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망해도 외톨이는 아웃사이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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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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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1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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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2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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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8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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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DUMMY

이그렌시아는 나를 요람의 지하로 안내했다.


이끼가 낀 나선형 계단을 걸어 아래로 내려가자 나오는 오래된 나무 문.


"이 문을 열고 나가시면 돼요."


나는 망설임 없이 문 앞에 섰다.


문손잡이를 쥔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주세요."


뒤를 돌아보자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은 이그렌시아는 나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저녁 만찬에는 꼭 돌아오세요.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할 거라구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지."


끼이익.


쏟아지는 빛무리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시야를 가리는 빛무리를 넘어 도착한 곳은 중앙산 정상.


눈을 뜨자마자 나는 흑색 파편 몽둥이를 앞으로, 분신을 소환해 등 뒤로 붙인다.


느껴진 인기척 때문이다.


피잉!


등 뒤에서 날아온 화살. 분신과 나 모두 상체를 옆으로 기울여 피한다.


다짜고짜 공격이라. 뒈지려고.


들려오는 고함과 무기를 출수하는 소리.


"누구냐!"


시끄러운 소음 사이에서 나는 기울였던 몸을 꼿꼿이 세우며 콧대 위 가면을 매만진다.


분신과 본체의 두 눈으로 보이는 앞뒤의 시야로 나를 포위한, 정확히는 내가 나타난 위치를 선점하고 있던 생존자들이 포착된다.


대규모 집단 중 한 곳으로 보인다. 기억하고 있는 요주 인물은 보이지 않아 어느 집단인 줄은 모르겠다. 중안산 근처이니 상인 연합 아니면 야차가 규합한 부랑자 무리 중 하나겠지. 하긴. 내가 다른 집단의 정보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던 것도 벌써 몇 주 전이다. 그 사이 집단들도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을 테니 전부 알아보는 건 무리지.


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핀다.


나를 겨누는 무기에 마법은 없다. 다행히 마법사는 근처에 없는 듯하다.


"너! 누구냐고! 갑자기 나타나서는?! 마법사냐!"


당황한 듯 악쓰듯 소리 지르는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마력의 흐름 속에서 나타났으니 마법사로 오해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만.


내가 누군지 중요한가.


일대의 생존자는 서른여섯.


지나치게 날 선 반응, 피로한 듯 떨리는 팔과 긴장감으로 점철된 신체, 전투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있는 무구. 역시나 내가 계획한 혼란은 계획대로 저들을 휘감은 듯하다.


"으윽..."


내가 아무런 말도, 아무런 반응도 없자 상대 쪽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택한다.


"X발 쏴버려!"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여자의 명령에 온갖 공격이 날아온다.


화살이나 마력이 담긴 공격, 속박이나 정신혼란, 파괴, 폭발같이 이능의 효과 등등. 명백히 살의가 담긴 공격이다.


나는 곧바로 예열하던 마력을 펼친다.


「어둑한 상상」으로 마력을 변질, 「무장 - 눈물점」


새하얀 가면을 타고 시커먼 마력이 번진다.


가면이 흑색으로 오염되며 가면에서 유일하게 까맣던 눈물점이 하얗게 덧칠된다.


동시에 퍼지는 파장. 소멸하는 모든 소리.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


"───!!!"


클래식처럼 단아하게 퍼지는 그 흐느낌에 서른여섯의 움직임이 굳은 순간, 나는 움직인다.


퍼─억!


「이중 사고」로 느려진 시간 속, 도리어 빨라진 사고 속에서 나의 유일한 무기라 할 수 있는 흑색 파편 몽둥이가 대장 여성의 무릎 뒤 관절을 파열시킨다.


"아──?!"


소리가 소멸되기 직전, 마지막 소음이건만 곧 1초에 340m를 가는 음파가 늘여지다 못해 소멸한다.


피가 튀긴다. 뼈가 부서지고 비명이 되다못한 숨이 그들의 마지막을 표현하듯 허무하게 사라진다. 그 모습은 아름답지 못하다.


다만 기계적으로─ 몽둥이는 곧바로 다음 위치에 가 있다.


이번엔 쇄골이다.


늑골이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골반이다.


비명이 터진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다.


그 소리 없는 울림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된다.


느리게 흘러가는 붉은 축제 속 퍼져나온 공포를 음미한다. 저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 주체는 나이다.


눈물점으로 할퀴어진 정신력에 터져 나오는 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무력감 속에서 저들은 무너져간다.


아직 스무 명이나 멀쩡히 서 있다. 멀쩡하진 않다. 귀를 부여잡거나, 눈을 가리거나, 주저앉거나. 혹은 나를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거나.


그래. 고작 공포 따위에 잠식당하지 않는 인물도 분명 이 자리에 있었다.


대장 여자는 한쪽 하반신이 박살 났음에도 나를 노려보며 이능 휘두른다.


푸른 기운에 휩싸인 검이 내 미간을 노리고 떨어진다.


피한다. 아니, 피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맞지 않는 것이다. 여자는 내가 자신보다 빠른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발생한 움직임의 어긋남이다.


휘두름이 허공을 가르기 전, 나의 워커가 여자의 쇄골을 짓밟는다. 뼈가 으스러지는 감각이 발을 타고 오른다.


떨어지던 검은 갑작스러운 운동에너지의 변화에 힘을 잃고 튕겨진다.


이어 남은 다리를 휘둘러 그녀의 늑골에 처박는다. 직후 휘둘러지는 흑색 파편.


그러나 몽둥이가 여자의 옆구리를 부수기 직전, 궤도를 틀어 나에게 향하는 메이스를 깨부순다.


걱정은 없다. 저 여자는 이미 전투 속행이 불가하다.


옆구리에 대신 뒷꿈치를 박아 날려버리고는 다른 놈들을 상대한다.


1분은 흘렀을까.


「무장 - 눈물점」의 효과는 끝나기도 전, 중앙산 정상에 서 있는 이는 나 혼자였다.


예기치 못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등 뒤를 지키던 분신을 역소환 한다.


신음만이 가득한 중앙산 정상에서 나는 곧바로 하산한다.


남쪽부터 향한다.


만찬 시작 전까지 한나절 조금 더 남은 시점.


다른 세 곳을 모두 클리어 하지 못해도 좋다. 오늘 하루 단기 목표는 남쪽과 북쪽 두 곳 시련의 클리어. 만찬 후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 서쪽까지 클리어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이렇게 무리한 일정이 가능한 이유는 오직 딱 하나, 나는 이그렌시아로부터 다른 시련의 완수 조건을 들었다.


북쪽 숲의 나무정령을 깨워 그가 요구하는 열매를 알아낸 뒤 곧바로 남쪽으로 향해 열매 채집, 직후 남쪽 에메랄드 숲의 미로를 통과한다.


이후 다시 북쪽 숲으로 돌아가 열매를 주고 통로를 연다.


각 시련 사이 거리가 상당하니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나는 중앙산 정상 북쪽,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간다. 나무를 타고 달린다. 지금까지는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생존자 무리나 거점을 피해 다녔지만, 이젠 아니다.


직선으로. 오직 직진이다.









숲이 불타오른다. 유기물 연소되는 냄새가 뿌연 연기를 타고 하늘을 오른다.


불은 번지지 않는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마치 예술 작품처럼 고정되어 현상을 이끌어낸 술자의 의도를 이루어낸다.


노란 머리의 소년이 활활 타는 장작 위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다 자신의 머리 위를 쳐다보며 묻는다.


"Xuck! 정말 다 태우면 안 돼?"


"우리가 숲에 있는데 숲을 다 태워버리면 우리도 다 죽잖아. X신아. 누가 미친놈 아니랄까 봐. 그리고 태워봐. 고작 니 불꽃으론 숲의 마력을 잔뜩 머금은 나무를 죄다 태울 수도 없다고."


"끄응. 그건 그래. Xhit."


이 숲은 마력으로 충만하다. 때문에 나무나 바위 같은 무생물조차 마력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그럼 쟤들이나 더 태워야지. 하하!"


호탕하다기보다는 광기에 가까운 웃음을 터트린 소년의 시선 끝엔 까맣게 타버려 무생물이 되어버린 생물이었던 것들이 있다.


그러나 여인은 쓸데없이 마력이나 낭비하는 소년이 아니꼽다.


나무 위에 서 있던 여인은 혀를 차고는 아래로 떨어지며 소년의 머리에 꿀밤을 쥐어박는다.


"아우치! 왜 때려?!"


"시끄러 토마스! 시간 끌다가 늦으면 너가 책임질 거야? 뭐 때문에 부랑자들을 중앙산으로 쑤셔넣었는데 앙?"


난폭하게 으르렁거린 적야차 우소현은 토마스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었다.


"한시라도 빨리 거목의 시련을 클리어해야 한다고."


남서쪽 폭포에 숨겨진 도우미에게 코인을 지불하고 얻어낸 정보였다.


-숲의 시련을 완수하면 그곳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명심해라 한번 열린 길은 다시는 열리지 않으니.-


매우 중요한 기회였으며 대장은 기회를 낭비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계획을 세웠다.


숲의 생존자를 몰살시킬 계획을.


그에 대한 일환으로 그들의 대장은 모든 시련의 동시 클리어를 요구했고, 모든 야차의 일원은 그의 계획에 동의했고 적극 동참했다.


동참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 의도치는 않았으나 그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상황이 더욱더 정력적으로 움직일 동기가 되었다.


어떤 상황이냐고?


어제 자정, 식량의 소멸과 괴물, 야수의 준동으로 숲 전체에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했다. 이는 정상적인 생존자 집단뿐만 아니라 부랑자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부랑자는 백이면 구십구 집단에서 버려진 자들이다. 이유는 다양하다. '약해서, 도움이 되지 않아서, 식량이 부족해서'라는 이유부터 살인, 절도, 횡령 등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 전자의 경우는 보통 집단의 힘이 부족하기에 일어나나, 버려진 자들은 버린 이들의 결단을 이해하지 못하고,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후자는 부랑자란 인간의 평균 인성을 표현하지.


인정 못할 이유로 집단에게 버림받은 인간, 혹은 이기적인 판단으로 사회공동체에서 버려진 이들이 부랑자다.


그렇다면 묻겠다.


부랑자란 이들에게 급작스럽고 불합리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강제성을 일으킨 관리자를 원망할까? 자신들을 이끄는 야차를?


따지자면 전부였다.


어제 자정에 발생한 사건 때문에 그들이 규합한 부랑자들에게도 혼란이 찾아왔다.


이기적이고 개개인이 강하지 못하고 쉽게 흩어지는 부랑자의 특성 때문에 거점을 덮친 야수의 행렬에 여타 생존자보다 더한 피해를 보았다.


부랑자들은 분노했고, 겁을 집어먹었기에 관리자를 규탄하고 상황에 한탄하며 그들을 이끄는 야차에 원망을 표출하는데 이르렀다.


당연한 수순이다만, 우소현은 생각했다.


어쩌라고.


굳이 정정해 줄 필요 없는 착각이다.


야차는 저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다. 나약하고 불안정한 머저리들을 모아 대장노릇 하는 취미는 적야차인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야차에게도 없었다.


저들은 그저 감언이설에 휩쓸린 고기방패니까. 겁먹은 부랑자들의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역시 감언이설이었다.


야차의 대장은 비장하게 말했다.


'중앙산으로 가라! 먼저 파견된 흑야차가 너희를 기다린다! 그곳의 시련을 완수하고 숲의 주인을 찾아라! 도중 만나는 모든 인간을 죽여라!'


크크크. 부랑자들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그들은 마치 신탁을 받은 광신도처럼 왕의 명령을 받든 병사처럼 신속하고 충실하게 이행했다. 의심한 이가 없는 건 아니었다만, 별수 있어? 우르르 몰려가는 무리에 휩쓸려 정신 차리고 보면 그들과 함께 중앙산으로 뛰어가고 있었을 텐데.


왜냐? 저들은 겁쟁이거든. 자신들 스스로를 위대한 반역자, 탄압받는 혁명가, 도덕적이나 일순의 욕망에 빠진 명예로운 시민쯤으로 여긴다. 실상은 쉽게 선동당하고 자기 행동에 책임지기 싫어하는 머저리들일 뿐인데 말이지.


자신들이 버려진, 혹. 집단을 나와야만 하는 이유가 스스로에게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집단을 탓한다. 상황을 탓한다.


범죄를 저지르고 현 사태가 이질적이라 법의 무의미함을 말하고 나약함을 말미암아 버려졌다면 집단의 부도덕함을 직시하라 강요한다.


그들 스스로가 나약하고 의지박약이며 의존주의적이라는 사실은 쉽게 외면당한다.


멍청한 놈들.


자기 스스로를 자존적이고 주체적이라 여기나 누군가의 명령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바보 집단이 부랑자다.


그렇기에 야차는 그들을 규합했다. 그들에게 명령을 던졌다. 스스로 나서길 좋아하며 무리의 장이 되고자 하는 부랑자? 기꺼이 그들에게 조장의 자리를 던져주었다.


그것이 미끼임을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야차의 명령을 따라 움직였다.


흑야차가 중앙산의 '레드 비어드'로 파견된 것도 사실. 그 말을 믿은 부랑자들은 우후죽순 중앙산을 향해 달려갔다.


비록 흑야차로부터 연락이 끊겼지만, 그가 살아있다면 알아서 행동할 것이고 죽었다면 어쩔 수 없지.


흑야차가 죽었다면 중앙산과 레드 비어드에 문제가 발생한 것. 대체로 생존자들의 습격을 받았다거나, 혹 강력한 보옥수에게 당했거나겠지. 밀어 넣은 부랑자로 해결되면 바라지 않은 행운이요 상황 파악이나 시간 벌이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만족이다.


중앙산을 향해 지금까지 끌어모은 모든 부랑자를 보낸 직후, 연락이 끊긴 흑야차와 멍청하게 붙잡힌 금강야차를 제외한 일곱 야차가 각각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객원이 한 명 껴 있긴 하다만 뭐 중요한 건 아니고.


그 중 광야차 토마스와 적야차 우소현이 파견된 곳은 북쪽 숲. 북쪽의 거목에 시련이 있음을 알기에 두 야차는 곧장 거목을 향해 나아갔다.


다만, 어차피 나중에 생존자들을 죽이러 다닐 거, 만나는 모든 생존자를 살해하며 전진한다.


하필 함께하는 게 미친 방화광이지만, 별수 있나. 이놈을 통제할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는데.


"아이씨. 무거워. 니가 걸어."


질질 끌던 토마스를 휙! 집어던진다. 토마스는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착지. 낄낄 웃는다.


"아~ 또 불태울 거 안 나타나나? 방금 장작들은 너무 약했어~ 고작 2,000℃도 못 견디고 타버리다니."


2,000℃가 고작이란다. 쯧. 미친놈. 늘 이런 놈이었으니 어련하겠지만.


"하아. 그거야 잔챙이니까. 저놈들 딱 봐도 어제 그 일로 아지트랑 식량 잃고 떠도는 떠돌이. 다른 집단을 공격할 깡도 없고 식량은 필요하니 숲의 상인이라도 찾으려 돌아다니는 멍청이들이라고. 그런 놈들이 강할 리 있냐."


나약한 놈들. 버려지고 소외당했다면 자신을 버린 울타리를 부수고 목을 물어뜯을 깡이라도 가져야지. 하긴. 그게 저들과 나의 차이겠지.


"근데 대장은 괜찮겠지? 대장이 강하긴 하지만 대공원 놈들은 이런 쓰레기는 아니던데."


소현은 픽 웃는다.


"별걸 다 걱정한다 너는. 대장이 무력으로 밀릴 리도 없거니와 쉽게 잡혀줄 인간이냐? 위험하면 어련히 피하겠지?"


토마스는 흐음 콧소리를 내다가 픽 웃는다.


"크크 하긴. 그 양반이 잡힌다면 일부로 잡힌 걸 꺼야. 그러고 태연하게 나와 안에서부터 죄다 박살 내겠지. 낄낄낄~"


"그리고 금강 놈도 처리해야 하니까.


대장이 동쪽으로 향한 가장 큰 이유. 대공원 그룹의 손에 그들의 일원인 금강야차가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소문으로는 팔이 절단될 정도로 큰 부상을 입고 잡혔다지만, 반대로 모두를 속이고 대공원 그룹으로 투항했을 가능성도 있다.


대장은 그것을 확인하러 간 것이다. 놈이 배신한 것인지 아닌지. 원래도 냉정하지만, 배신자에겐 더욱 철저한 사람이다.


휘잉──


그때, 찬바람이 불었다. 나무가 가득한 숲, 사방이 공기를 잡아먹는 불길로 뒤덮인 이곳에. 그게 가능한가? 열기로 인한 상승흐름도 아닌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이?


"흐응?"


그 어색한 바람에 토마스가 고개를 갸웃함과 동시, 불길을 뚫고 칠흑의 무언가가 날아든다.


카각!


토마스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우소현의 지팡이, 그것에 막혀 부들대는 길쭉하고 검은 금속 덩어리 때문이었다.


펑!


우소현의 마력을 타고 폭발이 일어난다. 지팡이 너머, 전방을 잡아먹으며 터져나가는 폭발이 바로 그녀의 힘이었다.


그제서야 알아챘다. 그들을 공격한 불청객의 존재. 공격받기 전까지 누가 있는지도 몰랐다. 공기 유동으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완벽한 기습에 당했겠지.

"이건 또 뭐야?"


소현은 상대를 유심히 보았다. 흐릿한 존재감에 방해라도 받는 것처럼 지직거리는 테두리를 마력으로 눈을 강화해 노려보자 그제야 상대가 명확하게 보인다.


"너... 가면. 너구나? 우리 아지트를 털고 도망친 놈이."


새하얀 반가면을 쓴 의문에 존재.


숲의 거의 모든 이들은 저놈의 존재 자체를 모르겠으나 그녀는 자신들의 대장 말고도 다른 규격 외 생존자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최상위 랭커인 대장과 싸우고 멀쩡히 사라진 유일한 인간이 저놈이니까.


둘 다 전력은 아니었다. 오래 싸운 것도 아니었지. 그러나 놈은 대장의 검을 아무렇지 않게 받고 반격까지 한 뒤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막 원소의 숲으로 넘어와 부랑자를 규합하던 시기였기에 아지트에는 우소현과 대장 둘 뿐이었다. 과묵한 편인 대장, 그리고 다른 야차들을 마음에 들지 않던 우소현은 굳이 모두에게 알리기보다는 그녀와 자주 팀을 이루는 토마스에게만 말했다. 대장과 버금가는 존재가 숲에 있음을.


그리고 생각이라곤 없는 토마스를 제외한 두 사람은 어제밤 갑자기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저 의문의 존재가 깊이 관여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증거는 없다. 감이었다.


"Xiht! 저 가면 놈이 그놈이야?"


"어. 그놈이야."


적야차와 광야차. 두 야차의 광포한 마력이 숲의 공기를 불태운다.


"그럼 곧장 Go to Hell~ 낄낄낄!"


그것도 모자라 광야차가 먼저 화염을 뿜어댄다. 단순한 불길이 아니다. 뜨겁고 폭발적이며 사방으로 번진다. 그야말로 대량 학살에 최적화된 불이다.


나는 몽둥이를 노를 젓듯 부웅 휘둘러 불길을 쳐낸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중앙산에서 북쪽 숲 거목을 향해 직선으로 달리면서 눈에 띄는 생존자들에게 소위 '퍽치기'라 불리는 짓을 하고 다녔다.


빠르게 때리고 튀면 이능으로 보호받는 나의 존재를 깨닫지도 못했다. 일일이 쓰러뜨리기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생존자 무리에 부상자만 만들어도 움직임이 굼떠질 수밖에 없으니 했던 짓인데 하필 야차를 만나다니.


다행히 저들의 대장 '천야차'는 없다.


저들의 손과 지팡이에서 맹렬히 타오르는 마력을 응시한다.


야차 중 불의 힘에 특화된 두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광야차(狂夜叉), 그리고 적야차(赤夜叉).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생존자 무리가 숨어들었다고 10층짜리 건물 하나를 전소시킨 천하의 방화광이며 스물 중반의 갈색 장발 여인은 사람을 터트려 죽이는 미친 마녀. 어쩌다 들은 소문이었지만 주변의 광경을 보면 그리 과장된 것 같지도 않다.


"어디. 실력 좀 볼까?"


"먼저 간다~ 키햐!"


광야차의 손길을 따라 공중에 떠오른 다섯 개의 화염구. 머리 위에서 백귀(白鬼)처럼 어지러이 맴도는 불꽃과 함께 앞으로 내달린다.


"히─ 햐!"


쭉 펼친 검지와 중지를 따라 불꽃이 행진한다. 반대되는 팔에는 이글거리는 불길이 산소통에 떨어진 성냥처럼 광막하게 타오른다.


화르륵!


땅을 박찬 내가 있던 자리로 구체가 처박히며 넓게 펴지는 불꽃이 발한다.


불은 아래에서 위로 타오른다. 따라서 너울거리는 불꽃 역시 하늘을 향해 너울거리기 마련이나 저 불꽃은 달랐다.


마치 땅에 생겨난 물웅덩이처럼 넓고 옅게 퍼진다.


내가 뛰어오를 걸 예상한 것처럼 놈의 다섯 화염구가 넓게 떨어져 지상을 뒤덮은 것이다.


공중에 뛰어올라 체공하는 사이, 놈이 불길 위를 박차고 뛰어오른다.


땅이 없다면 인간은 무력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인간은 떨어지는 것밖에 할 수 없고 망망대해에서 허락된 것은 허우적대는 것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광야차의 전술은 심리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효과가 뛰어났다.


"「광염장(狂炎掌)」─!"


이미 사방은 놈의 불길로 꽉 막힌 상황, 바닥을 없애 뛰어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강요하고 불꽃을 휘감은 채 돌진. 공중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대에게 치명타를 먹이는 전술이다.


그러나 나는 허공에 남겨졌다고 아무것도 못 하는 범인이 아니다.


「어둑한 상상」


허공에 만든 발판으로 무게를 지탱한 채 몽둥이를 들었다.


자고로 말 안 듣는 애새끼에겐 몽둥이가 약이랬다.


광야차의 손바닥을 가볍게 피해내며 검은 파편을 복부에 박아넣는다.


퍼억!


고대로 날아가 땅에 처박힌 광야차가 목덜미로 땅을 쓸다가 툭 대(大)자로 뻗는다.


손목에 느껴지는 반탄력이 평범 이상이다. 그 순간 마력을 모아 방어한 건가. 생존본능에 의한 듯 약간 엉성하긴 했으나 재빠른 방어였다. 역시 야차. 저게 바로 재능인가.


"어우... 아파라."


"낄낄! 내가 너 미친놈처럼 달려들다 처맞을 줄 알았다. 미친놈. 크크!"


제대로 비웃는 적야차에 광야차가 뻗은 채로 인상 쓴다.


"아씨. 처웃지 말고 뭐라도 해! Xuck!"


"오냐. 뭐라도 해줄게."


적야차의 손 위로 선명한, 그러나 무엇인지 알아볼 수는 없는 문자가 붉게 떠오른다.


주변에 산재한 자연의 마력이 휘몰아치며 손 위로 모이기 시작한다.


잠깐, 저건 생각 못했는데.


떠오른 문자가 겹치고 합쳐지며 그려지는 기하학적인 마법진.


"「3위계 - 불안정한 공기」"


반사적으로, 몸을 튕겼다.


동시에 일대의 공기가 변했다. 정확히는, 내 주변의 공기만 변했다.


"Action."


딱! ───콰앙!!!


손가락을 튕기자 일어나는 성대한 폭발.


「불안정한 공기」는 일시적으로 대기의 분자 구조를 느슨하게 하여 원자단위로 분리시키는 마법이다. 이곳은 숲. 남쪽 숲 만큼은 아니지만 대기 중엔 상당한 수분이 포함되어 있다. 본래라면 화염계, 폭발계 마법에 방해만 되는 수분이지만 물(H2O)의 구조를 흩트려 수소와 산소로 분리, 순간적으로 발생된 가연성·조연성 물질로 폭발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킬킬! 조아쓰─! 그거 하자! 「화공포화」!!"


다리를 머리 위로 넘겼다가 휙 몸을 튕겨 일어선 광야차가 두 팔을 모았다가 쫙 펼친다.


그에 따라 나타나는 포문. 5개의 오브였다.


"그거? 시끄러워서 싫은데. 에휴. 「화공포화」."


질색하던 적야차 역시 한숨을 쉬며 동일한, 그러나 조금은 다른 이능을 펼친다.


적야차의 포문은 하나였다.


"뒤져라!"


"쏴버려."


환한 미소를 터트리며 손을 휘저은 광야차와, 이글거리는 폭발 속에 있을 적을 노려보는 적야차의 명령이 겹친다.


쾅!! 콰콰왕!!!


폭연과 폭음.


일순간, 화력전의 참혹함이 숲에 도래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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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망해도 외톨이는 아웃사이드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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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연재일정 22.05.11 144 0 -
62 62. 22.09.02 34 0 21쪽
61 61. 위선자과 선인 22.08.23 29 0 24쪽
60 60. 22.08.17 32 0 19쪽
» 59. 22.08.08 42 0 22쪽
58 58. 나는 너완 다르다 22.07.30 49 1 21쪽
57 57. 22.07.26 50 1 19쪽
56 56. 조우 22.07.23 47 0 18쪽
55 55. 고민은 짧아야 한다 22.07.20 42 0 13쪽
54 54. 22.07.15 53 1 11쪽
53 53. 짱돌이나 맞아라 22.07.11 56 1 26쪽
52 52. 22.07.06 57 1 14쪽
51 51. 대공원 그룹의 사정 22.07.02 65 1 17쪽
50 50. 22.06.30 63 1 21쪽
49 49. 22.06.27 64 0 13쪽
48 48. 장사꾼 올렉 +2 22.06.25 68 2 18쪽
47 47. 숲의 생태 22.06.24 65 1 13쪽
46 46. 야차 22.06.24 71 1 20쪽
45 45. +3 22.06.20 76 2 18쪽
44 44. 원소의 숲 22.06.16 80 0 12쪽
43 43. 22.06.16 74 0 18쪽
42 42. 세계의 아이 22.06.13 87 2 11쪽
41 41. 22.06.09 87 1 15쪽
40 40. 이상한 인간 22.06.08 93 2 14쪽
39 39. 언제나와 같다 22.06.05 104 2 21쪽
38 38. +2 22.06.04 106 1 19쪽
37 37. 22.06.03 100 1 21쪽
36 36. 밖으로 +2 22.06.02 104 0 13쪽
35 35. 파멸 22.06.01 106 4 14쪽
34 34. 학살에 맞서는 이들 22.05.31 112 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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