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의 검, 꽃잎에 지는 눈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대체역사

술뫼도사
그림/삽화
조성계
작품등록일 :
2022.05.11 10:16
최근연재일 :
2022.08.04 10:22
연재수 :
97 회
조회수 :
7,569
추천수 :
244
글자수 :
534,364

작성
22.06.28 22:25
조회
63
추천
2
글자
12쪽

75화. 구미호와 자작나무

DUMMY

75화. 구미호와 자작나무


“요망한 것! 썩 물러가거라!”


조준희는 품속에서 회초리를 꺼내 백골을 후려갈겼다.


“크아악! 복숭아, 복숭아나무다!”


귀신은 회초리를 피해 문밖으로 도망쳤다.


피이이잉!

퍼엉!


“크아아아악!”


홍랑의 화살에 맞은 백골의 여인은 괴성을 지르며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가엾은 영혼이나 산 사람에게 해를 끼치니 어쩔 수가 없구나.”

“왜 귀들이 사내들을 유혹하는 건가요?”

“원래 귀(鬼)란 인간의 몸에서 양기가 빠져나간 존재입니다. 그래서 남자 귀신은 산 자를 죽여 정기를 빼앗고, 여귀(女鬼)는 사내들을 미혹하여 양기를 빨아들이지요.”


홍랑의 말에 현민이 상세히 설명하였다.


“낭군님은 아시는 것도 많아.”


홍랑은 현민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이곳을 불태워야 합니다.”


권현민이 마당 가에 피워놓은 모닥불의 장작개비 하나를 들어 삽시간에 흉가로 변해버린 건물들을 태우려고 하였다.


“잠깐 멈추시오!”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와 함께 기이한 노파가 나타났다. 허리는 기역 자로 구부러지고 주장자를 닮은 듯한 지팡이를 짚은 노파는 마치 북방의 무녀 같았다.


“이곳은 신성한 곳이요. 함부로 불태웠다가는 하늘의 노여움을 살 것이오!”


난데없는 노파의 등장에 조준희 일행은 한발 물러서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자, 이곳을 보시오!”


노파가 지팡이를 들어 숲을 가리키자 거짓말같이 달을 가렸던 먹구름이 사라지며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

“세상에!”

“아름다워!”


조준희와 권현민, 홍랑은 눈앞으로 펼쳐진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달빛을 받아 자작나무 숲이 마치 설원 위에 반짝이는 햇살처럼 눈이 부셨다.


“자작나무는 하늘과 땅, 즉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신수(神樹)지요. 이곳은 한때 몽골인들의 성지였습니다.”

“흠?”


권현민은 노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에 드나들던 몽고의 관리들이나 군사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제사를 올리고 기도를 드렸지요.”

“그 말은 원나라에 끌려가던 여인들이 이곳에서 많이 희생되었다는 얘기로 들리는군?”

“제대로 보셨습니다. 여인들은 몽고 군사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 자결을 하거나 도망치다가 목숨을 잃었지요. 이곳을 떠도는 영혼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노파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자작나무 숲 사이로 새하얀 영혼들이 무수히 나타났다.


“아!”


홍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보. 속으면 안 돼.”


현민이 아내 홍랑의 귓전에 속삭였다.


“저건 천년 묵은 구미호야.”


홍랑은 현민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깔깔깔깔! 인간 중에도 제법 똑똑한 자가 있구나!”


노파는 현민의 말을 들었는지 큰 소리로 웃으며 허공으로 풀쩍 뛰어올랐다.

한바퀴 공중제비를 하는가 싶더니, 한 마리, 아니, 화려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그녀의 몸 뒤에서는 금빛 찬란한 아홉 개의 꼬리가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마치 부처님의 아우라같이 빛나는 구미호의 광채에 조준희 일행은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뭐지? 천호(千狐)가 되어 어찌 가련한 영혼들을 이용한 것이냐?”


홍랑이 허공에 떠 있는 여인들의 영혼을 쳐다보며 구미호에게 활을 겨누었다. 같은 여인으로서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 아! 난 싸우려는 것이 아니니까 진정하시게. 그리고 난 이들을 이용하여 정기를 모으기는 하였지만 산 자를 헤친 적은 없네. 저기 쓰러져 있는 자들은 기를 빼앗겨 탈진한 것일 뿐, 목숨을 잃은 자는 없네.”


구미호의 말에 현민은 슬며시 홍랑의 활을 바닥으로 밀쳤다.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여인들이 피눈물이 끊이질 않겠구나. 모자란 사내들 때문에······.”


조준희와 권현민은 구미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누군가 지옥의 문을 열어젖혔다. 이를 막지 못한다면 조선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끔찍한 혼란에 빠져들 것이다!”

“뭐, 뭣!”

“머지않아 보이지 않는 끔찍한 전쟁이 북방에서 시작될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전쟁이··· 깔깔깔!”


한바탕 웃어 젖힌 구미호는 교교히 흐르는 달빛을 타고 아홉 개의 금빛 꼬리를 반짝이며 하늘로 올라갔다.


“뭐, 뭐지?”

“꿈을 꾼 것인가?”

“진짜 여우에게 홀린 것인가?”


세 사람은 어리둥절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심한 달빛 아래 한 줄기 바람만이 머릿결을 스쳤다.


*****


아람에게 태기가 있자 안방마님 언년이는 궁을 제집 드나들 듯이 하였다.


“출입패를 보여주시오.”

“방금 전에도 그러더니 또 그러네.”


언년이는 새로운 궁궐 문지기가 고지식하게 굴자 어이가 없었다. 일개 갑사 주제에 수문장의 부인인 자신에게 대하는 태도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옜수!”

“통과!”


다시 통행패를 받아들며 언년이는 고개를 저었다. 건춘문에 골통 하나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남편 돌쇠로부터 들었지만, 저 정도인지는 몰랐다. 그렇다고 규정을 지키겠다는데 달리 뭐라고 할 방법도 없었다.


“어휴, 나이도 어린 게 정란공신의 부인을 뭐로 알고?”


그래도 부아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님께서 참으세요. 전 전라도 관찰사 아들이라는데, 서출이랍디다. 그래서 매사에 저리 삐딱합니다요.”


다른 갑사가 시근덕거리는 언년이에게 다가와 조용히 일렀다.

건춘문에서 문지기를 하며 드나드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자의 이름은 유자광이었다. 서얼이라 과거를 볼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 갑사로 자원하여 궁을 지키는 말단 군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저놈 눈빛을 보니 언제고 사고를 칠 놈이야. 그것도 아주 크게!”


언년이는 투덜거리며 교태전 뒤쪽의 별궁으로 향하였다.


“어마마마와 어의가 잘 챙겨주는데 이런 걸 뭐하러······.”


아람은 임산부에게 좋다는 음식과 약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언년이를 보며 웃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어의나 상궁 나인들이 잘 챙겨주니까. 그래도 이건 이왕 갖고 온 거니까 잘 먹을게.”

“네. 아기시. 아니, 공주마마!”

“너까지 왜 그러니? 사람 무안하게.”

“아기시도 참, 아기시 뱃속에 아기시가 자라고 계시니까, 이제 아기시는 더 이상 아기시가 아니잖아요.”

“뭐라는 건지?”


아람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


“언제까지 저리 두실 겁니까? 저대로 두면 아람이는 아비 없는 자식을 낳게 됩니다.”

“흠······.”


진관사에서 명상으로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돌아온 왕은 오자마자 중전의 잔소리에 말을 잊었다.


“김민을 신원 복권 시키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한데······, 그리하면 문무대신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반대를 하겠지.”

“말해 뭣하겠어요? 김종서를 복권시키면 정란의 명분이 없어집니다. 전하의 정통성 또한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되고요.”

“휴. 참으로 답답한 일이구려.”


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한미한 양반가에 김민을 양자로 들여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는 게요.”

“옳거니! 그런 방법이 있었구려!”


왕은 중전의 말에 두 손을 마주쳤다.


“내친김에 당장 별궁으로 갑시다.”

“네. 전하!”


*****


“전하께서 별궁으로 납시셨다?”

“네. 방금 전까지 중궁전에 계시다가 별궁으로 납시셨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고······.”

“중궁전이나 별궁은 내명부의 소관이라 저희 내시부에서는 접근조차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한명회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병조를 찾은 대전 내관 엄자치로부터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고 있었다.


“알았으니 그만 가보게.”

“네. 대감!”


엄자치는 고개를 숙이고는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어허! 왕으로도 모자라 중전이라?”


한명회는 왕이 종친인 남이를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임영대군의 아들인 귀성군 이준을 가까이 하자 신경이 곤두섰다. 거기에다 중전마저 중궁전의 나인들을 단속하며 인의 장막을 치자 마음이 쓰였다.


“원자를 위해서라면 궁을 내 사람으로 채워야 한다. 한데, 왕이 자신의 사람으로 채우려 하니 이 일을 어찌한다?”


한명회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원자를 생각하며 다음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


날이 밝자 화려한 유곽이 있던 곳의 실체가 드러났다.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사당과 흉가들이 방치되어 있었고, 여기저기에 해골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이보시오! 정신 차리시오!”


간밤에 귀신들에게 홀려 정기를 빨린 사내들이 여기저기에 초췌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구미호의 말대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한동안 쉬고 나면 기력을 회복할 겁니다.”


홍랑은 넋이 나간 사내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금순아··· 금순아··· 으흐흐.”


젊은 사내는 눈두덩이가 움푹 들어간 채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어휴, 사내들이란!”


귀신한테 홀려 목숨을 잃을 뻔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사내를 보고 홍랑은 고개를 저었다.


“먼저 자작나무 껍질을 벗기게.”

“네. 장인!”


조준희는 장인이라는 말에 흡족하게 웃으며 칼을 수평으로 세워 자작나무의 껍질을 벗겨냈다.

잠깐 사이에 많은 껍질이 모이자 주변의 나무들로 단을 만들었다.

그 위에 자작나무 껍질을 쌓고는 유골들을 수습하여 올려놓았다.


“예로부터 몽골인들은 자작나무 껍질을 태워 영혼들을 위로하였지. 부디 이들이 편히 저승으로 갔으면 좋겠네.”


시신을 올려놓은 단에 불을 붙이자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활활 타올랐다.

홍랑과 현민은 조용히 합장을 하며 몽고 군사들에게 끌려가다 희생된 여인들의 넋을 위로하였다.


*****


“해서 너를 세종대왕 대에 병조판서를 지낸 조말생 대감의 손자로 입적시키기로 하였느니라.

조말생이 뇌물 사건에 연류되어 탄핵되는 바람에 그 자식들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니, 네 신분을 바꾸기에는 그만한 집안도 없느니라.”

“······.”

“어찌하겠느냐? 짐의 말대로 하겠느냐?”


왕의 하문에 김민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 어찌 마음이 내키겠는가? 그러나, 태중에 있는 아이를 생각해보게.”

“그러하네.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그리해야 할 걸세.”


김민은 아람이 임신을 하였다는 말에 기쁨을 채 느끼기도 전에 왕의 말에 깊은 고심에 빠져들었다. 선택지는 따로 없었다.


“하겠사옵니다. 전하의 명에 따르겠사옵니다.”

“그래. 고맙구나! 절재 대감도 이해하실 것이다. 내 살아생전에 꼭 네 가문을 신원시켜 줄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거라.”

“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왕은 김민의 손을 어루만지며 쓸쓸히 웃었다. 곁에 있던 아람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오늘부터 밖에 나오지 말고 당분간 수염을 기르거라. 그래야 다른 사람으로 보일 테니···.”

“네. 전하! 그리하겠사옵니다!”

“허허허! 수염을 기르라는 말에는 대답이 시원시원하구나.”

“사실 지금까지 궁녀들 틈에서 지내느라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전하!”

“왜 아니겠느냐? 하하하!”

“호호호!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중전과 아람도 소리 내어 웃었다.


“부마의 수염이 자라면 국혼을 발표할 테니 그리 알거라.”

“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민과 아람은 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 자료협조 – 사단법인 대한한글검협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끝까지 함께해 주세요.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이도의 검, 꽃잎에 지는 눈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참고자료 22.05.12 100 0 -
97 97화. 궁에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 22.08.04 89 0 12쪽
96 96화. 두억시니 22.07.25 84 0 12쪽
95 95화. 업보 22.07.23 63 0 13쪽
94 94화. 이매망량(魑魅魍魎) 22.07.19 57 0 13쪽
93 93화. 라불의 아이 22.07.19 90 0 12쪽
92 92화. 아람의 위기 22.07.18 63 0 12쪽
91 91화. 대장장이 딸의 소망 22.07.17 56 0 13쪽
90 90화. 한명회의 절규(2) +2 22.07.16 81 1 12쪽
89 89화. 한명회의 절규(1) 22.07.15 71 0 12쪽
88 88화. 지옥문이 열리다! 22.07.13 63 0 12쪽
87 87화. 라불의 분노 22.07.12 82 0 12쪽
86 86화. 경진북정(庚辰北征) 22.07.11 64 0 12쪽
85 85화. 남이와 유자광 22.07.10 69 1 12쪽
84 84화. 야인정벌 +2 22.07.09 67 1 12쪽
83 83화. 수호령 22.07.08 62 1 12쪽
82 82화. 고군분투(孤軍奮鬪) 22.07.07 66 1 12쪽
81 81화. 두각(頭角)을 드러내다! 22.07.06 48 1 12쪽
80 80화. 국경의 메아리 22.07.05 72 1 12쪽
79 79화. 피어오르는 봉화 22.07.04 72 1 12쪽
78 78화. 감도는 전운(2) 22.07.03 69 1 12쪽
77 77화. 감도는 전운(1) 22.07.01 65 1 12쪽
76 76. 괴짜 천재 김시습 22.06.30 65 1 12쪽
» 75화. 구미호와 자작나무 +2 22.06.28 64 2 12쪽
74 74화. 지박령(地縛靈) 22.06.27 70 1 12쪽
73 73화. 만월대도 추초로다! 22.06.26 77 1 12쪽
72 72화. 어둑시니 22.06.25 74 1 12쪽
71 71화. 남이 +2 22.06.24 74 2 12쪽
70 70화. 발톱을 드러내다! +2 22.06.23 64 2 12쪽
69 69화. 야단법석(野壇法席) 22.06.22 56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