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경계하는 그들
그림자 탐정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무관하며 모두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앞에 한 남자가 엉덩이만 가린 채 엎드려 누워 있었다. 그 남자 옆으로 같은 유니폼을 입은 여자 둘이 손에 오일을 발라 남자의 등과 다리를 마사지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마사지를 받고 있는 남자는 황상두 의원이었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조용했던 방 안으로 노크소리가 들려왔고, 문이 열리며 정장차림의 한 남자가 들어섰다.
“의원님, 다녀왔습니다.”
그 남자가 인사하며 누워 있는 황 의원에게 다가와 섰다. 그제야 눈을 뜬 황 의원은 여자들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래. 내 의중은 잘 전달했고?”
여자들이 방에서 나가자 정장차림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예, 의원님. 나중에 딴 말 나오지 않도록 제대로 경고해 놓고 왔습니다.”
“경고라······. 그놈한테 씨알이나 먹힐까?”
“의원님의 말씀인데 그놈도 알아들었을 겁니다. 조폭 주제에 더는 어쩌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로 넘어갈 놈이었으면 그렇게 나오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내 생각엔 말이야. 어때? 조 실장.”
조 실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황 의원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처리할까요?”
“일단 두고 보자. 이번 모임을 그놈이 준비한다고 하니, 그 자리가 잘 마무리 된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거야.”
“근데 괜찮겠습니까? 정 대표의 사람인데······.”
황 의원은 몸을 옆으로 돌려 조 실장을 올려다봤다.
“그래서? 정 대표가 무서워서 그 딴 자식을 그냥 내버려두자는 거야?”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조 실장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무섭기는요? 정 대표랑 함께 진행하는 일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그 일이 마무리된 뒤에 처리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까? 그게 좋겠지? 근데 그 전에 또 까불면 어쩌지?”
“그때는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황 의원은 흐뭇하게 웃어 보이며 한강이 보이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렇게 하지 뭐. 근데 정 대표가 그놈을 끔찍이 챙긴다는 말이 있던데. 조 실장은 뭐 들은 얘기 없어?”
“저도 듣기로도 다른 부하들보다 더 각별히 아낀다고 들었습니다. 친동생처럼 챙긴다는 말까지 돌았다고 하니까요.”
“정말 친동생 아니야?”
놀란 눈으로 황 의원이 올려다보자 조 실장이 얼른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런 소문이 있다는 거지, 제가 알기로는 정 대표한테 여동생만 하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거야? 그래도 모르잖아. 정말 친동생일지······. 아니면 이복동생일지도.”
소문으로 들어 조 실장도 확신하진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알아볼 수 있는 대로 다 알아봐. 그 전에 그놈은 처리하고.”
“그놈이라면······.”
“입 싼 놈 말이야. 칠구 그놈이 그걸 어떻게 알았겠어?”
바로 눈치 챈 조 실장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엔 잘 좀 해.”
“죄송합니다, 의원님.”
***
대문 앞에 선 박 경위가 초인종을 눌렀다. 얼마 있지 않아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이제 와요? 들어오세요.”
밖으로 유수연이 나오며 인사했고 박 경위는 가볍게 목례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런 부탁을 드려서······.”
“아니에요. 어서들 들어와요.”
수연은 박 경위 뒤에 서 있는 송이와 민철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해보였다. 송이와 민철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수연의 집으로 오기 전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할 장소가 필요해 남궁이한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이한의 그림자가 발작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날의 일이 떠올라 더는 그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박 경위의 집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어 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수연의 집으로 왔던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수연은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수연의 집은 작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그들은 마당을 지나 수연의 집으로 들어섰다.
“송이 씨, 이한 씨는 괜찮은 거예요?”
“네. 그곳에서 나온 뒤로 좋아지셨어요. 다시는 그곳에 가면 안 될 것 같아요.”
송이의 말에 민철이 덧붙였다.
“맞아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송이가 갑자기 정색해서 아저씨를 보는데 어쩌지 못하는 얼굴로 창백해지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처음에는 아저씨가 가만히 울기만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갑자기 발작을 하면서 괴로워하시는데······.”
그림자는 송이의 말을 잘라 말했다.
‘송이야, 그만. 그렇게까지 자세히 얘기할 필요는 없잖아. 괜히 걱정만 더 할 뿐이라고. 그것보다 이곳에 온 이유가 있잖아. 그것부터 얘기해.’
송이는 그림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수연에게 말했다.
“수연 언니, 이한 아저씨가 이곳에 수사를 위한 공간을 마련했으면 하세요.”
때를 기다리고 있던 박 경위는 송이가 말을 꺼내자 나서서 말을 이었다.
“그건 내가 말할게, 송이학생. 수연 씨, 이런 부탁드려 미안해요. 비밀리에 수사 자료들을 모아 놓을 곳이 필요하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모여 수사상황을 함께 논의할 곳도 필요한데 마땅한 곳이 없어서 말이죠. 가능할까요? 어려우면 어렵다고 해도 돼요. 다른 곳을 좀 더 알아보면 되니까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수연은 대답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근데 위험하지 않겠어요? 동식 씨야 경찰이라고 해도 여기 이 친구들은 학생이잖아요. 동식 씨가 상부에 보고하고 정식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데요. 그게 안전할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박 경위는 송이와 이한의 그림자를 번갈아보았다. 송이는 그림자를 내려다보고는 입을 뗐다.
“아직은 경찰이 나서 수사를 진행할 만큼 수집한 정보도 증거도 없다고 하세요. 그것도 있지만 경찰이 우리의 이야기를 믿어줄지도 모르겠다고 하시고요. 그뿐만 아니라 박 형사님이 혼자 모든 걸 감당하셔야 하는 것도 그냥 보고만 계실 수 없다고 하시네요.”
박 경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 친구가 저런다니까요.”
“좋아요. 대신 송이학생이랑 민철학생은 이제 그만 빠지는 게 어때요? 동식 씨가 있으니 괜찮잖아요.”
수연의 말에 송이가 바로 대답했다.
“저는 안 돼요. 저랑 아저씨는 떨어지면 죽을지도 몰라요.”
“아, 그렇죠. 그럼 민철학생이라도 빠지는 게 어때요? 나랑 동식 씨가 있으니 괜찮······.”
민철은 수연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요. 저도 같이 있을래요. 그림자 아저씨가 옆에서 송이를 지켜주라고 하셨거든요. 저희 반 친구의 일이기도 하고요. 저도 돕고 싶어요.”
박 경위는 피식 웃으며 수연을 말렸다.
“그냥 두죠. 송이학생은 이한 때문이라도 어쩔 수 없잖아요. 민철학생은······.”
눈짓으로 송이를 가리키는 박 경위를 보고 수연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저쪽 방을 쓰도록 하세요. 따라 오세요.”
앞서 방에 들어선 수연이 말을 이었다.
“이곳이에요.”
뒤따라 들어선 박 경위가 방을 둘러보고는 물었다.
“여기는 안방 아닌가요?”
“괜찮아요. 저는 저쪽 작은 방을 쓰고 있어서요.”
“그래도······.”
안방을 쓰는 게 미안했는지 박 경위가 멋쩍게 송이와 민철을 바라보자 수연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괜찮다니까요. 안방이지만 안 쓴지 오래 됐어요. 그래도 틈틈이 청소는 했으니 더럽지는 않을 거예요. 저녁들 아직 이죠? 저녁 준비할 테니 일 보세요.”
그렇게 말하고 수연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 주방으로 갔다. 송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박 경위에게 물었다.
“정말 여길 써도 되는 거예요?”
“아줌마가 쓰라고 했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민철의 말에 송이가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물었다.
“그래도 우리가 작은 방을 쓰는 게 맞지 않을까요?”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듯 박 경위가 말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사정이요?”
사정이라는 말에 놀란 송이에게 그림자가 말을 걸었다.
‘송이야, 수연 씨가 이혼을 했다고 했잖아. 딸도 있다고 했고. 아마도 딸 방에서 생활하는 것 같아. 여기가 신혼집이었던 것 같다.’
‘신혼집이요? 아, 그렇구나. 그래서 안방을 안 쓰고······.’
한참을 물끄러미 그림자만 내려다보고 있는 송이에게 민철이 조용히 물었다.
“그림자 아저씨가 뭐라고 그래? 아저씨는 뭔지 알고 있는 거지?”
“너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네 표정 보고 바로 알았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아저씨를 보고 있어서 말이야.”
“그래? 그렇구나. 맞아. 여기 이 집이 수연언니 신혼집이었나 봐. 그래서 안방을 안 쓰고 저쪽 작은 방을 쓰고 있는 것 같다고 아저씨가 그러셨어. 아마도 저 작은 방은 딸이 지내던 방이었을 것 같다고.”
“딸? 딸도 있으셔?”
“응. 이혼하고 전 남편이 딸을 키우고 있다고 하셨어.”
“그랬구나. 아줌마한테 그런 굴곡진 사연이 있었는지 몰랐네.”
송이는 민철의 팔을 툭 치며 눈치를 줬다.
“뭐야? 뭐가 굴곡진 사연이야? 그거 너무 신파 아니니? 요새 이혼이 무슨 큰 대수라고. 흔히 하는 거잖아, 안 그래?”
“그런가? 그래도······. 아이, 됐다. 아무튼 아줌마가 그림자 아저씨를 진짜 좋아하시나봐. 안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흔쾌히 방을 내어줄 수 있겠어. 그렇지?”
“그건 그런 거 같아.”
방을 둘러보고 있던 박 경위는 송이와 민철이 붙어서 속닥거리는 것을 보고 다가와 물었다.
“뭐가 그렇게 둘이 재밌어? 나도 좀 알자?”
송이가 서둘러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뭐가 아니야? 매번 나만 빼고······. 이거 서운하려고 그러네. 이한이 뭐라고 한 거야? 왜 이번에도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형사님.”
“이거 봐. 이한한테는 아저씨라고 하면서 나한테는 꼬박꼬박 형사님이라고 부르고. 섭섭하네. 이제 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아닌가봐?”
“그런 게 아닌데······.”
박 경위가 아직 미덥지 않다는 그림자의 말이 떠올라 송이는 괜히 혼자 뜨끔해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에 민철이 나서서 그림자가 말한 수연의 사정을 박 경위에게 말해주었다.
“그래? 그랬구나. 숨길 일도 아닌데 송이학생은 왜 그런 거야?”
“제가 뭘요?”
“아니······. 그래, 아니야. 근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한이 뭐라고 안 해?”
자신도 멋쩍었는지 송이는 얼른 그림자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그림자는 어느새 송이 옆에서 떨어져 나와 탁자 옆에 서서 탁자를 밀고 있었다. 계속 힘주어 밀어보지만 그림자의 손은 여지없이 탁자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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