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성 각성자가 세계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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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abiDog
작품등록일 :
2022.05.11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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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1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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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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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효과 (2)

DUMMY

어둠에 잠긴 경사로를 따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일렬종대를 이루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폭포를 통해 제한 없이 공급되는 습기와 탄젠트값 0.44에 달하는 살벌한 경사도를 감안한다면 저러한 대형은 실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길이라는 것이 한 사람이 겨우 운신할 정도의 폭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러한 선택은 오히려 미필적 고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윤은 경사로의 초입에서부터 자신의 판단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음을 순순히 인정해야 했다. 풀 가동했던 행복 회로는 어느덧 냉랭한 한기만 감돌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능력자들이 선택한 경로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쉬우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물론 쉽겠지, 능력자들한테는. 이쪽은 아틀라스에 커다란 짐짝까지 싣고 올라가자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최 후미에서 깔딱거리는 성윤의 숨소리를 배경 음악처럼 듣고 있던 두식이 연신 불안한 눈길을 보낸다.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얼마를 걸었을까, 마침내 머리 위 저 멀리에서 희미한 푸른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할렐루야.


선두에서 유안을 데리고 길잡이 역할을 하던 경호가 형광봉을 내밀어 정지 신호를 보내자 일행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추었다. 그가 이번에는 형광봉으로 자신을 가리킨 다음 진행 방향으로 호를 그린다. 그 신호에 맞춰 모두가 밀착하여 서로의 어깨를 두들기는 것으로 일행의 이상 유무를 확인한다.


어둠 속에 남아서 멀어지는 형광봉을 응시하는 이들의 각기 다른 숨소리가 고장 난 풍금처럼 재미있는 소리를 만들어 냈지만, 그 때문에 웃거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크게 원을 그리듯 형광봉을 돌리는 경호의 수신호가 있기 전까지 실제론 몇 분 지나지 않았겠지만, 모두에게 이 순간만큼은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분위기가 묘한 곳이네요."


협로가 끝나는 곳에 넓은 운동장 하나 정도 크기로 탁 트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두식과 함께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성윤은 힘든 것도 잠시 잊어버리고 홀린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일행이 길 끝에서 봤던 푸른 빛은 천장의 갈라진 틈을 통해 내려온 햇빛이 벽에 붙어 있던 푸른 빛 석영에 부딪히며 산란했던 것이었다. 좁은 골짜기를 가득 메운 빛의 향연에 모두 성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뭐가 좀 잡히나?"


그새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온 경호의 말에 성윤이 잠깐 잊고 있었던 자신의 역할을 떠올리고는 아틀라스에 달린 스캐너를 가동했다.


새싹이 돋아나고 자라서 마침내 꽃이 피는 과정을 재연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섯 장의 센서가 달린 스캐너가 천천히 펼쳐지면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잠깐 말없이 바이저를 응시하던 성윤이 입을 열었다.


"특별한 건 없는데, 통신 신호가 영 신통치 않네요. 조금 더 올라가 보면 사방이 트인 곳이 나올 테니 그때 다시 한번 시도해보죠."


"벽에 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특별한 게 없다니!"


희희낙락하던 두식이 갑자기 뭘 봤는지 질겁하며 물러선다.


"멍청아, 저건 산양이잖아."


두식의 뒤통수를 소리나게 한 대 갈긴 경호의 말대로 다수의 더벅머리 산양들이 곳곳에서 석영 바위를 여유롭게 음미하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동네 마실이라도 다니듯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대자연의 물리 엔진에 심각한 버그가 생긴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한참 동안 그것들을 노려보던 두식은 마침내 내면의 인지부조화를 극복한 듯 궁시렁거리며 물러났다.


경호와 성윤이 지도를 보며 경로를 상의하던 사이, 빠른 속도로 무료해진 두식이 발로 바닥을 헤집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는 씨익 웃어 보인다. 그 모습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 태라가 두식이 뭘 하든 만류할 작정으로 대뜸 끼어들었다.


"아저씨, 뭐 하려고?"


"뭐? 아, 저거 한 번 맞춰보려고."


"그거 동물 학대인 거 알죠? 하지 마요."


"에이씨, 말리지 마. 저거 때문에 간 떨어질 뻔했잖아. 한 번은 갚아줘야지."


태라의 만류에도 두식은 기어이 한 방 먹여야겠다는 듯 과장되게 자세를 잡았다. 뜻밖에도, 그때까지 조용히 머물러있던 유안이 가세하여 온 힘을 다해 두식의 팔을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봐 왔던 그녀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조금 의외다 싶은 반응이라, 태라와 두식 모두 내색은 안 했어도 제법 놀란 눈치였다.


"안 돼요! 큰일나요!"


"아 놔 진짜, 이 아가씨들이 단체로 뭐 먹었나. 좀 놔보라고!"


처음에는 가벼운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쯤 되고 보니 두식도 마음 한구석에 울컥하는 게 있어 자신의 고집을 꺾을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대던 두식이 힘을 주어 와락 밀어내자 고목에 다람쥐처럼 매달려있던 여자 두 명이 맥을 못 추고 우르르 나동그라진다. 태라와 유안이 순수한 완력으로만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였다.


마침내 두식의 손을 떠난 돌멩이는 석영 바위 근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더벅머리 산양 한 마리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날아갔다.


"뭐지?"


싱잉볼을 두드린 것 같은 공명음이 하나의 석영에서 다른 석영으로 옮겨가며 협곡 전체를 묵직하게 울린다. 놀란 경호와 성윤이 고개를 쳐들자, 황급히 달아나는 더벅머리 산양 한 마리를 필두로 무리 전체가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두식과 그 옆에 자빠져 있던 태라와 유안의 모습이 어쩐지 수상했다. 두 사람이 일행이 있는 곳으로 급히 달려가는 가운데, 꺅꺅거리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리더니 이내 더벅머리 산양의 울음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무슨 일입니까? 저거 뭐예요?"


"아니... 그게..."


성윤의 물음에 우물쭈물 대답을 얼버무리는 두식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경호는 나머지 두 사람에게도 대답을 구하는 시선을 던졌다. 태라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고 있었고, 울상이 된 유안이 어쩔 줄 몰라 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두식 아저씨가 산양한테 돌 던졌어요. 말렸는데..."


긴 한숨 소리와 함께 두식의 뒤통수에서 다시 한번 빡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너는 우리가 왜 지금까지 미친놈처럼 입도 뻥긋 안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냐. 엉?"


"이제 조용해 졌잖수. 담부턴 조심할게."


두식의 말마따나 방금까지 시끄럽게 울어대던 산양들의 소리가 어느새 뚝 끊겨 있었다. 이곳만 세상에서 뚝 잘라내 방음실에 처넣어버린 것 같은 기묘한 고요함이다. 두식을 한심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경호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갔다. 성윤의 목울대가 꿀꺽 소리를 내며 넘어간다.


이거 안 좋은데. 태라는 벌써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돌려 자세를 잡았고, 유안과 두식도 슬그머니 무기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면서 사주경계에 나선다. 성윤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신의 이름을 되뇌며 다시 한번 스캐너를 가동했다.


바이저에 결과가 뜨기도 전에 멀리서 둥 하는 북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일행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잘못 들었는가 싶었는데 다시 한번 둥둥 하는 북소리가 들린다. 그 위로 찢어질 듯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세 번 정도 연속으로 더해지며 인상적인 잔향을 남긴다.


갑자기 스스스하고 마른 낙엽이 부딪히는 것 같은 이질적인 소리에 일행의 고개가 저절로 위로 향했다. 마지막에 들렸던 피리 소리를 신호로 삼은 듯, 하늘에서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도롱이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성윤은 바이저를 물들이는 수많은 점을 바라보며 급격히 얼굴이 어두워졌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 했던가. 옛사람들의 가르침은 도무지 버릴 것이 없다. 바닥에 떨어진 도롱이에서 애벌레처럼 털가죽 덩어리가 조금씩 삐져나오더니, 손발을 쭉쭉 뻗으며 하나둘 일어선다. 몹시 유감스럽게도, 도라카였다.


---


“현재까지 각 조, 바이탈 이상 없습니다.”


임시 지휘부가 설치된 막사 안에서 모니터링 팀의 보고를 듣고 있던 전술 행군 교육 담당관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스테인리스 머그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대개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보이는 모습이라는 걸 잘 알고 있던 고참 장교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조별 위치는?”


“대부분의 조가 체크 포인트를 통과하고 있거나 근접한 상황입니다.”


교육 담당관은 근본적인 인품이 글러 먹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지나치게 원활하게만 흘러가는 지금의 상황이 어째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 기수의 교육생들이 이렇게까지 우수했을 리가 없다.


진행 2시간 만에 체크 포인트를 돌고 있다? 이건 말이 안 된다. 게다가 부상자 하나 없이? 이건 더더욱 말이 안 된다. 도라카가 그렇게 몰랑몰랑 상대일 리 없다. 하지만 이 복잡한 퍼즐을 맞춰보기에는 지금 들고 있는 조각이 너무나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다만···”


“다만?”


모니터링하던 하급 장교 하나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교육관은 눈썹을 치켜들고 다음 말을 재촉했다. 당장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내놓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은 흉흉한 분위기에 하급 장교의 목소리가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 러니까, 네, 그러니까, 현재 2개 조의 위치가 파악되지 않습니다."


"파악이 안 된다? 그게 몇 조인가?"


"2조와 6조입니다."


교육 담당관은 꾹 쥐고 있던 스테인리스 머그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뜨거운 김이 피어올라 눈썹을 축축하게 적셨지만 별로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


2조에는 캐스터 임승현이 있었고, 6조에는 이번 기수 탑 장경호가 있었다. 구성원이나 분위기는 정반대지만 양쪽 조 모두 교육 성적이 순위권에 해당했다. 다른 조라면 모를까 이 두 조의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그에게 또 하나의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하급 장교는 교육 담당관의 오랜 침묵을 강한 불만의 우회적 표시로 받아들이고는 시키지도 않은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추적대가 각 조의 타임라인과 이동 경로를 대조해서 뒤져보는 중인데, 먼저 6조가 서쪽 산어귀를 향해 이동하던 중 강변 부근에서 이동 경로가 사라졌고, 시차를 두고 2조 역시 6조와 유사한 경로를 거쳐 사라진 것으로 파악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조직적인 직무이탈로 상정하여 강 하류 쪽으로 이들의 흔적을 찾는 중입니다."


가당찮은 이야기다. 이전에도 하류 쪽으로 탈주를 시도한 녀석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방면으로는 몸을 숨길만 한 곳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뿐이다. 굳이 추적대를 보낼 것도 없이 포획 키트를 장비한 정찰 드론 몇 기만으로 짧은 시간 내에 손쉽게 추적과 제압이 가능했다. 걸렸다면 벌써 걸렸겠지.


지금은 오히려 관계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건을 연결하는 편이 보편타당하다. 지나치게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교육생들, 그리고 2개 조의 행방불명. 문득 터무니없는 가능성 하나가 노회한 교육 담당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입에 올리기도 전에 꺼림직한 알림음이 막사 안에 있는 디바이스 전체에서 일제히 울렸다. 놀란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여들어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런 망할.


메시지를 확인한 교육 담당관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부릅떠졌다.



!긴급 통신 [오라클]!


- FA-FE-15-21(마리달 훈련장), 금일 15시 32분 기준, 돌발성 변이점 생성 경보 발령


- 동일 19시 이내로 지역 중심점 기준 반경 9km 이내의 민간인 및 비전투 요원들은 즉시 구역 이탈 후 인근 안전지대로 대피 요망.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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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죽은 별의 바다 (14) 22.06.20 18 0 13쪽
41 죽은 별의 바다 (13) 22.06.19 20 2 13쪽
40 죽은 별의 바다 (12) +2 22.06.18 23 1 14쪽
39 죽은 별의 바다 (11) 22.06.17 21 0 13쪽
38 죽은 별의 바다 (10) 22.06.16 30 2 12쪽
37 죽은 별의 바다 (9) +2 22.06.15 32 3 12쪽
36 죽은 별의 바다 (8) 22.06.14 41 1 12쪽
35 죽은 별의 바다 (7) 22.06.13 51 3 14쪽
34 죽은 별의 바다 (6) 22.06.12 25 2 12쪽
33 죽은 별의 바다 (5) 22.06.11 29 2 13쪽
32 죽은 별의 바다 (4) 22.06.10 41 2 13쪽
31 죽은 별의 바다 (3) 22.06.09 37 2 12쪽
30 죽은 별의 바다 (2) 22.06.08 36 1 15쪽
29 죽은 별의 바다 (1) 22.06.07 51 3 13쪽
28 나비효과 (6) 22.06.06 50 2 16쪽
27 나비효과 (5) +2 22.06.05 43 2 12쪽
26 나비효과 (4) 22.06.04 43 3 12쪽
25 나비효과 (3) +4 22.06.03 49 4 13쪽
» 나비효과 (2) +2 22.06.02 55 4 12쪽
23 나비효과 (1) 22.06.01 47 5 14쪽
22 생존훈련 (3) 22.05.31 51 4 15쪽
21 생존훈련 (2) 22.05.30 52 3 14쪽
20 생존훈련 (1) 22.05.29 57 3 15쪽
19 재회 (5) 22.05.28 60 5 12쪽
18 재회 (4) 22.05.27 54 5 12쪽
17 재회 (3) 22.05.26 59 7 15쪽
16 재회 (2) 22.05.25 80 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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