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追利無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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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2.05.1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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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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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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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귀환(死者歸還)-2

DUMMY

청년은 계단을 올라 천천히 의자 위에 앉았다. 의자라기보단 옥좌에 가까운 호화로운 장식은 그곳에 앉은 청년의 권위를 그대로 대변하는 듯 했다.


앳된 외모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차갑게 가라앉은 청년의 눈에선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삶의 의욕을 잃은 듯 무기력한 모습의 청년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년의 왼편에는 장년인이 서있었다. 기골이 장대한 체구의 장년인은 귀밑부터 입까지 길게 이어진 끔찍한 흉터가 있었다. 굳이 기운을 드러내지 않아도 흉흉함이 느껴지는 그의 외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나찰을 연상케 만들었다.


반면에 장년인의 반대편에 선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인은 착 달라 붙은 얇은 재질의 의복을 입어 야릇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여인은 눈가의 잔주름으로 보아 불혹은 족히 넘어보였지만 몸의 굴곡이 여실히 드러나는 옷을 입은 그녀의 탄탄한 몸매에서는 음습한 색기가 뚝뚝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눈에 띄는 범상치 않은 기인들이 주위에 포진했음에도 청년은 이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의 눈에는 오로지 먼 발치에 위치한 짙은 녹색으로 칠해놓은 용두(龍頭)가 장식된 문고리만 보일 뿐이었다.



끼이익-


잠자고 있던 용이 대가리를 비틀자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청년과 그의 수하들이 있는 전각 안으로 한 남자가 얼굴을 보였다. 전각 안에 들어선 회색 빛 턱수염을 기른 문사가 손을 포개어 청년에게 예를 표했다.


"소인 맹덕개(孟德塏)가 공자님을 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소. 따로 들려온 아버님에 대한 소식은 없었소?"


옥좌 위에 앉은 청년은 바로 현 시점 반(反) 무림맹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무리의 수장인 '벽운경'이었다. 그리고 그가 질문을 던진 사람은 이들의 참모를 맡은 맹덕개란 사람이었다.


일찍이 백화장에서 대소사를 맡던 다섯 명의 집사 중 하나였던 맹덕개는 백화장이 패망한 뒤 자신을 알아 줄 새로운 주군을 찾기 위해 수 년간 강호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던 와중 그는 이 년 전 우연하게 망자(亡者)로만 여겨진 벽운경을 찾아냈고 주군으로 옹립하여 백화장의 복수를 꿈꾸게 되었다.


그러나 이른 나이에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가전 무공을 제대로 계승받지 못한 벽운경과 낭인 무사인 맹덕개 혼자만으로 복수는 불가능한 대업이었다. 그리하여 맹덕개는 무림맹의 파멸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지닌 사파의 잔존 세력들을 규합하여 마침내 하나의 세력을 은밀하게 이루었다.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이들이 숨어 지낸 새월에도 사라졌던 벽문천이 백발검귀가 되어 돌아왔단 소식이 전해졌다. 이를 기점으로 이들은 대외적으로 거병을 공표하게 되었다. 그러자 정사대전 이후 뿔뿔히 흩어진 사파의 고수들은 물론 그간 무림맹의 독단적인 행사에 염증을 느낀 군소 세가들이 이들에게 합류하기 시작했다.


지금 '벽운경'의 옆을 지키는 흑사왕(黑蛇王) 한비각(韓榧桷)과 매염선녀(梅艶仙女) 양수음(楊殊吟)도 그러한 자들 중 하나였는데 만일 여기에 백발검귀 같은 극강의 고수가 합류하게 된다면 이들은 두고두고 무림맹의 골칫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부친 벽문천의 행방을 묻는 '벽운경'의 물음에 맹덕개는 그가 얻은 정보에 대해 털어놓았다.


"장주님께서는 공자의 소식을 듣고 빠른 속도로 북상하고 계십니다. 만상군(萬箱郡)에서 얼굴을 알아본 정파의 무인들과 충돌이 있었다하니 석 달 안에는 이곳 새월까지 당도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석 달 가지고 되겠소?"


맹덕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잠자코 듣고 있던 한비각이 대뜸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팔 척 장신의 한비각은 솥뚜껑만한 커다란 주먹으로 제 가슴을 자신만만하게 두드렸다. 그의 가슴에선 둥둥 북소리가 났다.


"백발검귀, 아니지. 내 장담하고 맹주의 부군(父君)을 두 달 안에 여기 내전 안에 뫼셔다드리리다."


'벽운경'은 한비각을 바라보았다. 한비각은 자신감이 지나쳐 자기 과시 경향을 많이 보이긴 했지만 허풍이 심한 자는 아니었다. '벽운경'은 슬쩍 맹덕개의 눈치를 보았다. 맹덕개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거절하라는 뜻인 게 분명했다.


'벽운경'이 어떤 핑계를 대어 한비각의 제안을 거부할 지 고민하는 찰나 문고리의 용두가 다시 한번 몸을 비틀었다.


덜컹-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성큼 '벽운경'에게 다가갔다. 칠 척이 넘는 키에 짙은 눈썹이 위로 솓구친 청년은 포권으로 '벽운경'에게 간단히 인사를 올리고는 곧바로 문 밖에서 들은 한비각의 제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흑사왕 선배를 내보내서는 절대 안됩니다."


새파랗게 어린 후배에게 의견이 묵살당한 꼴이 되자 한비각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높였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맹주의 몫이거늘! 하세길, 네놈이 건방지게 무슨 짓이냐!"


"한 대협, 하 소협이 그렇게 말한 데는 필경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도록 하죠."


맹덕개의 침착한 설득에도 한비각의 분노는 좀처럼 풀리지 않아보였다. 그러나 하세길(何勢佶)은 한비각의 기세에 전혀 위축되지 않은 듯 찬찬히 말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우리가 새월에서 몸을 제대로 일으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우리가 인근 중소 문파들을 규합했다고는 하나 이는 힘으로 일시적으로 누른 것일 뿐 이들 중 진심으로 따르는 이는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하세길의 말마따나 '벽운경' 일행은 새월에서 거병한 뒤 적지 않은 현지 정파 계열의 문파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 새월은 벽지인 만큼 그들에게 크게 위협이 될 만한 고수는 없었으나 무림맹이 본격적으로 인원을 파견하면 또 모를 일이었다.


"흑사왕 선배는 현재 우리의 고수 중 가장 뛰어나신 분입니다. 그러니 흑사왕 선배가 여기 새월에 있어 중심이 되어야 다른 고수들간의 말썽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사파는 정파에 비해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의해 위계가 정해진다. 금수(禽獸)들이 끊임없이 힘을 견주어 서열 다툼을 하듯 사파가 모인 곳에서는 많은 분쟁이 일어난다. 허나 우두머리 늑대가 있으면 아랫 것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듯 절대적 강자인 한비각 앞에서는 모두 잠잠해지는 것이다.


"흠...그러면 어쩌자는 것이냐. 백ㅂ...화장주를 그러면 정파의 영역에 그대로 방치할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니냐?"


자신을 띄워주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풀어진 한비각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세길에 물었다. 그러자 하세길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소수의 인원으로 정파의 관할 지역들을 들쑤셔 그들의 신경을 분산시킨다면 장주님께서 이곳에 찾아 오는 길이 한결 수월해질 것입니다. 동시에 저희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효과도 얻게 되겠지요."


"하하핫! 아직 애송이인 줄로만 알았더니 네놈의 대가리도 제법 굵어진 모양이구나. 지하에 있는 형님이 아주 대견스러워하시겠어."


한비각은 사파 제일 고수라 알려진 자신의 사촌형 적모원왕(赤毛猿王) 한제각(韓除桷)을 떠올리며 그의 직계 제자인 하세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하세길은 겉으로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한비각이 스승을 들먹이자 몹시 불쾌한 감정이 들었다.


'한비각 네놈이 어찌 감히 사부님의 존함을 입으로 꺼내는가. 후안무치한 놈! 내 반드시 네놈의 목을 베어 사부님의 영전에 바치고야 말 것이다.'


한제각의 숨을 거둔 것은 검선과의 대결에서 패해 목이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세길은 정사대전이 끝난 뒤 그들의 대결을 직접 목격한 이에게 그에 관한 비사(祕事)를 듣게 되었다.


한제각은 검선과 맞붙기 이틀 전 대성파의 장로들과 연달아 검을 맞댄 적이 있었는데 이는 한비각이 개인적인 사유로 전장을 비우는 바람에 그를 대신하여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부인 한제각이 비록 사파 제일 고수라지만 검선은 무림 삼선으로 꼽히는 신화적 인물이기에 승패를 장담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하세길은 사부가 한비각때문에 공연히 심력과 기력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검선의 팔 한짝은 길동무로 삼았으리라 확신했다.




"그럼 언제든 이 흑사왕이 필요할 땐 말하시오. 나는 그러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회포를 풀러 가보겠소."


물컹-


한비각은 내전을 미처 나서기도 전 양수음의 어깨에 팔을 올리더니 손을 아래로 꺾어 그녀의 흉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녀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교태를 부리며 한비각의 품을 파고들며 콧소리를 내었다.


"아응. 수 년 만에 뵈었는데도 손버릇은 여전하시군요. 오늘 오랜만에 흑사를 보여주시려나요?"


"흑사(黑蛇)인지 흑룡(黑龍)인지는 네년 하기에 따라 달려있다. 하하핫!"


타인의 시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두 남녀는 그렇게 음어(淫語)를 주고 받으며 전각을 나섰다. 다른 이들 또한 하나 둘 자리를 파했고 어느덧 내전 안에는 '벽운경'과 맹덕개, 그리고 하세길 셋 뿐이었다.


'벽운경'은 여지껏 참아온 긴장이 풀리게 되었는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한하게 힘을 빼었다. 그러나 그때 별안간 강렬한 통증과 함께 '벽운경'의 눈 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뻐걱-


"커억..."


"수하들에게 벌써부터 우습게 보이기 시작했구나. 병신같은 놈..."


'벽운경'의 눈 앞에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손을 부르르 떠는 하세길이 서있었다. 소주인이 부하에게 하극상을 당했음에도 맹덕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냉정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빨갛게 부어오른 볼을 매만지며 '벽운경'이 하세길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누가 네놈의 형님이더냐. 종놈의 새끼가..."


하세길의 눈에 담긴 살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크고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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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사자귀환(死者歸還)-1 22.06.27 130 6 10쪽
69 대연회(大宴會)-3 22.06.22 138 5 10쪽
68 대연회(大宴會)-2 +2 22.06.21 135 7 14쪽
67 대연회(大宴會)-1 +2 22.06.20 141 7 13쪽
66 마선 강림(魔仙 降臨)-4 +2 22.06.18 138 7 10쪽
65 마선 강림(魔仙 降臨)-3 +5 22.06.16 146 7 12쪽
64 마선 강림(魔仙 降臨)-2 +5 22.06.15 144 6 13쪽
63 마선 강림(魔仙 降臨)-1 +2 22.06.14 154 6 9쪽
62 소영웅대회 개막(小英雄大會 開幕)-5 +4 22.06.13 142 7 16쪽
61 소영웅대회 개막(小英雄大會 開幕)-4 +3 22.06.12 142 7 9쪽
60 소영웅대회 개막(小英雄大會 開幕)-3 +1 22.06.11 139 6 10쪽
59 소영웅대회 개막(小英雄大會 開幕)-2 +1 22.06.10 149 6 10쪽
58 소영웅대회 개막(小英雄大會 開幕)-1 +1 22.06.09 155 5 9쪽
57 소영웅집결(小英雄集結)-5 +2 22.06.08 167 5 11쪽
56 소영웅집결(小英雄集結)-4 +2 22.06.07 145 7 9쪽
55 소영웅집결(小英雄集結)-3 +2 22.06.06 149 8 9쪽
54 소영웅집결(小英雄集結)-2 +2 22.06.05 163 6 9쪽
53 소영웅집결(小英雄集結)-1 +3 22.06.04 167 6 13쪽
52 무림맹행(武林盟行) +3 22.06.04 164 6 17쪽
51 탐부순재(貪夫殉財)-7 +2 22.06.03 151 6 13쪽
50 탐부순재(貪夫殉財)-6 +2 22.06.03 153 6 9쪽
49 탐부순재(貪夫殉財)-5 +1 22.06.02 161 5 10쪽
48 탐부순재(貪夫殉財)-4 +2 22.06.02 165 6 11쪽
47 탐부순재(貪夫殉財)-3 +2 22.06.01 153 6 11쪽
46 탐부순재(貪夫殉財)-2 22.06.01 161 5 9쪽
45 탐부순재(貪夫殉財)-1 +4 22.05.31 162 8 11쪽
44 귀서역로( 歸西域路)-5 +2 22.05.31 162 7 12쪽
43 귀서역로( 歸西域路)-4 +2 22.05.30 172 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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