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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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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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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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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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과 단검(8) - 대가

DUMMY

#1


산이 옆구리에 조디악의 머리를 끼고 돌아왔을 때, 헤이카는 그게 무언가의 머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목구비는 없었고 겉보기엔 그저 정체 모를 쇳덩어리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처음엔 헤이카가 부른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빌딩을 노리려는 걸 보고 새인가 싶어서 잡았는데, 조디악이지 뭐예요.”


그래서 산의 설명을 들은 헤이카는 처음엔 할 말을 고르느라 골치가 아팠다. 저게 정말 조디악의 머리라면, 조디악 시연회에서 본 그 고철 덩어리 천사가 고작 한 사람에게 패배했다는 얘기였다.


헤이카는 자료 영상으로 봤던 시연회를 떠올렸다.

조디악은 ‘천사’ 라는 이명답게 날개와 빛나는 고리를 머리 위에 띄우고 날아다녔다. 손바닥에선 짐승을 바싹 태워버리는 고열의 빛이 광범위하게 뿜어져 나왔고 날개에서 흩뿌리는 미세 입자는 짐승의 호흡기를 침투해 내부에서부터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이동수단도 없이 전 세계를 누비던 크루아틀의 기동성에 대응하기 위해 조디악도 엄청난 속도의 장거리 비행이 가능했다. 이클립스 공업의 항공 전력을 전부 때려 부어도 조디악 하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을 정도였다.


그 외에도 탑재된 여러 시스템은 그녀가 아는 것도, 전혀 모르는 것도 있었지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조디악은 인류 역사의 한 획을 그을만한 병기였다. 바보 같은 인류의 전쟁을 무력으로 종식할 정도로, 마치 인류가 만들어낸 델라리온 머스칼 같았다.


그래서 헤이카는 만약 조디악과 적대하게 되는 경우를 고려해 이미 머스칼을 이용한 대응 계획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그건 하늘에 있는 건데..?”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헤이카가 내뱉은 말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얼빠진 소리였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건 60층에 육박하는 고층 빌딩을 나이프 한 자루와 맨몸으로 외벽을 타고 내려가는 인간이었다. 하늘을 나는 천사를 잡았다고 해도 썩 이상하진 않았을 것이다.


산은 자기 등에 메고 있던 참수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쓰는 법을 이제 좀 알겠거든요. 누를 수 있으면 반대로 띄울 수도 있으니 위로 솟구치는 방향만 조절하면.. 그런데 이거 물어내라곤 안 하겠죠?”


산은 조디악의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잘린 단면에서 피가 쏟아지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깨끗한 머리였다. 머리를 받아든 헤이카는 오묘한 표정으로 그 머리를 살폈다.


“..몸은?”

“날개랑 같이 떨어졌죠. 아, 혹시 그거 회수하면 조디악에 들어간 기술을 우리가 먹을 수 있어요?”

“뜯어보는 것부터 해야겠지만.. 류호 공업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제가 방해 못 하게 하면 되겠죠.”


산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


지금 황성은 수많은 공업사가 서로의 기술을 개발해 경쟁하고 국가와 기관이 공업에게 기술 청부를 거는 포화의 기술 혁명 시대다. 이런 시대에 서로의 기술을 노리는 전쟁은 흔한 일이지만, 류호 공업은 그런 전쟁터에서도 승자의 자리에 오른 연방 최대의 공업사다.


단순히 힘으로 짓밟는다고 끝날 싸움이었다면 기술 전쟁은 전쟁이라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에이전트를 두고 다투는 냉전도 없었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게 과거의 산이었다면 헤이카는 이미 산을 말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산이 보이는 자신감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조디악을 떨어뜨린 건 산이었다.


“산. 아직도 날 믿어?”


조디악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헤이카가 물었다. 콧잔등을 긁던 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갑자기 그건 왜요?”

“네가 말한 대로야. 난 네게 다 털어놓지 않았고, 거짓말도 많이 했어. 그리고 확실하게 말해둘게. 난 네게 목줄을 걸고 있었어.”


이제와서 터놓기엔 한참이나 늦은 시기였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헤이카는 말했다. 산에게서 무슨 말을 듣더라도 불평조차 늘어놓을 수 없는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네게 모든 걸 알려줄 순 없고 난 여전히 널 필요로 할 거야. 네 힘을 이용할 거고, 네 이름과 자격을 이용할 거야. 게다가 네가 공업을 떠나지 않도록 붙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지.”

“그렇게 제가 필요한 이유도 여전히 알려줄 수 없는 것 중 하난가요?”


산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입술을 움찔거리던 헤이카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했다. 그대로 시선을 바닥에 둔 헤이카였다.

어두침침한 복도에 헤이카의 얼굴엔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은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렸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서로의 목표를 위해 돕는 걸로.”

“..어떻게?”

“헤이카는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고 싶다면서요? 새로운 인류, 새로운 세상. 전쟁도 부족함도 과한 욕망도 없는 시대. 맞죠?”

“맞아.”

“제가 원하는 건 전에 말한 그대로예요. 이딴 세상에서도 잘 먹고 잘 살다 가는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거.”


헤이카가 끄덕였다. 산은 허리를 숙여 헤이카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깝게 들이밀었다. 서로의 시선이 같아지고 숨결이 느껴질 만한 거리였다.


“전 헤이카가 목표를 이룰 수 있게 도울 겁니다. 그러니 헤이카도 제 목표가 이뤄지도록 돕는 거예요.”

“그거면 되는 거야?”

“그럼요. 전 일단 다 제 걸로 만들 거거든요.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그거예요. 만족할 때까지 뭐든 가져보는 거.”

“회장 자리는 못 줘.”

“흐흐. 그럼 그건 나중에 하죠.”


다시 허리를 세운 산은 몸을 돌렸다.


“어디 가려고?”

“하던 일 마무리 하러요. 조디악 부품도 마저 주워오고. 조디악은 특별히 헤이카한테 줄게요. 선물.”

“내가 밉진 않아?”

“미울 게 뭐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인데.”


흘리듯이 던진 말을 마지막으로 산은 또다시 빌딩을 나섰다. 그가 떠나고 빈 복도를 멍하니 서서 바라보던 헤이카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욕망에 당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구나.”


그녀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건 잘린 천사의 머리뿐이었다.



#2


쉬지 않고 달린 기차는 마침내 시라비아 콜레타의 한 정거장에 멈춰 섰다. 기차 문이 열리자 경호원의 철통 같은 보호를 받으며 티엔 회장이 시라비아의 땅을 밟았다.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준비부터 도착까지 무려 이틀 만에 콜레타까지 달려온 탓에 쌓인 피로 때문도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그를 이곳까지 오게 한 끔찍한 소식 때문이었다.


조디악이 하필이면 이클립스 공업에게 넘어갔다. 티엔 회장은 최악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아직 부정하고 있었다.


그는 미리 시라비아에 들어와 있던 조디악 연구팀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랐다. 티엔 회장과 그의 경호 인력들이 탄 차량이 빠르게 기차역을 떠나 시라비아 도심을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




차량에서 막 내린 쿠스카는 고급 호텔을 앞에 두고 가장 먼저 담배를 꺼내 들었다. 늘 있는 일들로 쉴 틈이 없었지만 그나마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있을 정도였으니 대부분은 사소한 문제였다.


그때 마침 몇 대의 차량이 호텔 앞에 정차했다. 이어서 차량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본 쿠스카는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다시 집어넣었다.


“쿠스카!”


날이 선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티엔 회장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경호원들이 다급하게 그에게 따라붙었다. 쿠스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티엔 회장을 향해 섰다.


“티엔 회장. 오신다곤 들었는데, 조금 빠르셨네요.”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들으신 대로겠죠.”


쿠스카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의 말에 티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지만, 상대는 시라비아 마피아. 게다가 이곳이 그들의 도시였다. 티엔은 충동을 억눌렀다.


“일단 같이 들어가시죠. 마침 만나려던 사람이 와 있거든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조디악의 회수입니다. 다른 일에 시간을 쓸 여유는 없습니다. 왜 조디악을 그 도시로 보내신 겁니까?”

“그 이유가 이 위에 있어요.”


쿠스카는 호텔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티엔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쿠스카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서 호텔로 들어갔다.


어쩔 수 없이 티엔은 그를 뒤따랐다. 우르르 그의 경호원들이 티엔의 주변을 감싸들었다. 이곳이 시라비아라는 걸 고려한 엄중한 경호였지만 쿠스카는 그 꼴이 한심해서 못 봐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쿠스카와 티엔은 호텔의 숙소가 아닌 사무실처럼 보이는 장소였다. 이런 호텔에 있기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지만, 쿠스카는 익숙한 듯 코트를 벗어 한쪽에 걸었다.


익숙한 쿠스카와 달리 티엔은 더욱 어리둥절한 얼굴로 머뭇거리며 서 있기만 했다. 호텔에 있는 이 공간이 낯설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접대용 소파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여자와 그녀의 뒤에 선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티엔은 그 두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조금 늦었군. 저건 누구지?”


술잔을 손에 든 여자가 물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긴 쿠스카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티엔 라울입니다.”

“연방 공업사?”

“예. 류호 공업 CEO죠. 에콰.”


쿠스카는 일부러 티엔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녀의 이름과 함께 답했다.

티엔도 바보는 아니었다. 시라비아에서도 가장 크고 성가신 지역인 미다스의 여주인이 ‘에콰’ 라 불린다는 걸 떠올린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와서 앉으시죠. 티엔 회장님.”


쿠스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소파에 앉으며 빈자리를 눈짓했다. 머뭇거리던 티엔은 들리지 않게 심호흡하곤 소파에 앉았다. 맞은편에선 술잔을 입술에 붙인 에콰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느끼는 그대로의 눈빛이었다. 마치 베일 것처럼 예리하고 차가운 눈빛. 사람의 시선이 날붙이처럼 느껴진다면 딱 이런 느낌이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티엔 회장은 목에 칼이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한 자리에 셋이 모였으니, 이걸로 번거롭게 거쳐 갈 필요 없이 한꺼번에 이야기를 풀면 되겠네요.”

“...”


티엔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조디악을 공업에 빼앗긴 이유가 저 여자랑 무슨 관계가 있는지. 왜 이런 자리에 저 여자가 껴있는지.

두 사람을 살피던 쿠스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티엔 회장. 조디악을 그 죽은 도시에 보낸 건 이쪽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쿠스카는 에콰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에콰는 지루하단 얼굴로 술잔을 살살 흔들고 있었다.


“쿠스카, 당신이 보낸 게 아니었다니.. 조디악은 테스트 명목으로 당신에게 빌려준 거지 시라비아 마피아가 멋대로 부리라고 빌려 드린 게 아닙니다!”

“착각하시는 것 같네요. 이건 시라비아 마피아의 뜻이 아닙니다. 애초에 변명할 필요도 없어요. 조디악이 그렇게 된 건 결국 무능한 류호 공업 탓 아닌가?”


쿠스카의 말에 티엔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뭐.. 천사? 대 짐승용 병기? 거창한 소개는 잘 알겠어요. 그런데 칼잡이 하나를 못 당해냈죠. 깡통도 이런 깡통이 있나.”

“칼잡이..”


티엔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칼잡이였습니까? 사람이 조디악을 잡았다고..? 그게 말이 되는 얘깁니까?”

“내가 키운 아이니까.”


대답은 에콰 쪽이었다. 냉랭한 말투에 티엔은 약간 위축된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쪽의 조디악을 잡은 칼잡이. 내가 기른 아이야. 이름은 산.”

“..이클립스 공업 노페이스 팀장. 전직 시라비아 마피아 출신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그는 비감응자일텐데요.”

“류호 공업의 회장님이라면 들어본 적 있지 않나? 감응자도 아니면서 감응자처럼 초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하는 자들에 대해서.”


이클립스의 괴물인 델라리온 머스칼만 해도 그렇다. 올드 아일랜드의 기사들 중에서도 그런 자들이 있었고, 그 외에도 비감응자의 특이 현상에 관한 이야기는 꾸준히 들려오는 얘기였다.


단순한 헛소문이라기엔 사례가 많았다. 델라리온 머스칼이라는 대표적인 예시도 있었다. 그 누구보다 이클립스 공업을 경계하던 티엔 회장이었기에,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티엔의 복잡한 얼굴을 안주 삼아 에콰는 술잔을 기울였다. 독한 술을 넘긴 그녀는 후- 하며 숨을 내뱉었다.


“조디악이 그렇게 될 걸 알고 계셨습니까?”

“얼추 예상은 했지.”

“그럼 왜 조디악을 보내라고 하신 겁니까?”


티엔이 물었다. 쿠스카도 에콰의 대답이 궁금했다. 무려 바르바로사의 자리를 내건 거래였지만 정작 그녀가 왜 그런 거래를 제시한 것인지 쿠스카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번에도 잠시 뜸을 들이던 에콰는 조금 뒤 입을 열었다.


“그쪽이 내 아이를 죽이려 했으니까.”

“죽이려 하다니..”

“얼마 전 내 구역에서 움직이던 쥐잡이들.”


에콰가 술잔을 내려놓은 것과 동시에 줄곧 그녀의 등 뒤에서 묵묵히 있던 남자가 갑자기 코트 안쪽에서 낡은 총을 꺼내 들었다.


낡아빠진 구식 시라비아제 권총. 그 권총의 등장에 티엔 회장을 경호하던 경호원들도 방탄 가방을 앞세워 티엔 회장을 보호하며 다른 손엔 재빠르게 총을 쥐었다.


“겨누면 죽어.”


에콰가 말했다. 경호원 중 일부는 움찔했지만, 일부는 남자에게 총을 겨누고 말았다. 그것과 동시에 남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훅하며 들어오는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한 경호원의 머리가 잘렸다. 다급히 다른 경호원들이 대응하려 했지만 그건 오히려 실책이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바람 소리. 칼부림 소리. 눈먼 총성. 한 호흡의 시작과 끝. 티엔이 놀란 눈을 끔뻑거리는 동안 그가 데려왔던 경호원들은 모조리 목이 잘리고 말았다.


그들 사이에 우두커니 선 남자가 목에서 뚜둑거리는 뼛소리를 냈다. 화사한 꽃무늬 머플러와 같은 무늬의 안대가 천천히 티엔을 돌아보자 티엔 회장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티엔은 벌벌 떨며 굳어버렸다. 뒤늦게 아까부터 이 방에 있던 저 남자의 정체를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오코넬 다이아..”


처형인들의 대부라 불리는 남자. 이 시라비아에선 최고의 처형인으로 손꼽히는 그는 고작 경호원 몇 명으로 당해낼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이 자리에 있는 한, 티엔은 알몸으로 시라비아 한복판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티엔 회장.”


에콰의 목소리에 티엔은 부들부들 떠는 얼굴을 돌렸다. 빈 술잔을 어느새 다시 채운 그녀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차가운 날붙이 같은 눈동자였다. 그 속에 과연 모성애라는 게 있는지 의문이었다. 티엔은 그 괴리감이 더욱 두려웠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난 관심 없어. 하지만 내 구역에서, 내 아이를 건드리는 건 역시 거슬리더군.”

“저, 전 모르는 일입니다..”

“혀까지 자르고 싶진 않은데.”


오코넬의 구두 소리에 티엔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어느새 티엔의 앞으로 돌아온 오코넬은 티엔의 왼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에콰가 일어섰다. 그녀는 케이프 코트 아래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그게 도끼칼이라는 걸 깨달은 시점에서 티엔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졌다.


“대가는 받아가지.”


에콰의 말과 동시에 오코넬은 순식간에 티엔의 왼팔을 잡아당겨 테이블 위로 엎드리게 했다. 쭉 뻗은 그의 왼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어서 에콰의 도끼칼이 그의 왼손을 향해 가차 없이 떨어졌다.


몇 초간 멍하니 있던 티엔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피가 테이블과 바닥을 더럽히며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의 비명이 들리자 문이 벌컥 열렸다. 그곳엔 마피아 조직원들과 함께 흰 가운을 입은 늙은 의사가 성큼 걸어들어왔다.

의사는 준비해둔 것들로 능숙하게 티엔을 지혈했다. 마치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태연한 의사의 얼굴이 티엔은 더욱 두려웠다.


“조디악을 잃은 건 목숨 값으로 생각해.”


도끼칼의 피를 휙 털어내며 에콰가 말했다.


“만약 조디악이 아니었다면 손목이 아니라 머리를 잘랐을 테니까.”

“으.. 끄흐윽...”

“치워.”


조직원들은 티엔 회장을 끌어냈다. 그는 방을 나갈 때까지 괴상한 신음만 흘려댔다.


그렇게 티엔이 끌려나가고 쿠스카는 난장판이 된 방안을 둘러보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흥건한 피와 목이 잘린 사람들. 뚝 잘려 테이블 위에 놓인 티엔 회장의 왼손까지. 쿠스카는 이곳이 사무실이 아니라 마치 처형대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쿠스카.”

“...”


쿠스카는 흠칫하며 에콰를 보았다. 이전에 미다스에서 산과 공업을 함께 묻으려 움직이던 쥐잡이 무리엔 그들뿐만 아니라 쿠스카가 보낸 자들도 많았다.


시라비아 전체가 산과 헤이카 미켈런을 사냥하도록 유도한 것. 히든카드였던 어린 처형인들을 보낸 것도 모두 쿠스카였다. 티엔 회장이 저런 꼴이 된 걸 생각한다면, 다음은 쿠스카의 차례였다.


오코넬은 어느새 에콰의 곁으로 돌아와 목석처럼 서 있었다. 하지만 쿠스카가 섣부른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는 깨닫기도 전에 목이 잘릴 게 뻔했다.


“약속은 약속이지. 바르바로사 자리에 앉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제부턴 널 방해하진 않겠어. 지지가 필요하면 지지해주지.”

“..제겐 아무런 대가도 묻지 않으십니까? 저도 산 도련님을 죽이려고 처형인들을 보냈습니다.”

“저 연방 머저리는 외부인이었지만 넌 아니잖아. 그리고 네가 죽으면 콜레타를 누가 관리해?”


아직 이용 가치가 있다. 그런 의미였다. 쿠스카는 그걸 기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과 목구멍을 술로 적셨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봐.”

“산 도련님을 바르바로사로 만들려던 것 아니었나요? 왜 이제 와서 포기하는 거죠?”


자리에 앉은 에콰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먹고 빨갛게 물든 담배 끝에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올랐다.


“싫다곤 해도 바르바로사의 자격을 쥐여주면 그래도 해줄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군. 산은 공업으로 돌아갔잖아.”

“그것뿐입니까?”

“그것뿐이야. 전에 네가 한번 말했잖아? ‘어떤 일에 재능이 있는 것과 그 일을 좋아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라고.”


바르바로사의 장례식에서 했던 얘기였다. 쿠스카는 작게 끄덕였다.


“산은 날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않아. 너도 날 최악의 어머니라고 했잖아.”

“..그랬죠.”

“지금도 그래 보이나?”

“예. 당신은 여전히 최악의 어머니입니다.”


에콰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담배 연기를 후 내뿜었다.


“그러니 관뒀어. 반기지도 않는 보스 자리에 강제로 앉히면 더 미움을 살 것 같아.”

“그럼 조디악을 그 도시에 보낸 건 왜죠? 만약 산 도련님이 휘말렸다면..”

“확인이 필요했거든. 싹이 트기 시작했는지, 여전히 씨앗인지.”


쿠스카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디악을 잡는 걸 보니 싹이 텄어.”

“산 도련님을 말하는 건가요?”

“산은 씨앗이야. 난 꽃이었고. 그리고 씨앗은 꽃이 되겠지. 줄곧 내가 막아왔는데, 누가 껍질을 깨준 건지..”


쿠스카는 여전히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정작 에콰도 쿠스카의 이해를 요구하진 않았다. 그녀는 남은 술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에콰.”

“죄화(罪花)의 이야기야. 죄의 꽃은 씨앗을 낳고, 그 씨앗은 자라서 또 죄의 꽃이 되는 거지. 죄화만큼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건 없어. 만약 인간이 그 죄화 자체라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심성을 지닐 테고.”

“...”

“잘 마셨어. 사무실 더럽힌 건 사과하지.”


에콰는 잘린 머리의 피 웅덩이를 밟으며 쿠스카의 사무실을 나섰다. 또각또각 멀어지는 그녀의 뒤로 오코넬의 무거운 구둣발 소리가 뒤따랐다.


“..젠장.”


쿠스카는 찝찝한 기분으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 모에킹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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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6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6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4 9 13쪽
243 삼류 악당 +2 23.04.07 178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0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2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7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3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6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5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8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1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0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2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7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6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3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0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2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1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4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2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4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4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79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1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6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199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0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79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86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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