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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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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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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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_호위무사 한울

DUMMY

암흑성단의 정원은 초록이 무성했다. 연두에서 진초록까지 다양한 초록빛과 함께 연노랑에서 보라까지 화사한 색을 덧입었다.


나무 위에 집과 다리를 세울 만큼 굵고 우람한 나무들이 밀림을 이룬 곳도 많았다.


해밀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향차를 즐기며 초록의 정원을 내다보았다.

‘미사랑님이 보시면 기뻐하실 거야. 저렇게 잘 자라니.’


창가의 맞은편, 손님용 의자에서 차를 마시는 이는 영진성단의 호위무사 마로였다. 오랜만에 손님이 함께 있으니 해밀은 말하고 싶어 입이 간지러웠다.


“여라함님은 어디 가셨나?”

“동명선위님께 가셨습니다. 힘들 때는 늘 거기 가시죠.”

“지금은 신령수로 계신 그분 말이지? 스승님을 찾아간 걸 보면 생각이 많으신가 보네.”


해밀은 배 위에 손을 얹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자네는 왜 안 따라갔나?”

“혼자 간다고 하셨으니까요. 전 무사이긴 해도 수행비서가 아니라서요.”

“아니, 호위무사나 수행비서나···.”


해밀은 탁자에 쌓인 천사들의 편지를 뒤적였다.

“비서라고 하니까 말인데, 나도 무아가 없어져서 어찌나 불편한지. 대체 무아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길게 자란 눈썹을 들썩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로가 창밖을 내다보며 초조해하자 해밀이 흘끗 창밖을 살펴보았다.

“한울은 아직 안 온 모양일세.”

“그러네요. 지금쯤 돌아올 거로 생각했는데.”

마로는 손가락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암흑성단 수석의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탁자 뒤쪽 벽에 커다란 열쇠 모양의 부조가 걸려있었다.

해밀의 몸집보다도 큰 열쇠는 섬세한 조각에 황금색과 초록이 어울려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로가 열쇠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해밀이 자랑스럽게 손을 들어 열쇠를 가리켰다.


“이게 말이지. 미사랑님이 특별히 내게 주신 거라네. 날 얼마나 아끼시는지 알 수 있지. 내가 고생하는 걸 그분은 아시는 게야.”

해밀은 눈물을 닦는 척 소매 끝으로 눈꼬리를 찍었다.


“못 보던 거네요?”

“그게 그러니까···, 대분성 전투가 일어나기 전이었네. 열쇠를 직접 걸어주시면서 ‘나를 지키듯 이 열쇠를 지켜줘.’라고 말씀하셨지.”


해밀이 일어나 마른 수건으로 열쇠를 문질렀다.

“보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손질하는지. 먼지 한 톨 안 묻게 잘 닦고 있지.”

진지한 얼굴에 눈빛마저 그윽해지는 것을 보니 미사랑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기린각은 어떻게 된 건가요?”

마로의 질문에 해밀의 눈동자에 서렸던 아련한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흥분해서 마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니까, 내 말이. 대체 아유라는 무슨 속셈이냐고. 떡하니 대명천에 그런 걸 세우다니.”

“해밀님도 모르시는군요?”


“염라성은 딱히 수하를 두지 않는다네. 솔직히 그녀가 영력이 강한 건 인정하네. 어떨 때 보면 미사랑님 만큼 강한 것 같기도 하고. 차원을 건너온 존재이지 않은가?”


“진백성단의 진유가 옮겼다는 건 알고 계신가요?”

“뭬야? 진유가 아유라와 손을 잡았다고? 그럼, 율명님의 명령으로 그리 한 건가?”

“거기서 암흑성단의 힘을 흡수하려는 건 아닐까 해서요.”

“설마···.”

해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상대가 아유라라면 그럴 수도 있다. 대명천에 기린각을 세운 이유가 우주의 균형을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유라가 암흑성이 아닌 게 확실한가요?”

“암흑성단에는 들어오지도 않는데 어떻게 새로운 암흑성이라는 건지···.”


“그게 이상합니다. 미사랑님이 안 계신 데도 암흑성단이 굳건하니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요. 아니라면 기린각을 경계해야겠군요.”

“자네 말 잘했네. 호위대에게 감시하라고 해야겠어. 가만, 한울은 아직도 안 온 건가?”

해밀이 부리나케 일어나 창밖을 휘둘러보았다.


그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문이 열리고 한울이 들어왔다.

한울은 체격에 어울리는 커다란 검을 들고 우수에 찬 눈빛으로 창밖 초록 숲에 시선을 맞추었다.


해밀이 달려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마침 자네 얘기를 하고 있었네. 대명천에 세운 기린각을 감시해야 할 것 같아.”

“이미 호위를 두었습니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면 바로 알려드릴 겁니다.”

한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마로 옆에 앉았다.


마로는 피식 웃으며 한울에게 차를 따랐다.

해밀이 머쓱해서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도 들었네. 하늘의 성물이 사람을 주인으로 정했다면서?”

“네. 새 주인을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지면 타죽지 않나? 사람을 가르쳐서 뭐에다 쓰려고?”


“그건 알 수 없지만, 사연이 있을 겁니다. 사로잔과 함께 하는 이들에게만 무기이고 나머지는 보석입니다.”


마로가 차를 한 모금 머금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랑누도 마찬가지겠군. 그쪽은 부녹이 따르기로 했던데?”


“여라함님은 무슨 생각이신지, 원. 둘 다 빨리 데려와서 혼을 합치면 될 것 아닌가?”

해밀이 숨을 푹푹 내쉬며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미사랑님의 검을 찾을 때까지 못 올 겁니다.”

한울이 장담하자 마로가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그 검이 중요한가?”


“인간세로 떨어지면서 반으로 쪼개졌어. 어디로 들어갔는지 모르지만, 미사랑님의 혼 조각이 두 사람으로 태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야.”

“그럴듯하군. 그나저나 난 돌아갈 시간이야. 잠시 얘기 좀 하지.”

마로가 일어나며 한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해밀은 이렇게 빨리 손님이 떠나는 것이 아쉬웠다. 그러면서도 호위무사들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기에 잡지 못했다.

입맛을 다시던 그는 일어나 황금빛 열쇠를 닦기 시작했다.


*


마로는 한울을 데리고 수애천 수련장에 들어섰다.


천선계의 무사들이 배우고 수련하는 수애천은 장엄관문 바로 옆에 있었다.

공명의 들판 아름누리와 장엄관문 사이에 위치한 훈련소 수애천에서 마로와 한울, 진유가 함께 생활하고 수련했다.


마로는 감회에 젖어 수련장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와보는군. 우리가 훈련하던 때와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


순간 한울의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과 맞물려 들어갔다. 자신 안에 있는 누군가의 기억을 찾아냈다.

“이곳이 한울이 미사를 처음 만난 곳이군.”

한울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기억이면서도 다른 존재의 것처럼 아득했다. 다음 순간 눈을 가린 희미한 막이 걷히고 모든 것이 생생해졌다.

미사랑을 처음 본 순간,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까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뭐라고? 자네 무슨 말인가?”

마로가 돌아보았다.


“아니, 아닐세. 예전 생각이 나서 말이야.”

“자네 몹시 달라진 거 아나? 가끔은 전혀 다른 존재 같아, 말수도 줄고 말이야.”

마로가 어두운 눈빛으로 한울을 돌아보았다.


“어떨 때는 껍데기만 남은 것 같다니까. 그렇게 뜻 모를 소리를 하니 해밀님이 걱정하시지.”


한울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런데 왜 나를 찾았나?”

“해밀님은 걱정이 너무 많아서 말일세. 마음 놓고 얘기할 수가 있어야지.”


한울은 잠자코 기다렸다. 마로를 따라 수련장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마로가 손가락으로 바람을 일으키니 투명한 바람벽이 생겨나 주위를 감쌌다. 벽 바깥에서는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갈피가 어디 있는지 아는가?”

“미사랑님이 만든 갈피라면 아유라가 없앴겠지.”


“귀사전 진신궁에 있다네. 정귀를 부리려고 박아놓았을 거야.”

“우발수는 천인은 못 들어가도 선인들은 건널 수 있지 않나?”

“갈 수야 있지만, 돌아올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


마로는 바람벽 안쪽을 서성였다.

”선사들이 알려준 소식이 있네.”


한울은 곧은 자세로 서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


“두 마리 정귀가 귀사전에서 나왔다네.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지.”

“정귀를 봉인하려면 갈피부터 찾아야겠군. 우발수 너머에 누가 갈 수 있나?”


“인간세에서 태어난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자는 가능하지.”

“그런 괴이한 존재가···, 있을까?”

한울은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간세에는 여러 종족이 모여 사니 찾으면 있겠지. 그보다 자네가 도울 일이 따로 있네. 여라함님이 부탁하신 일이야.”

“여라함님이?”

“사로잔을 도와줄 존재가 필요해. 이를테면 호위무사 말이지.”

“그게 나란 말인가?”


“왜 이러나? 이미 사로잔을 돕는 걸 누가 모른다고. 자네도 알지 않나? 그들은 정귀는 물론이고 반귀와도 싸운 적이 없네. 본 적도 없을걸. 그러니 자네가 도와야지.”


사람이라면 요귀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망석이나 사음귀를 익숙한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기억하니까. 그것이 요귀가 자신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요귀는 사람의 탐욕에서 태어나 집착과 분노 따위를 먹이로 삼았다.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 했다.

지나치게 무섭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한울은 망설였다.

지금까지 사로잔을 지켜보면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사로잔을 생각하니 심장이 불끈거렸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아랑누 쪽은···. 여라함님이 직접 가실 거야. 위험하다고 말려도 듣지 않으셔.”

마로가 걱정하며 바람벽을 둘러보았지만 한울에게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는 이미 사로잔이 서 있었다.


마로는 그런 한울을 보면서 걱정이 앞섰다.

‘저건 마치 아랑누를 생각하는 여라함님의 눈과 똑같군. 큰일이네, 큰일이야.’


마로가 한울의 팔을 건드렸다.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대련 어떤가?”

“듣던 중 반가운 말일세.”

상념을 잊기 위해선 몸을 쓰는 게 상책이었다.


한울도 마로를 따라 빛의 검을 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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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공간을 열다 22.08.06 59 0 13쪽
206 아유라의 독백 22.08.06 46 0 7쪽
205 아랑누_해갈 22.08.06 43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2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4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3 0 12쪽
200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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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5 0 10쪽
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3 0 12쪽
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49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6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57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4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7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7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1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59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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