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괴도 세인트
필레오 남작은 자신의 성에 숙소를 마련해두었으니 함께 가자며 일행들을 잡아끌었고 바네사는 칼같이 거절했다.
열 번 쳐서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할 듯 필레오 남작은 거듭해서 요청했고 그때마다 바네사는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를 알려줬다.
수십여 차례 의미 없는 공방이 오고 간 후에야 필레오 남작은 일행들을 놓아주었다. 그제서야 자유의 몸이 된 우리는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저 때문에 여러모로 번거로우셨죠? 죄송해요 모두들"
“무슨 말씀이세요? 언니야말로 고생하셨어요. 저 같으면 못 참았을 거예요.”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이 마을 안에 생각보다 많은 주점과 여관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대륙에서 일거리를 찾아 몰려든 용병들을 위한 것이었다. 아직 낮인데도 주점마다 무장한 용병들이 그득했다.
“제국의 충실한 사냥개가 되는 되는 것,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에 세워진 이 마을이 살아가는 방식이죠.”
운사는 이 마을의 주된 수익이 제국에서 수배한 현상범을 잡아들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마을 한편에 여기저기서 끌려온 사람들을 가둬둔 수용소가 보였다.
“아까 마주쳤던 그 여우 족 언니들도 저기 갇혀 있는 걸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
“그럼 저 언니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노예 경매장으로 끌려간다던가···”
“그렇게라도 된다면 목숨이라도 보존하겠지만 여우 족이라면 연금술점으로 팔려갈 거야”
“그럼 결국 죽게 된다는 뜻이잖아요옹 너무 해요오오옹"
마정석을 채취하기 위해 살아있는 수인을 죽이는 건 엄연히 불법이었지만 대륙 이곳저곳에서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었다.
특히 포르자 성 마을에서는 성물을 무단으로 채취하여 판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불법을 함부로 행할 수 있는 건 제국이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국은 이 지역의 성물을 독점하고 트리아드 연맹을 병합하기 위해 스톤홀드 요새와 포르자 성 마을을 적극 지원하고 있었다.
“스승님 그 언니들이 죽게 놔둘 수는 없어요 소녀가 언니들을 구할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꼬마 아가씨 마음은 잘 알겠는데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운사의 말대로다.
당장 저 수용소를 습격해서 여기 잡혀있는 사람들을 구해준다고 해도 이 성의 주인인 필레오 포르자 남작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다면, 그를 지원하는 제국의 방침이 바꾸지 않고서는 같은 일은 반복해서 일어날 것이다.
더군다나 패스파인더 위원으로 연합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세상이 이런 곳인지 몰랐어요오옹 너무 가혹해요오옹"
같은 수인인 셀비 입장에서 그녀들에게 일어날 일들이 남일 같지는 않겠지.
뭐라도 해주길 바라는 그녀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여관에 도착해서 짐을 푼 나는 의기소침해진 일행들을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용사니이이임 어디로 가시는 거세요오옹?”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요.”
상점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아바타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는 곳입니다.
아바타를 구매하시겠습니까? ]
카인드핸즈 마스터가 아닌 또 다른 신분이 필요하다. 목록을 살펴보던 나는 적당한 아바타를 하나 발견했다.
[ – 괴도 X의 잠입복 세트 –
장작 부위
머리 / 얼굴 / 상의 / 하의 / 장갑 / 신발 / 벨트
세트 효과
민첩 + 30
잠입 lv.3
]
“한가롭게 옷이나 사러 나오셨을 줄은 몰랐네요.”
깜짝 놀라 돌아보니 바네사가 서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따라온 거지? 아무런 기척도 못 느꼈는데···
“핫하 가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요”
바네사의 눈이 반짝였다. 아무래도 나의 계획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혹시 추천해 주실만 한 옷이 있을까요?”
“그럼요 여기 괜찮은 게 있네요.”
[ – 괴도 세인트의 드레스 세트–
장작 부위
머리 / 얼굴 / 상의 / 하의 / 장갑 / 신발 / 벨트
세트 효과
민첩 + 30
잠입 lv.3
]
“제 선물입니다. 보답은 이 옷을 입고 함께 산보하는 걸로 받도록 하죠.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따라 나서 신 것 같지만”
[ 바네사의 호감도가 1 (기본 1 + VIP 보너스 0) 상승했습니다. ]
“그럼 사양하지 않고.”
아바타로 갈아입은 바네사가 거울을 보고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깜쪽 같아요오오옹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요옹"
셀비의 칭찬에 동의한다.
얼굴은 물론 체형까지 달라졌다. 서로의 모습은 물론 스스로의 모습에 익숙해지는데도 다소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자 그럼 성능을 확인하러 가보실까요?”
운사의 말대로 제도와 권력 구조 등 근본적인 것을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수인 사냥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수용소에 갇혀있는 여우 족 여성을 구하는 게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지금 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저 여인들은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는 그녀들을 구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해결하는 것 그것이 류하민의 방식이자 하민 루드릭의 걸어왔던 길이다.
변장을 마치고 수용소 앞으로 향하자 그제서야 내 의도를 알아차린 셀비가 여우 족이 있는 곳을 알렸다.
“용사니이이임 저쪽에서 여우 족 냄새가 나요오오옹”
셀비가 앞발로 가리킨 곳에 입구를 지키고 있는 세네명의 자경대 병사가 보였다.
“뭐 하는 놈들이냐?!”
어디로 들어가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바네사가 무작정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 녀석들의 대사는 거기까지였다.
퍼퍼퍽!-
정체를 감추기 위해 무기도 두고 온 상태, 맨손으로 병사 한 명을 제압하더니 그놈의 무기를 빼앗아 나머지 둘을 해치웠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에반데일 방패의 주인다운 솜씨였다.
“뭐해요? 어서 들어가요"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바네사가 입구 쪽으로 나를 불렀다.
“서로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요? 멋진 이름이면 좋겠는데"
이 여자 뭔가 잔뜩 신이난 것 같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매사에 신중하던 그녀가 변장과 더불어 성격도 조금 바뀐 느낌이다.
“괴도 X라고 불러주세요 저는 괴도 세인트라고 부를 테니.”
“괴도 세인트 마음에 드네요.”
[ 바네사의 호감도가 2 (기본 2 + VIP 보너스 0) 상승했습니다. ]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호감도가 무려 두 배씩이나 오르다니
발걸음도 가볍게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자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이 녀석들은 뭐냐? 밖에서 경비 보던 놈들은 다 어디 갔어?”
그들 중 몇몇은 낯이 익었다. 낮에 여우 족 여인들을 잡아간 놈들이었다.
순간 바네사가 살짝 움츠러드는 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놈들이 자신을 알아보지는 않을까 걱정한 탓일 테지
“못 보던 놈들인데 여긴 무슨 일이실까? 판돈이 탐 나서 들어온 잡범들은 아닐 테고"
다행히 놈들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다.
자신감을 되찾은 바네사가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녀석들에게 돌진했다.
탱커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들어간 바네사가 호쾌한 발차기로 한 놈의 턱을 날려버렸다.
“커억!”
여우 족 여인에 올가미를 채워 무자비하게 잡아당기던 놈이었다. 그 여인들의 앙갚음을 하기라도 하듯 바네사가 연속해서 놈을 두들겼다.
퍼퍽!-
재수 밤 맛이었던 놈이 피떡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 남은 적은 셋
“뭐해? 어서 저놈들 잡아!”
바네사를 돕기 위해 나서려고 했지만 내 도움은 필요 없었다.
돌려차기로 자신에게 다가오던 병사 한 명을 쓰러트린 그녀는 침착하게 적의 검을 피한 후 상대의 등 뒤로 돌아가 후두부를 타격해 기절시켰다.
“히익 뭐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어? 도대체 넌 누구냐?”
누구긴 누구겠어? 오늘 낮에 네놈이 모시고 싶어 했던 그 바네사님이시지
호쾌한 그녀의 발차기가 이어지고 방금 전까지 카드놀이를 하고 있던 놈들이 모두 사이좋게 바닥에 누웠다.
“자 그럼 다음 장소로”
“가.. 같이 가요 세인트!”
바네사와 함께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굳게 닫혀 있는 철문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열쇠를 찾기 위해 아까 쓰러트렸던 경비병들 쪽으로 돌아가려는데
콰쾅!-
바네사가 닫쳐 있던 철문을 날러벼렸다.
거..걸 크러쉬
걸레짝이 되어버린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잡혀온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설치된 감옥들이 보였다.
파격적인 등장에 갇혀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 쪽으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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