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115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01)
[태양이 흐려지고, 달이 사라졌다.
밤하늘의 별들도 빛을 잃었다.
산이 무너지고, 대지가 갈라졌다.
강과 바다도 다 썩어버렸다.
세상의 질서가 모두 무너졌다.]
<자비의 대륙 연대기 서장에서>
은하계 변경에 위치한 작은 행성 카리타스.
오염되기 전에는 대단히 푸르고 아름다웠던 이곳은, 구인류의 고향인 제 1의 지구와 매우 유사한 환경을 지닌 ‘축복의 행성’ 가운데 네 번째로 발견된 행성이었다.
때문에 과거에는 제 5의 지구라고도 불리면서, 당시 급속히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던 구인류 사회의 새로운 희망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결국 구인류는 그 축복의 행성을 이용해서 뭘 해보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금세 완전히 멸망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언제부터인가 행성 카리타스는, 멸망한 구인류처럼 너무나 약하고 무력하여 특별한 환경에서 세심한 보호를 받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보호 시설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물론 구인류 시절부터 세상 일이란 게 다 그렇듯이, 카리타스 또한 처음에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제대로 된 보호 시설이라기 보다, 그저 힘 없고 쓸모 없는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버리고 가는 불법 유기 장소처럼 인식되어 큰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수많은 시행착오, 논쟁, 타협의 결과, 은하계의 강대국 가운데 하나인 신성 에클레시아 제국에서 파견된 총독에 의해 위탁 통치되면서 비로소 보호 시설로서의 체계가 어느 정도 잡히게 되었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체계가 잡힌 지 얼마 되기도 전에 비극적인 참사가 발생했다는 사실이었다.
행성 카리타스의 표면에 존재하는 5개의 대륙 가운데 4개의 대륙이 ‘타베스’라고 불리는 치명적인 오염원에 의해 심각하게 오염되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쯤 전에 벌어진 사건으로, 변경의 작은 행성에서 죽을 때까지 보호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한답시고 감행한 대규모 실험이 철저하게 실패한 탓이었다.
좋은 뜻으로 실시한 실험이 최악의 결과를 낳는 바람에, 카리타스는 거주 가능한 땅과 보호 중이던 거주민의 약 2/3 정도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행성 카리타스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제 1대륙만큼은 간신히 거주가 가능한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다.
그 땅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제국 성녀의 결단과 희생 덕분이었다.
그 고귀한 희생을 기려서, 대참사가 겨우 수습된 이후, 카리타스 제 1대륙은 제국 황제의 칙령에 의해 ‘자비의 대륙’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하사 받았다.
또한 카리타스를 다스리는 총독 또한 부왕으로 격상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후 카리타스 부왕령은 제국 황실의 지원에 힘입어, 행성의 태반을 뒤덮은 타베스로부터 유일하게 남은 제 1대륙을 보호하기 위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해안선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방어 요새를 점점이 건설하고, 그 요새를 긴밀히 연결하여 강력한 방어선 ‘리메스’를 완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리메스의 보호 안에서 자비의 대륙 거주민들은, 카리타스 밖의 험한 세상에서 살았다면 아예 불가능했을 자신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살다가 죽어갔다.
그리고 행성 카리타스의 시간으로 다시 18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자비의 대륙은 내부적으로는 전란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으나, 외부적으로는 행성 표면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거주가 가능한 지역으로서 대륙 관리국의 집중적인 관리와 세심한 보호를 꾸준히 받고 있었다.
동시에 점점 쇠퇴하는 제국의 건재함과 황제의 자비로움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선전 도구로 편리하게 이용 당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만약 그런 정도의 이용 가치조차 없었다면, 이미 국력이 쇠퇴한 제국으로서는 굳이 많은 비용과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행성 표면의 대부분이 오염된 더러운 땅을 더 이상 보호 시설로 유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복잡한 정치적 사정은, 평생 자신들 머리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나는지 모른 채 지상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자비의 대륙 거주민들에게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카리타스의 대기권 아래에서 불철주야 고생하고 있는 관리국 소속 현장 요원들조차, 대개는 그건 그저 까마득히 멀리서 일어나는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이며 자신들과는 큰 상관이 없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현자력 182년 7월 15일.
이 날도 행성 거주민들은 제 1대륙 위에서 자신들만의 삶을 부지런히 영위하면서 제국 황제의 자비로움을 선전하기 위한 산 증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또한 관리국 요원들은 그런 거주민들을 은밀하게 감시하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거주민 보호와 관리 임무를 바쁘게 수행하는 중이었다.
15일 일몰 무렵, 자비의 대륙 동부 고원지대 상공.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 따위는 전혀 알 도리가 없는 지상 거주민들이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느라 바쁜 시간.
대륙 관리국 경비부의 동부 지역 기동 순찰대에 소속된 어느 평범한 팀이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팀의 인원은 총 4명.
그들은 각자 보급형 하얀색 에어바이크를 타고, 대륙 중앙부에 있는 관리국 본부 타워를 출발해서, 대륙 동부에 있는 목적지를 향해 일렬종대 대형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여기는 이셀리아, 전 팀원에게 알립니다. 목적지 도착 10분 전.
무인기를 이용한 지상 스캔 결과, 긴급 체포 대상인 특수요원 이드리스가 마지막으로 확인되었던 위치에는, 그 자의 모습은 물론 특별한 탐지 교란도 전혀 관측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10여명 정도의 지상 거주민이 활동하고 있으므로 충분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불가피하게 현지 주민과 접촉해야 할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소디아인 상인이라는 위장 신분을 지닌 저만이 접촉 가능하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상.”
파미아 화산을 지나 고원지대 상공을 비행하는 동안, 일행의 가장 뒤쪽에서 날아가고 있던 소녀 이셀리아가 통신기로 전달 사항을 알렸다.
그녀는 관리국의 규정 대로 자신의 능력을 표시하기 위해 등 뒤까지 흘러내린 긴 머리를 절반씩 황금색과 은색으로 염색한 상태였다.
또한 자신의 직급에 맞게 연령 등급 16에 맞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옆쪽에서는 몸 전체가 은백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백조가 주인을 따라서 나란히 날아가는 중이었다.
“여기는 이그시아. 아, 속상해! 모처럼의 비번인데 왜 이럴 때 긴급 출동을 해야 하는 거냐고? 이상.”
맨 앞쪽에서 날아가고 있던 소녀 이그시아가 갑자기 통신기로 짜증을 냈다.
그녀는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한 정도의 머리카락을 진홍색으로 염색하고, 앞머리 일부만 살짝 백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건 엄밀히 따지자면 벌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관리국 복무 규정 위반이었다.
연령 등급은 15.
“여기는 이르피오. 명색이 집행부 특수요원이라는 사람이 더미 코드를 이용하여 자기 위치를 10시간 넘게 속이고 종적을 감췄다고 하잖아?
집행부는 이제서야 뭔가 수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가까운 곳에 있던 다른 특수요원을 파견한 모양인데, 우리 경비부가 집행부 보다 먼저 그 자의 신병을 확보해야 한다는 게 높으신 분들의 뜻이니까 뭐 어쩌겠어?
하필 이럴 때 한가한 비번이라서 급한 일 시키기 딱 좋았다는 게 죄라면 죄인 거지. 이상.”
세 번째로 날아가고 있던 순해 보이는 인상의 소년 이르피오가 통신기로 대꾸했다.
귀를 살짝 덮은 머리를 붉은색 단색으로 염색했으며, 연령 등급 15에 맞춰 외모가 조절된 소년으로, 입안에서는 작고 둥그런 수정 구슬을 혀로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우물거리는 중이었다.
“시끄러워! 누가 너한테 높으신 분들의 생각을 친절하게 해설해 달라고 했어?
내 말은 우리 발 밑에 있는 저 하찮은 놈들은 이제 하루 일과를 다 끝내고 쉬려고 하는데, 우리는 왜 허구한 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끌려 다녀야 하느냐 이 말이야?
이건 불공평해! 우리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저 놈들 보다 우월하고 강하게 태어난 게 잘못이냐?”
이그시아는 통신기에 대고 있는 대로 짜증을 터뜨리더니, 먼 아래쪽 지상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는 작은 점들, 다시 말해, 지상 거주민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저기 개미떼처럼 우글거리는 하찮은 놈들은, 원래 200년 전에 그 무슨 실험인지 뭔지가 실패해서 오염되었을 때 전부 죽여버렸어야 마땅하잖아?
싹 다 없애버렸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만한 상황이었는데, 그걸 왜 굳이 자비를 베풀어서 살려줘 가지고, 오늘날까지 우리가 이 고생이냔 말이야?
저 놈들 관리하는 건, 관리국 온실에서 화초 돌보는 것 보다 더 귀찮고 손이 많이 간다고!
거기다 쓸모로 따지자면, 저것들은 온실 화초 보다 더 쓸모 없는 놈들이잖아? 이상.”
“그럼, 우리가 뭘 어떡하겠어?
이곳은 황제 폐하께서 성녀님의 희생을 기려서 친히 선포하신 자비의 대륙이야.
전 은하계가 제국 황제 폐하와 성녀님의 무한한 자비심에 감동하면서 이 땅을 주시하고 있다잖아?
그러니 이제 와서 관리하기 힘들다면서 그냥 내팽개치고 떠날 수는 없는 일 아닐까? 이상.”
이르피오의 이런 대꾸를 듣자, 이그시아는 더더욱 크게 울화를 터뜨리면서 그만 선이 넘는 발언을 하고 말았다.
“바보야, 넌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믿냐? 전 은하계가 황제 폐하의 무한한 자비심에 감동하는 것 좋아하네!
그게 전부 우리를 더 고생시키려고 높으신 분들이 만들어낸 프로파간다라는 걸 몰라?
지상에서 자기네들끼리 싸우다 죽어서 알아서 개체수를 조절하는 것 외에는 예쁜 구석이라고는 없는 저런 열등한 족속들을 가지고 무슨······”
“조용히 해! 말이 심하다!
여기는 팀장 이아테스, 지금 이 순간부터 임무 수행 중 통신기를 이용한 사적 대화는 금지한다.
특히나 황제 폐하와 제국의 정책에 대한 무엄한 발언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이상.”
이그시아가 한창 열을 올려서 선을 넘는 발언을 했을 때, 그녀의 바로 뒤에서 날아가고 있던 젊은 남자 이아테스가 엄하게 주의를 주면서 말을 잘랐다.
그는 짧은 머리를 붉은색과 갈색으로 염색했으며, 연령 등급은 17이었다.
하지만 소년이라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고, 청년이라 하기에는 약간 어려 보이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 표정이 다소 엄격하게 굳어 있어서 실제로는 연령 등급 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느낌이었다.
“팀장, 미안해. 하지만 너무 화가 나서 말이야. 이상.”
이그시아는 움찔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우리는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명령에 복종하면 된다.
그게 온실 화초에 물을 주는 일이든, 쓸모 없는 지상 거주민을 보호하는 일이든, 우리는 왜 그런 명령에 따라야 하는지 전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단 말이다.
알아들었으면 임무 수행에만 집중하도록. 이상.”
“잘 알겠다. 이상.”
이아테스의 거듭된 주의에 이그시아는 내심 투덜투덜하면서도 겉으로는 입을 다물었다.
다만, 조금 전에 지나쳐 온 파미아 화산을 향해 슬쩍 삿대질을 하면서 마음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지금 당장 저 화산이 폭발해서 지상에 사는 하찮은 놈들이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모두 여기서 할 일이 없어지니까, 어딘가 다른 좋은 곳으로 재배치될 텐데!’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은백색의 백조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큰 소리로 자기 주인 이셀리아에게 급박한 경고를 보냈다.
“경고! 여기는 이셀리아, 파미아 화산 방면에서 중대한 이상 발생! 고에너지 반응! 이상.”
백조의 주인인 이셀리아가 그걸 받아서 해석한 다음, 맨 뒤쪽에서 팀원 전체에게 다급하게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어? 나 때문이 아니야! 나 때문이 아니라고!”
워낙 절묘한 타이밍에 벌어진 돌발사태였기 때문에, 속으로 화산 폭발이 일어났으면 하고 저주한 이그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변명을 하면서 대경실색했다.
“경고!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아르케의 파동이 감지됩니다. 방어와 회피 모두 불가능!
전원 물리적, 정신적 충격에 대비하기 바랍니다! 이상.”
이셀리아의 거듭된 경고와 때를 같이하여, 파미아 화산 방면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엄청난 크기의 파동이 일행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진공을 진공답지 않게 가득 채우고 있는 근본 물질인 아르케의 강력한 파도.
좀더 정확히 말하면, 밀도가 높은 부분과 낮은 부분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종파였다.
이셀리아를 제외한 다른 팀원들은, 비록 시각적으로는 그 파동을 전혀 인식할 수 없었지만, 뒤쪽 화산 방면으로부터 섬뜩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느낄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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