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부피 3
헤드라이트를 올리자, 국내에서 보기 힘든 차종, 칼라, 차 번호가 하사린네 차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최고다가 신고하는 사이, 강철은 바로 그 차로 달려가 휴대폰 손전등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전면과 측면의 에어백들이 터져 있어, 안이 분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운전석의 로드매니저와 뒷좌석의 하사린이 뒤집어진 채 있는 건 확인이 됐다.
순간, 온몸에서 손끝으로 찌릿찌릿함이 밀려왔다.
강철은 바로 오른 주먹에 힘을 모아 조수석 옆문 유리창에 갖다 댔다.
유리창은 맥없이 쩍쩍 갈라졌고, 강철은 그것을 뜯어낸 다음, 자동차문 잠금장치를 열었다.
그 사이, 최고다는 자신과 강철의 휴대폰 손전등을 함께 들고 비춰주었다.
강철이 뒷문을 여는 순간, 하사린과 눈이 마주쳤다.
살아 있어!
그는 생각하며 안전벨트를 풀어주고 슬로우 모션으로 그녀를 들어냈다.
운전석의 로드매니저도 의식이 있었고, 강철은 그 역시 조심조심 들어내면서, 최고다에게 근처 병원 응급실을 찾으라고 했다.
“저희 방금 병원 지나쳐 왔는데요? 길가에 있었어요.”
마음 같아선 그들을 안은 채 뛰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최고다가 병원에 전화했고, 곧 바로 앰뷸런스가 달려왔다.
그들도 차를 몰아 앰뷸런스를 뒤따랐다.
하사린은 오른쪽 팔과 다리, 로드 매니저는 목과 양쪽 다리를 다쳤다.
매니저가 깜박 졸음운전을 했던 게 사고의 원인이었다.
서울로 옮겨진 두 사람은 바로 병원에 입원했다.
강철이 그녀의 1인용 병실에 들어섰을 때, 하사린은 과일을 먹고 있었다.
포크로 찍은 망고를 사린에게 먹여주던 그녀의 엄마가 강철을 알아보고 반색했다.
“우리 사린이 생명의 은인이 오셨네. 바로 안 꺼내 줬으면 어쩔 뻔했어? 고마워요, 김강철 씨. 뭐라도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호호. 사린이를 시집보내 드릴까? 죽어가는 애 살려 놨으니 못 이기는 척 오케이 해야지, 안 그래요? 호호호호호.”
그녀의 엄마는 강철의 손을 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 나도 강철 씨한테 고맙다는 인사 좀 하게 휴식! 엄마는 어디 가서 휴식시간을 좀 가져, 응?”
내가 강철 씨 좋아하니까 질투가 나서 저래, 하고 군시렁거리면서, 그녀의 엄마는 망고 주스를 한잔 가득 따라서 강철에게 주고 병실 밖으로 사라졌다.
강철은 침상 옆으로 의자를 가져와 사린을 보며 앉아 주스를 마셨다.
“아까, 감독님 다녀가셨어. 상태가 어느 정돈지 보러 오신 거 같더라구.”
촬영이 계속되면서, 동갑인 강철과 사린은 말을 놓기로 했었다. 드라마에서도 동갑내기 친구 사이니까 잘 됐다면서, 사린이 먼저 제안한 거였다.
“내 말짱한 얼굴을 조목조목 보시더니 안심이 됐나 봐. 병실에 입원하는 걸로 대본 뜯어 고쳐서 지금 당장 찍어도 괜찮겠는 걸? 하고 농담도 하시고···”
그녀는 환자복과 어울리지 않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사린 씨 없는 씬부터 찍는 걸로 촬영 스케줄 바꾸겠다던데?”
강철이 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사린 씨 없으면 촬영장 썰렁하겠는데?”
그치그치? 하고 말하다가, 사린은 입을 삐죽하며 얘기했다.
“똑땅해 정말. 나 땜에 촬영 스케줄도 다 망가지고, 온 에어 날짜도 위태위태 해졌고, 강철 씨하고 러브 씬도 있는데 못하고···”
“좀 쉬면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러브 씬도.”
말하면서 강철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고마워, 그렇게 착하고 이쁘게 말해줘서. 그리고··· 이건 진짜 진심이야. 나··· 살려줘서 정말 고마워.”
사린이 마음을 담아 말했다.
“사린 씨가 안전벨트 확실히 하고 있었던 덕분이지, 나야 뭐 늘 하던 대로···”
강철의 말을 사린이 끊고 들어왔다.
“그거 알아? 내가 요즘 안전벨트를 꼭꼭 하고 다니는 이유?”
글쎄, 하고 강철이 말했다.
“하사린이 안전벨트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녀가 깁스 하지 않은 손으로 매트리스를 치며 소리 냈다.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바로, 강철 씨가 한 안전벨트 광고 때문이란 거.”
“그럴 리가.”
“그럴 수도.”
“비현실적인데?”
“현실이라니까!”
드라마 대사가 그대로 나왔다. 하하호호, 둘은 소리내 웃었다.
“고마워할 사람은 나네. 광고 보고 벨트를 했다니.”
강철이 말했다.
“앞으로, 내가 강철 씨한테 진 빚은 확실히 갚을게, 번개왕 강철 씨.”
사린이 말했다.
“깁스는 언제 풀어?”
“경과 봐 가면서, 가능한 한 빨리.”
사린이 깁스한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시간 나는 대로 또 올게.”
강철이 일어서며 말했다.
“더 있다 가면 안 돼?”
사린이 말했다.
강철은 웃으면서 손을 들어 보이고 병실을 나섰다.
또 와, 하고 사린이 말했다.
***
빈나리자는, 리유가 자신의 복수를 대신해줄 거라 굳게 믿었다.
소장의 마음까지 아낌없이 짓뭉개 준다면···
그래서 캡쳐사진을 리유에게 보냈던 것.
그러나, 그녀에게선 어떤 반응도 질문도 액션도 없었다.
차를 함께 마시면서 빈나리자가 물었다.
“엄마한테 그 캡쳐사진 내용에 대해 물어봤어?”
“그거, 다 사실이래요.”
리유가 말했다.
“화 나지 않아? 원장님한테.”
빈나리자가 목소리를 낮춰 얘기했다. 문득, 카이의 방이 의식돼서였다. 소장은 좀 쉬었다가 퇴근하자고 말했었다.
“우리 엄마, 많이 불쌍하고 원장님한테 화도 나지만,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요?”
리유가 말했다.
그런가? 하고 빈나리자가 말을 받았다.
“원장님이 저한테 해 주신 것도 많고, 마리아 엄마도 고맙구요. 그냥 제 가슴에 차곡차곡 묻어두기로 했어요.”
리유도 작게 얘기했다.
헐, 이러면 얘기가 틀려지잖아.
빈나리자는 생각의 수도꼭지가 갑자기 잠겨버린 듯한 기분이 됐다.
리유가 먼저 퇴근한다고 인사할 때도, 그녀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리유가 사라지기 바쁘게, 빈찬영이 그녀의 몸을 빠져나와 옆에 앉으며 말했다.
“복수의 부피가 반감돼서 그런 거야.”
“복수의 부피? 그런 멋진 말이?”
“멋진? 그럴 리가? 암튼, 우린 계속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던 거고, 걘 그 칼을 갈지도 않았을 뿐 더러, 칼 맞을 놈이 그동안 걔한테 공을 들였거든. 그 교활한 놈이 나쁜 거지, 그니까 우리, 걘 욕하진 말자.”
빈찬영이 속사포처럼 말했다.
“어지러워. 좀 천천히 말해.”
나리자가 얘기하자, 찬영은 씨익 웃고는 숨도 쉬지 않고 더욱 빠르게 말했다.
“그래서 얘긴데, 우린 지금부터 그 나쁜 놈이 치매에 걸리라고 열심히 온 마음을 다 바쳐 기도하는 수 밖에 없어. 아니지, 어쩌면 저 위에 계신 분이 불쌍한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어, 벌써 그 나쁜 놈에게 치매의 벌을 내리셨는지도 모르지.”
빈찬영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치매? 치맥? 갑자기, 치맥이 먹고 싶어 지는데?”
빈나리자가 말했다.
“좋아. 오늘 저녁은 치맥이다.”
그렇게 말하며 손뼉을 치려는 그를 빈나리자가 만류하려 할 때, 두루비가 나타났다.
카이의 방.
노크소리도 없이 루비가 왈칵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오빠오빠오빠오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카이가 놀라 눈을 뜨고 앉았다.
“넌 감금상태라더니 해제된 거야?”
맞은편 소파에 앉는 루비를 보며, 카이가 말했다.
“도망쳤어. 아무리 조신하게 굴어도 안 풀어줘서.”
루비가 말했다.
“어떻게? 보디가드가 붙어 있다던데?”
카이가 말했다. 루비한테 보디가드 붙였으니까 집밖으론 못 나올 거야, 하고 그녀의 엄마인 부원장이 얘기했었다.
“보디가드는 무슨. 그냥 운동 쫌 한 생날라리를 하나 붙였지. 그 눔, 내가 꼬셨더니 홀라랑 넘어오더라.”
“뭘로? 그 예쁜 미소로?”
“어머, 오빠도 이쁜 건 알아가지고.”
루비가 예쁘게 흘겨보며 말했다. 많이 연습한 표정이었다.
“내가 약을 쬐끔 선물했거든. 바로 하더라구.”
“니가 말하는 약이 그 약?”
“응, 그 약. 헬렐레 한 거 보고 나왔어.”
루비가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넌 약 많이 하니?”
“난 아파서 진짜 치료제로 먹는 거야.”
“어디가 아픈데?”
“girl의 병명을 묻는 거, 실례 아냐?”
“갑자기 웬 girl?”
“오빠, 오늘은 이 girl이랑 안 놀아볼래?”
“놀긴 뭘 놀아? 두루비 너, 지난 번에 그러지 않았어? 내 영혼을 파괴시켜 주겠다고.”
“오빠, 은근 기다렸구나? 좋았어. 오늘 영혼파괴 캐슬로 고고!”
그 밤.
빈나리자는 혼자 퇴근하면서 생맥주와 치킨 2인분을 주문했다.
배달원이 다녀가고, 식탁 위에 치맥을 펼쳤을 때, 빈찬영이 그녀의 몸을 빠져나와 맞은 편에 앉았다.
“넌 지금 치맥이 입으로 넘어가니?”
빈찬영이 말했다.
“왜? 너도 오늘 저녁은 치맥이라고 했잖아?”
빈나리자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소장이 루비 년하고 못 어울리도록 막아야지, 어떻게든.”
“어떻게 막아? 둘이 가는데.”
루비는 렌트 해온 자기 차로 카이를 데리고 클럽으로 출발했다. 그녀는 그들을 따라가는 걸 포기하고, 원장과 부원장에게 전화했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카이와 루비가 휴대폰을 꺼놓고 있었다는 걸, 그녀는 알지 못했다.
나리자와 찬영이 생맥주로 건배할 때, 카이와 루비는 클럽에서 양주로 건배하고 있었다.
EDM의 미친 사운드.
어두운 실내를 휘젓는 조명.
사람들은 스테이지에서 춤추고 있었다.
“오빠, 우리 춤추자.”
루비가 잔을 내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 추자.”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카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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