을 테니까!’

자신을 속여, 이 초원에 오게 만든 그녀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이따위 엉터리 신탁을 주다니···!”

칼라이스는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마침내 무자비한 빛의 창이 땅에 꽂히자, 그 응축된 빛이 터지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눈부신 폭발이 초원의 경계까지 전해져, 그 진원지를 중심으로 낮처럼 밝아졌다.


바나타 일족은 두 팔로 얼굴을 가리었지만, 눈을 멀게 할 듯한 빛의 강렬함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대의 모든 땅이 거대한 빛의 폭발을 보게 되었다.


퓌오른의 중심부는 물론이고, 초원으로부터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북동부와 남부의 대국, 바나실리아와 가이시아에서도, 그 빛이 보일 정도였다.


그와 거의 동시에, 운석이 떨어진 듯한 충격이 고스란히 초원에 전해졌다.


땅이 뒤흔들리며 요동쳤고, 폭발의 후폭풍이 초원의 모든 곳에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제대로 서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모든 생명의 흔적을 지워버릴 듯한 충격파가 먼지 폭풍과 함께 초원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일족은 전승으로만 듣던 카데닌의 힘을 눈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몸을 낮춰라! 그리고 두 눈을 감고 귀를 막아라.”

이나스의 말이 후폭풍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을 보고 짐작하여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나스가 엎드리자, 의식이 남아있는 바나타인들은 그를 보고 따라하려 했다.



하지만 이나스의 말에 따라 엎드리기 시작했을 땐 이미 먼지 폭풍이 들이닥친 뒤였다.


“크으으⋯.”

일족은 진원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순식간에 퍼진 먼지 폭풍을 피할 수는 없었다.



* * * *


한참 뒤, 빛이 힘을 다하여 잦아들었다.


빛의 창이 박혔던 거대한 구덩이에서 글렌은 칼라이스의 머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글렌은 미끄러지듯 벽을 타고 내려가 한발씩, 칼라이스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짐승은 도저히 살아있는 상태로 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생명의 기운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여우 같은 년한테 속아 목숨을 잃다니···. 어처구니없는 최후로군.”

칼라이스는 몸이 바스러져 가면서도 한을 표출했다.


글렌은 그 말을 듣고 칼라이스가 초원을 침공하도록, 부추긴 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이라도 짐승을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아직 짐승에게는 물을 것이 남아있었다.


“말해라, 너를 이 초원으로 보낸 자의 이름을.”

글렌은 한 손으로 칼라이스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는 짐승을 초원으로 인도한 자 또한 멸하기로 결정했다.


“못 해줄 것도 없지. 네놈이 복수해준다면, 조금은 덜 억울한 죽음이 될 터⋯.”

칼라이스는 입이 사라져가면서도 원흉의 이름을 말하기 시작했다.


“⋯!”

그 입 모양은 배후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가리켰다.

짐승의 입을 통해, 배후의 정체를 알게 된 글렌은 호흡이 멈춘 것 같았다.


그렇게 자신의 마지막 한을 쏟아낸 칼라이스는 한 줌의 먼지조차 남기지 않고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

글렌은 짐승의 복수를 할 마음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복수가 될 것이 분명했다.


자연스레 글렌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괜한 걱정이어야만 한다. 칸에게 말해줘야 하나···.’

자신의 예감이 빗나가길 바라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저 뼈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고리의 힘을 완전히 해방한 후, 글렌의 은빛 머리는 전보다 눈부시고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발끝에 서 있을 힘도 없던 글렌은 몹시 처량하게 주저앉고 말았다.


초원의 모든 사람을 지켜낸 글렌이었지만, 어째선지 모든 것을 잃은 듯한 공허함을 느꼈다.


다만, 초원이 카덴처럼 되지 않은 것에 안도할 따름이었다.


‘당분간은 안심해도 되겠지···.’


이 땅의 모든 신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초원의 땅을 넘지 말라.’


그것을 전하기 위해 글렌은 불완전한 고리로 꽤나 무리하였다.


글렌이 고개를 들어보니 한 무리가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이나스를 필두로 레가브와 아리마 형제를 포함한 수인대의 일부였다.


말에서 내린 이나스는 일족과 함께, 글렌이 있는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카덴의 후예를 멸족의 위기에서 구해낸 카데닌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곳곳이 너덜너덜해지고 피 묻은 옷은 그들의 상태도 정상이 아니라고 알렸다.


“이것은 모든 카데닌을 대신하여, 일족에게 짐을 떠안긴 자의 속죄일 뿐입니다. 그러니 감사는 괜찮아요.”

글렌은 억지로 웃어 보이며, 멀쩡한 척하였다.


결국 일족의 모두가 글렌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이제 그에겐 해명의 의무가 남았으나 안타깝게도 당장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글렌은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아리마, 바라크.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무엇이든 하명하십시오, 카데닌이시여.”

글렌의 정체를 알게된 아리마와 바라크가 부담스럽게 예를 갖추었다.


“불이 사라져서 지금쯤 당황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가서 아이들을 안심시켜주세요.”


장막의 사람들은 초원에 한 마리의 짐승도 남지 않은 것을 모를 것이다.


‘자신들을 보호하던 불까지 사라졌으니, 무척 두렵겠지.’

글렌은 아이들에게 직접 가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카데닌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아리마와 바라크는 그 즉시 말을 타고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들 역시 몸이 정상은 아니었지만, 카데닌의 명이기에 기꺼이 길을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칸.”

“편히 이나스라고 불러주십시오. 카데닌이시여.”

이나스는 카데닌에게 존칭을 듣는 것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모든 것이 사실로 확정된 이상, 더는 글렌을 어린 손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럼, 이나스에게도 부탁 하나 드릴게요.”

글렌에겐 호칭 문제로 소모적인 말다툼을 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생각보다 꽤 무리해서 오래 쓰러져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있는 장막에 아무나 못 들어오게 해주세요.”


글렌은 회복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처소로 모시겠습니다.”

이나스는 글렌을 곧장 자신의 말 뒤에 태워, 일족의 장막으로 향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지켰네···.’

몸의 긴장이 풀리며, 서서히 글렌의 눈이 감겨갔다.


무거운 눈꺼풀 사이 지평선 너머로 동이 트는 것이 보였다.

희미한 햇빛 한줄기가 길고 길었던 밤이 끝났음을 알려왔다.


글렌은 이나스 등에 완전히 기대어,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과 대조적으로 글렌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오랜만에 후련한 아침을 선물 받았기 때문일까.

어느 때보다도 마음만은 평온했다.


작가의말


길고 길었던 첫번째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글렌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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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짐승의 굴 - 에딘 (2) +4 22.08.09 10 4 13쪽
20 짐승의 굴 - 에딘 (1) +4 22.07.28 14 4 14쪽
19 짐승의 굴 - 입성 +7 22.07.23 21 4 13쪽
18 짐승의 굴 - 계획 +6 22.07.22 12 3 13쪽
17 짐승의 굴 - 퓌오른의 성녀 (2) +12 22.07.19 49 8 18쪽
16 짐승의 굴 - 존재하지 않는 추억을 위해 (5) +9 22.07.16 30 6 11쪽
15 짐승의 굴 - 존재하지 않는 추억을 위해 (4) +20 22.07.04 44 8 16쪽
14 짐승의 굴 - 존재하지 않는 추억을 위해 (3) +8 22.07.03 46 5 10쪽
13 짐승의 굴 - 존재하지 않는 추억을 위해 (2) +5 22.07.03 37 4 9쪽
12 짐승의 굴 - 존재하지 않는 추억을 위해 (1) +10 22.07.03 47 5 14쪽
11 짐승의 굴 - 퓌오른의 성녀 (1) +8 22.07.03 56 5 11쪽
10 일족 +12 22.07.02 45 8 12쪽
9 며칠 전, 그 날 +7 22.07.02 50 5 12쪽
» 기억이 겹치는 밤 - 카덴의 마지막 칼날 (4) +15 22.07.01 65 10 18쪽
7 기억이 겹치는 밤 - 카덴의 마지막 칼날 (3) +12 22.06.30 64 8 16쪽
6 기억이 겹치는 밤 - 카덴의 마지막 칼날 (2) +11 22.06.29 58 8 16쪽
5 기억이 겹치는 밤 - 카덴의 마지막 칼날 (1) +9 22.06.28 56 8 13쪽
4 기억이 겹치는 밤 - 초원의 일족 (3) +11 22.06.21 58 7 11쪽
3 기억이 겹치는 밤 - 초원의 일족 (2) +8 22.06.21 68 8 13쪽
2 기억이 겹치는 밤 - 초원의 일족 (1) +10 22.06.21 92 8 15쪽
1 프롤로그 - 큰 뱀, 니샤르드 +17 22.06.21 112 1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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