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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좋아
작품등록일 :
2022.05.11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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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7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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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리(10)

DUMMY

서로가 서로를 해할 수도, 제압할 수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서로가 보였고 땅이 꺼져도 허공에 날아오르면 그만, 벼락을 내리치는 초목들의 채찍질은 닿지 않고 열풍은 식어버렸다. 그때. 풍파파가 약손의 내력을 읊었다.


“내 앞에 있는 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아들이며 아미타불의 방술로써 천신들과 대적하고 있고 보현보살의 방술로써 시간 위에 서 있다. 그는 두 보살의 아들임과 동시에 용의 형이며 아수라의 제자인데 자신 역시 사람이 아니고 무주이다. 가지고 있는 업보의 양은 칠억 오천만에 이른다. 이것이 내력. 다른 천신들 중 인간사가 궁금한 신이 있다면 나중에 직접 저 아이를 읽어들 보시게, 일단 나는 오흠에게 물어볼 게 있군.”


풍파파가 사슴뿔을 머리에 달고 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은 눈을 거의 감다시피 했는데 약손의 내력을 듣자 눈물을 흘렸다. 노인의 눈물을 본 풍파파가 노인에게 물었다.


“내가 내력을 읽어내는 동안 인간사를 읽었는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풍파파는 다른 천신들에게 부탁하길 자리를 비켜달라 하였다. 그러자 다른 천신들이 모두 풍파파와 노인의 뒤로 와 무기를 거두고 추운동자가 깔아놓은 구름 위에 앉아 지켜보았다. 노인은 약손에게 천천히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


“서해백룡(西海白龍) 소청윤왕(素淸潤王) 오흠(敖欽), 형님께 인사 올립니다.”


오흠, 그게 노인의 이름이었다. 오흠의 인사에 약손은 매섭게 내뿜던 투기도 유지하지 못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노인이 어째서 자신을 형님이라 부르는가. 약손의 동생은 오직 약지밖에 없었다. 약손이 무언가를 물어보려 했지만, 그전에 오흠이 말했다.


“신들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으니 불로불사(不老不死)한 존재, 하고자 한다면 언제 신이 되었는지와 상관없이 신으로서는 이 세상의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약손이 무언가를 물어보려 했지만, 그전에 오흠이 말했다.


“당연히 형님께서 기억하시는 그 어린아이가 웬만한 진인들과 고승들도 얻기 힘든 깨달음을 얻었을 리가 없지요. 저는 본시 그 마을에서 죽은 적이 없습니다. 은소라는 그 여인과 만난 적도 없고요. 유모님을 만나긴 하였으나 유모님을 통해 무당의 제자가 되었지, 양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형님은 수십 년 동안 제삿날에 나타나지 않으셨고, 저는 형님이 살문의 수장이 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형님의 죄닦음을 위해 무당산을 벗어나 수행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수행길에서 깨달음을 얻고 승천하였지요.”


“...그게 도대체 무슨!”


“지금 제 앞에 계신 형님의 과거와는 다르지요. 하지만 그건 명백한 제 과거입니다. 과거가 바뀌었음에도 제가 살아있는 건 제가 시간을 초월한 천신, 서해 용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그럼 정말로 네가 약지란 말이냐...? 내가 과거에는 너를 그리 버려두었단 말이냐?”


약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여우와 싸우면서 뒤집어썼던 백룡의 피가 눈물과 섞여 피눈물이 되어 떨어진다. 약손이 약지의 손과 얼굴을 매만져본다. 너무나 늙었음에 시름하자 약지가 자신은 천신이 되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한 번 신이 되면 어떤 경우로 죽어도 혼이 천신인 자신에게로 회귀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게 다른 부처, 보살, 신들이 화신으로 이 땅에서 다시 나고 죽어도 멀쩡한 이유였다. 다만 쓸데없는 미련은 더해지지 않아야 하므로 혼이 합해져도 기억은 합해지지 않았다. 약지가 말했다.


“과거가 달라진 것이니 형님께서는 그러신 적이 없으십니다. 있지도 않았던 일로 앓으실 필요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과거가 바뀌었다는 것이냐?”


“신이나 부처, 보살들과 같은 초월자, 그런 초월자들의 화신, 혹은 초월이 불가하게 된 지식인들이라면 가능하지요. 제가 형님을 읽어보니 그런 초월자들이 마을에 들름으로써 제가 무당의 제자가 되는 미래가 바뀌었고, 형님은 초월이 불가하게 된 지식인을 만나심으로써 제삿날 마을에 들르지도 않는 미래가 바뀌었습니다.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약지가 몸을 돌려 천신들과 함께 떠나려 했다. 추운동자의 구름이 떨어져 나와 약지를 태우기 위해 넓게 펴졌다. 약손은 그런 약지의 손을 붙잡았지만, 지금 당장 떠나지 말라 할 명분이 없었다. 그저...


“미안하다... 나 따위가 형이라... 너에게 의지하는 못난 형이라... 너의 생에서는 너를 버리고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형이라...”


약손의 말에 약지는 미소 지으며 모습을 바꾸었다. 쭈글쭈글한 늙은이에서 탱탱한 어린아이로, 약손이 알고 있는 동생, 약지의 모습으로. 그렇게 모습을 바꾸어 살아생전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로 답했다. 구름을 따라 멀어지는 그 미소에 약손은 주먹으로 땅을 치며 꺼이꺼이 울었다.



“나중에 천신이 될 가능성이 보이는 생인데 형제 관계를 끝까지 감추지 그랬나. 자네의 정체를 알고 깨달음을 얻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감정을 드러내게 해 주변 인물들까지 읽어내야 했습니다. 일의 시급함을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건 그렇지.”


정체를 밝힌 오흠을 풍파파가 나무랐다. 원래라면 약손처럼 업보를 짊어지고 태어나 그걸 청산할만한 인격을 갖춘 생은 매우 드물기에 멀리서 관망하며 돕는 게 보통이었다. 이러한 이는 천신들의 가호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 가호는커녕 깨달음에 방해만 될 사실을 밝혀 마음을 뒤흔든 뒤에 정보만 빼내었다. 뇌모가 말했다.


“서해 용왕의 인간 시절 과거를 뒤흔든 두 남녀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천신도 그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화신도 아닌 몸으로 그런 간섭이... 손이랑께서는 무얼 보셨습니까?”


“저는 저 약손이라는 자의 스승을 살폈사온데 원래라면 북송 때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자를 읽어보려 했으나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럼 적어도 수백 년은 지나버린 게 아닙니까? 그런데 천신이나 부처가 한 짓이 아니고 화신도 관여한 적이 없는 데다 여태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읽으려는데 읽히지 않았다니...”


“한 가지 경우가 있지요.”


“무엇입니까?”


“미래의 우리가 과거의 우리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긴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아미타불께 여쭤봐야겠군요.”


신들이 구름을 타고 다시 천계로 올라가는데 홀로 떨어진 외로운 구름 하나. 서해 용왕 오흠이 약손 몰래 자신의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손은 바닥에 엎드려 우느라 주변을 살피지도 못했다. 형이 끝내 돌아오지 않은 것을 실망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체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달라진 형의 모습을 보니 눈을 떼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른 천신들이 먼저 올라간 탓에 시간은 다시 흐르고 해는 떠올랐지만, 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완전히 날이 밝아서야 오흠도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를 떴다.


‘천신이 되면 속세와의 연이 끊어질 수밖에 없지만, 내가 깨달음을 얻기 전, 속세와의 연을 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못난 형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형이 미워서 끊었고 형이 원망스러워 끊었었는데 저런 모습의 생을 보니 묘하구나. 어찌 이 세상은 요지경인지. 새삼 별다른 감정이 드는 것도 이상하다만, 이 세상의 괴이함에 놀라게 되는구나. 그저 그뿐이다.’


오흠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 약손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일어났다. 객잔에서 잠자던 속가제자들이 자신을 찾자 약손은 한달음에 달려가 진숙의 뒤에서 어깨를 툭하고 쳤다. 그러니 진숙이 화들짝 놀라 자빠졌다. 약손은 두 눈이 붉게 부어 있는 데다 양쪽 볼에 눈물이 마른 자국이 있어 누가 봐도 운 사람이었지만, 약손이 태연하게 평소처럼 행동하니 말하기 싫은가보다 하고 모른척했다. 그들이 아침부터 다급하게 약손을 찾은 건 객잔까지 날아든 전서구 한 마리 때문이었다. 진숙이 말했다.


“조씨 부인 그 여자가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는군. 어이가 없지 않은가? 자기가 멋대로 불러놓고 이런 취급이라니!”


진숙의 말에 약손이 잊고 있던 여우의 존재를 깨달은 건 나뭇잎 한 장이 가지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어떻게 그놈을 잊었을까. 어디서 솟았는지 약손의 품에 물뱀 한 마리가 안겨 있고 바람은 이 근방을 모두 훑어본 뒤에 그 냄새를 물뱀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물뱀은 혀를 낼름거리더니 북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은 갑작스러운 물뱀의 등장에 놀랐지만, 물뱀이 완벽하게 약손의 통제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는 호들갑을 떨기보다 점잖을 떨었다.


“북쪽으로 갔나, 놓쳤군...”


“음... 이보게 자네 괜찮은가?”


“아, 괜찮네. 어제 마을까지 내려온 짐승 한 마리를 보았는데 그걸 놓쳐서 그런 걸세.”


“술법쪽은 잘 모르지만, 자네의 것은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그럼에도 놓쳤다니 어지간히 영민한 놈인가 보군.”


“...교활하지.”


“그것보다 이제 우리는 모인 목적도 사라졌으니 해산할 참인데 자네 시간만 괜찮으면 어제 찾아온 사람과 이야기 좀 나누어 보지 않겠나?”


진숙의 말에 약손이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에는 관휘가 있었다. 관휘는 밤새 경공으로 달려왔는지 탈진한 몸으로 냉수를 마신 뒤 객잔 탁자에 엎어져 잠들어 있었다. 진숙과 다른 속가제자들은 관휘가 약손을 찾아왔으니 자기들은 이만 가보겠다며 다들 경공으로 속히 사라졌다.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어린아이가 그렇게 도망가도 잡기 힘들 텐데 약손은 그들을 모두 잡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순간 그들은 자신의 뒷덜미가 약손의 손에 잡혀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자네 경공도 할 줄 알았나?”

“못하는 줄 알고 어제 내내 걸어온 것인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다들 어릴 때부터 세상을 떠돌며 무공을 익히길 십수 년이었다. 약손 다음으로 젊은 사람이 바로 스물여섯이었으니 세속의 때가 묻고 묻어 귀찮아질 성싶은 일에 빠지는 건 초절정의 경지라. 도련님처럼 곱상한 차림과 말투로 신의 있어 보였던 진숙도 친해질수록 매사 능글맞아지는 게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세속의 때라면 약손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약손은 방금까지만 해도 눈물 자국에서 비롯된 슬픔과 진지함이 있었으나 이젠 어처구니가 없어 화를 내며 웃었다.


“자자, 내가 지금 잘못 생각한 것인가? 허허허, 아무리 하루 지난 우정이라지만, 설마 멀쩡히 있던 사람, 본인들이 데려와 놓고 일 취소되면서 귀찮은 일 생길 것 같으니까 두고 도망치려는 그런 간악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때 용서문이 손을 들었다. 용서문은 머리가 삼각에 가깝고 뒤통수가 없다시피 한 희안한 사내였다. 속가제자 동무 4인을 사로잡고 있는 약손이 산멧돼지라면 용서문은 독을 가진 뱀이었다. 그래서 산멧돼지는 뱀이 아가리를 벌리기도 전에 짓밟아야 하는 것이다. 약손이 먼저 말했다.


“가문이나 가정의 일로 먼저 가봐야 했다는 말 마십시오. 누구는 가정 없고 자식 없답니까?”


그 말에 용서문이 손을 내렸지만, 약손 스스로가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은 가정도 없고 자식도 없었다. 그래도 대외적으로는 눈먼 형이 나부부록파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로 되어 있으니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조금 거슬리는 한편 떳떳하기도 했다. 잠시 후에 용서문의 팔이 다시 올라오자 약손이 또 외쳤다.


“설마 이번 일에 연장자라는 걸 무기로 들이밀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나이가 얼마든 자식 앞에서는 똑같은 아버지! 가정을 생각하는 가장의 마음을 어찌 나이로 셀 수 있겠소!”


용서문의 팔이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결국 네 명이 쪼르르 모여 객잔 앞에서 용서를 비니 그것도 나름의 볼거리 인지라 이른 새벽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때 관휘가 약손의 목소리를 듣고는 정신을 차려 벌떡 일어났다. 만약 공적인 일이라면 여기 있는 네 명과 약손 모두가 같이 가야 할 일이었다. 관휘가 말했다.


“부탁이네 약손공!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시게!”


결판은 났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네 명이 먼지를 털고 일어나 차례대로 약손의 어깨를 두드리고 지나간다. 모두 한마디씩 해주는데 그 말들이 빌어먹게도 모두 약손에게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도손, 용서문, 궤, 진숙이 차례대로 말했다.


“서둘러 해결하고 자식들 보러 가게.”

“슬하에 자녀를 둔 적이 없습니다.”


“이곳에 온 지 오래인데 안사람은 봐야 하지 않겠는가.”

“혼인 안 했습니다.”


“와! 우린 집 간다!”

“......”


“나중에 술 한 잔 사겠네...”

“술 못 마십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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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인간사(33) 23.12.26 10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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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인간사(31) 23.12.06 10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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