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대륙 전쟁기 제 122화: 동쪽 바다에서의 결전 (08)
한편, 마치 도망치듯 멀어져 가는 이레니아의 뒷모습을 바라 보면서, 좀 전까지 이그시아를 업고 있었던 젊은이 카리아스가 옆에 있는 노인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크로제 선생님, 그 잘난 소디아인이 저렇게까지 당황하는 건 저도 처음 봤습니다.
놈들은 항상 오만하고 자신감이 넘쳐서, 저런 어린애들까지도 종종 노골적으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업신여기곤 하지 않습니까?
이번에 틀림 없이 무슨 큰일이 나도 아주 단단히 난 것 같습니다.”
크로제 노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늙은이의 생각이 맞는다면, 저 셀비아라는 아이는 곧 자네 아버님이신 카르바라님도 찾아가게 될 것이야.
자네 말 대로, 오늘 밤에 소디아인 사이에 무슨 엄청난 사건이 터진 게 분명하니까.
방금 전에도 기본적으로 온몸에 초조함이 잔뜩 배어 있어서 무척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더군.
계속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면서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정말 흥미롭기까지 했다네.”
“아까 포르세 파벌에 속한 패거리 하나가, 똑같은 이름의 소디아인 소녀와 초록색 고양이한테 된통 당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지 않습니까?
동부인과 많이 닮았으면서도 어딘가 굉장히 이국적인 외모를 지닌 소년 한 명을 가죽 자루에 담아서 비싼 값으로 팔아 넘기려고 데려가다가 당한 일이라지요?
그 패거리는 지금 여기저기서 자신들이 초록색 괴물한테 당했다고 미친 듯이 떠들어대는 모양입니다.”
“그래. 그 소년도 보기 좋게 빼앗겼다고 하지.
하지만 소디아인이 어떤 사건을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경박하게 처리했다는 말은 예전에 들은 적이 없네.
그래서 자네와 내가 순찰하다가 발견한 소녀를 곧장 마을로 데려가지 않고, 일부러 숲 속 먼 길을 돌아가면서 시험해 본 게 아닌가?
혹시나 소디아인 쪽에서 먼저 접촉을 해오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맞습니다. 그런데 설마 이렇게 빨리 소디아인, 그것도 셀비아라는 동일 인물이 찾아와서 자기네 쪽 사람이니 부디 넘겨달라고 부탁할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크로제 선생님께서는 대단하십니다.
아버님께서도 선생님께서 정말 현명하시니 기회가 될 때마다 많이 배우라는 말씀을 저한테 자주 하곤 하십니다.”
“그건 과찬이네. 이번에는 요행히 예측이 맞아 떨어졌을 뿐이야.”
“예측이 맞아 떨어진 것뿐만이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전혀 겁이 없이 셀비아라는 여자아이를 몰아붙여 쩔쩔 매게 만드시는 것을 보면서도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저러다 수틀리면 문제의 패거리처럼 험한 꼴을 당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은근히 등골이 오싹했는데요.”
“사실은 무척 긴장했네. 어떻게 안 그럴 수가 있겠나?
저 여자아이가 장난 삼아 손 하나만 까딱해도, 이 늙은이는 꼼짝 없이 죽은 목숨일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저들이 비록 오만하긴 해도, 나름대로 자신들이 정해놓은 규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면서 움직이는 것 같더군.
그래서 힘으로 위협하지 않는 한, 말재간을 부리는 정도로는 결코 해를 당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던 걸세.
이번에 그런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도 무척 흥미로운 일이지.”
크로제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빨리 마을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신중하게 대책을 의논해 보세.
가장 먼저 발견되어, 지금은 자네 누님이 저택에서 보살피고 있는 그 소디아인 여자 아이가 혹시 정신을 차렸는지도 확인해 보고 말이야.”
카리아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레니아가 사라진 반대쪽 숲 속을 향해 짧고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곧 훈련이 잘 된 말 두 필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나저나 그 정신을 잃은 여자 아이는 비몽사몽간에 자기 이름이 이셀리아라고 말한 모양인데......
생각해 보면, 소디아인치고는 좀 이상한 이름이 아닌가?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자기네들끼리 쓰는 무슨 암호인 걸까?”
“그러게 말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거기다 숲 속 곳곳에서 정신을 잃은 소디아인 또는 소디아인과 관련된 사람들이 연이어 발견되고 있으니, 저는 정말 불안합니다.
이러다가 오늘 밤에 정말 세상이 뒤집히는 큰일이라도 나는 거 아닙니까?
뜬소문이 아니라 진짜로 저 파미아 화산이 폭발하는 건 아니겠지요?”
카리아스가 크로제 노인을 부축하여 말에 오르는 걸 도와주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낸들 알겠나. 어차피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일 테니 애초부터 아예 신경 쓰지 말게.
가령, 구름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결과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비가 내리는 거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구름 속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신경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은 그저 주어진 결과물인 빗물만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노력하면 되네.
구름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하는 문제는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알겠나?”
이렇게 말한 크로제 노인은, 주름이 가득한 눈을 가늘게 뜨고 이레니아가 사라진 곳을 잠시 더 노려보았다.
그리고 곧 카리아스와 함께 말을 달려 어디론가 바쁘게 사라졌다.
“아이고, 혼났다! 혼났어!”
그러는 사이, 이르피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온 이레니아는, 극도의 정신적 피로 속에서 다시 한번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업고 있던 이그시아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 놓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지? 멀리서 보니까 대화가 잘 안 풀려서 쩔쩔 매는 것 같던데?
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죽일 수 있는 허약한 늙은이를 상대로 뭘 그렇게 고생한 거야? 지켜보는 내가 다 창피하더라.”
이르피오는 자기 동료를 무사히 데려온 것 자체는 반가워하면서도, 다분히 빈정거림을 섞어가면서 따져 물었다.
역시나 어둠 속 멀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계속해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까딱했으면 정말 총알이 날아왔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니, 이레니아로서는 정말 등골이 오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괜찮아요. 다 잘 끝났어요. 이렇게 무사히 데려왔잖아요. 지금 당장 코어를 복구하고 깨워야 하니까, 잠깐만 주변을 좀 지켜주세요.
단, 혹시나 수상한 자가 접근해 오더라도, 지상 거주민을 무작정 쏴 버리는 건 곤란하다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
“그건 알겠는데, 너, 자꾸 명령조로 말하는 게 별로 마음에 안 든다.
누가 상급자인지 잊은 거야? 아니면, 잘난 집행부 소속이라서 항상 거드름을 피우는 게 몸에 배어 있는 거야?
너 보다 직급이 높다는 걸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이르피오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면서 트집을 잡고 심술을 부리자, 이레니아는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죽을 것만 같았다.
좀 전에 웬 교활한 노인을 상대하느라 정말 힘들어 죽겠는데, 여기서 또 이런 놈한테 시달려야 하다니.
“잊었을 리가 있나요. 명령이 아니라 제발 부탁 드린다는 거예요. 화를 푸시고 좀 도와주세요.”
이레니아는 앞으로 계속 이렇게 심술을 부리면 비위를 맞춰주는 짓을 반복하면서 특별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도리가 없으니, 꾹 참고 이그시아를 깨우는 작업에 착수할 수밖에.
비록 심술을 부리긴 했어도, 막상 소중한 동료를 깨우는 작업이 시작되자, 이르피오는 혹시나 뭔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주변을 잔뜩 경계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레니아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마찬가지로 대략 5분쯤 걸려서 이그시아의 코어와 프레임을 복구하고 정신을 차리게 할 수 있었다.
“뭐야?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순조로운 작업 끝에 무사히 정신을 차린 이그시아였지만, 한동안은 깊이 잠이 들었다가 놀라서 갑자기 깨어난 사람처럼 금방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그시아가 어리둥절해 하는 와중에, 이르피오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대뜸 그녀를 부둥켜 안으면서 눈물까지 쏟았다.
상대방이 징그럽다면서 당장 떨어지라고 소리를 질러도 차마 손을 놓지 못했다.
이레니아는 그걸 보면서, 이 성질 더러운 소년이 어쨌든 자기 동료만큼은 진짜 끔찍하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같은 배양액을 먹고 자랐다고 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이르피오, 여긴 어디야?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그만 달라붙고 빨리 떨어져서 설명이나 해봐.”
이그시아가 거듭 따져 묻자, 이르피오도 겨우 손을 놓고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 말이야······”
이번에는 이르피오가 있었기 때문에 이레니아는 직접 이그시아에게 사정 설명을 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직하게 쑥덕거리면서, 때때로 이쪽을 향해 기분 나쁘게 손가락질을 하기도 하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는 것이 영 거슬렸다.
틀림 없이 지극히 왜곡된 상황 설명과 함께 자기 험담이 오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뭐? 그러니까 이셀리아가 지금 행방불명이라서, 직급이 낮은 저 아이가 임시로 우리 팀의 서포터를 맡는단 말이야?
그것도 하필 치사하고 더러운 집행부 쪽 요원이라고? 미쳤어, 정말!
거기다 이셀리아부터 찾는 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특별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니, 말도 안돼!”
잠시 후,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한 이그시아는 버럭 화를 내면서 도끼눈을 하고 이레니아 쪽을 새삼 무섭게 노려보았다.
마치 그녀가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도 되는 듯한 험악한 표정이었다.
“나도 영 불만이긴 하지만, 높으신 분의 뜻이라는 데 뭘 어쩌겠어? 일단 팀장부터 찾고 보자.”
이르피오도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이그시아를 달랬다.
“그래, 우리 팀장! 팀장이라면 이 미친 짓을 막아줄 거야! 이아테스 팀장은 지금 어디 있어?
명심해! 허튼 수작을 부리면 혼내 줄 거야! 너희 집행부 놈들이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지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이그시아가 무섭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이레니아는 그저 고분고분 대꾸할 뿐이었다.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여러분 팀의 이아테스 팀장이 있는 위치는 이미 파악해 두었습니다.
제가 반드시 팀장을 구할 테니까, 여러분께서는 제발 침착하게 행동하시고, 지상 거주민을 함부로 해치지 않도록 해주시기만 하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그시아도 이르피오와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이면서 으르렁거렸다.
“이게 어디서 감히 명령질이야? 네가 더러운 집행부 소속이라고 우리 상관이라도 되는 줄 알아?”
“아, 제발 좀! 그러니까 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정중하게 말씀 드렸잖아요?”
이레니아는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두 사람을 달래어 문제의 이아테스 팀장을 찾으러 나섰다.
이번에도 높은 나무에서 나무로 뛰어넘어가면서 빠르게 그가 있는 좌표 인근에 도착해 보니, 그곳은 그냥 숲 속 공터가 아니라 제법 커다란 마을이었다.
그 마을 주변에는 목책과 감시 초소가 든든하게 세워져 있었고, 한밤중임에도 횃불을 밝혀 놓은 채 활과 화살로 무장한 사냥꾼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 눈에 봐도 보통 마을이 아닌 것 같았다.
이레니아는 속으로 여기가 바로 말로만 듣던 숲의 사냥꾼 집단의 수장이 있는 마을이로구나 하고 직감했다.
“정말 저 마을에 있는 게 맞아?”
이르피오가 마을 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물었다.
“네, 여러분 팀의 이아테스 팀장은 저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저택 안에 있는 것 같아요.
관리국에 등록된 코어의 반응이 거기서 잡히니까요."
이레니아가 구식 무인기를 이용하여 하늘 높은 곳에서 스캔한 데이터를 거듭 확인하면서 대답했다.
“너, 설마 이번에도 또 행상인인 척하고 저기 가서 협상할 거야?”
이르피오가 불만스러운 투로 물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이 말을 듣고, 이번에는 이그시아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
“아니,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는 거지? 우리 둘이 나서면 금방 마을 전체를 싹 쓸어버릴 수가 있는데?
그냥 얼른 다 죽여버리고 팀장을 구해와서 이셀리아를 찾아 나서면 안 되는 거야?”
“누가 아니래. 네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세상에, 이 집행부 바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죽여버릴 수 있는 노인네 하나를 상대로 쩔쩔 매더라니까.
보는 사람이 다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어.”
이르피오가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치면서 이레니아의 속을 있는 대로 긁어 놓았다.
“더러운 집행부 놈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이그시아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둘이 같이 새삼 깔보는 듯한 눈초리로 이레니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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