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회차) 시험에 들게 하는 것
“이 책상을 그 아이가 샀니. 앉으면 주인이지. 앞으로 여기가 수지 자리니까 알아둬. 담임 선생님이 그러라고 했어. 수지야, 엄마는 교무실에 갈 거니까. 우마리랑 잘 놀고.”
모리가 쌩하고 나가는 모습을 수지는 쳐다보지 않는다. 다만 엎드려 소리 없이 운다. 3반 아이들 시선이 수지에게 향한다.
“수지야, 학교 오는 거 재미없어.”
"······"
수지는 아무 말이 없다.
“난, 오늘부터 학교 오는 거 재미있어질 것 같아. 네가 전학을 왔잖아. 아직 친구가 없는데 나랑 친구 할래."
몸을 뒤로 돌린 우마리가 엎드려 울고 있는 수지의 어깨를 토닥인다.
“무섭구나. 처음엔 나도 그랬어. 시선을 받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아.”
“······!”
수지가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들자 콧구멍에서 코 풍선이 커졌다 작아진다.
“넌 코로 풍선을 불 수 있는 재주도 있구나. 네가 진짜 좋아지려고 해.”
“나, 풍선 잘 만들어.”
“어떻게 하는 거야.”
“그냥 펑펑 울다 보면 풍선이 나와.”
“그동안 많이 울었구나.”
우마리가 수지의 볼을 따뜻하게 만진다.
“너는 울어 본 적 없어?”
“난, 울어서는 안 돼.”
“왜!”
우마리가 주변 친구들을 보며 귓속말을 한다.
“울기는 하지만 저녁에 침대에서 혼자······”
“나보다 불쌍하구나.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우마리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불쌍한 게 뭐야?”
“불쌍한 것도 모르니. 돈이나 집도 없고, 놀림받고 도망 다니거나 아빠가 없는 사람을 불쌍하다고 해.”
“너 아주 똑똑하구나. 그런 것도 알고.”
“넌 보기보다 멍청하네.”
“멍청한 게 뭐야?”
이번에 수지가 고개를 갸욱거린다.
“혹시, 너 멍청하다는 말 처음 듣는 건 아니지.”
“처음 듣는데.”
"헐!"
우마리와 수지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다.
“야, 우리 단짝 맞지. 넌 공부도 잘하지, 예쁜 데다가 인기도 많고 나는 아니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우마리가 내 친구라는 사실이지. 난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매점에서 우마리가 스프라이트를 따개를 열어 수지에게 준다.
“마셔! 난 너랑 있으면 정말 재미있어 그냥 다 괜찮아져. 그리고 네가 좋은 건, 넌 거짓말도 못 하고 게다가 그림도 잘 그리잖아. 나도 네가 내 친구라는 사실이 좋아.”
둘을 대학을 가면서 갈렸지만 서로의 손을 잡고 응원한다.
"어떤 모습이든 우정은 변치 않는다."
우마리는 MIT, 수지는 쿠퍼 유니언으로 전공을 찾아 각자의 길로 향한다.
***
수지가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에 서서 버튼 누르기를 망설인다. 미우미우 파란 플리츠스커트에 흰 블라우스 입은 수지가 치마를 잡고만 있다.
‘그냥, 남양주 쪽 돌다가 들어갈까?’
카톡 문자를 다시 확인한다.
:삼산 그룹 재훈이 생파 한다고 들었어. 꼭 가라고 퀀텀 용수도 온다고 하더라. 재훈 맘 구슬려서 받은 거니까. 잘 놀다 와.
엄마가^^
멤버스는 정재계 명문가 자녀들만 모이는 사교클럽이다.
‘초대받지 못했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엄마는 괜한 짓을 해서 정말···’
수지가 고민하는 사이 한국은행 총재 손녀 소희가 수지의 어깨를 민다.
“너도 왔네. 재훈 오빠한테 초대받은 거 맞지.”
“으 으응.”
“오빠 취향이 많이 낮아졌네. 너 같은 애를 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다 소희가 옆에서 수지를 아래위로 훑는다.
"너 키 많이 컸다. 수술했니?"
“······!”
수지는 말없이 엘리베이터 빨간 화살표가 반짝거리 것만 멀뚱히 본다.
"어쭈, 제법인데 말도 씹을 줄 알고."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소희는 수지 어깨를 밀치며 나간다. 군데군데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역시,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소희는 재훈에게로 가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오빠, 생일 축하드려용."
수지는 칵테일 바 구석 대형화분 몬스테리아 옆에 숨듯이 앉는다. 주변을 다시 둘러보고 더 작게 움츠린다.
'가만히 있다가······'
수지를 힐끔 보던 바텐더가 닦던 잔을 내려놓고 움직인다.
"웰컴 스낵입니다."
“고맙습니다. 운전할 거니까. 피치트리로 주세요.”
‘칵테일만 마시고 일어나자.’
조용하던 파티룸, 누군가의 등장에 시끄러워지며 분위기가 업 된다.
“와아! 퀀텀 황태자 용수님께서 오셨네.”
용수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성거리자 재훈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요올~ 브라더, 용수!"
“생일 축하한다. 제훈아, 왜 태어났냐 이 힘든 세상에···”
"오빠, 이게 얼마 만이야. 작년 남부 CC 골프장에서 봤으니까 일 년이 조금 지났나. 너무 반갑다."
배 다빈, 신미래 유통 둘째 딸이 용수 손을 장난치듯 터치한다.
“그나저나 용수 오빠! 오늘 생파 주인공 재훈 오빠보다 더 생파 주인공 같으면 어떡해. 엇! 구두, 에르메스 로열 한정판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야, 용수잖냐. 누가 신미래 딸 아니랄까 봐. 안쪽에 우리 자리는 따로 있어. 가자.”
용수가 주변을 살피다 수지와 눈이 마주쳤고, 수지가 놀라 얼굴을 숙인다. 용수가 씨익 웃고는 재훈을 따라간다.
"용수야, 너 오늘 집에 못 들어간다. 알지."
“너 아직도······?”
“아니야, 오늘은 내 생파잖냐. 나도 모처럼 특별 허가받은 거야.”
소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수지가 잡고 있던 칵테일을 빼앗는다. 젊은 바텐더가 소희를 유심히 보며 부드럽게 닦던 컵을 힘주어 닦는다.
"칵테일 만들어 드릴까요?"
"놉, 노땡큐!"
쌀쌀맞은 소희가 수지 칵테일 잔을 흔든다.
“초대받아왔다며, 여기서 뭐하니. 인사도 안 하고 가자!”
소희는 수지를 강제로 일으켜 재훈 앞에 억지로 세운다.
“오빠, 얘도 불렀다며 인사는 받아 줘야지.”
재훈이 수지를 보고 손에 들었던 럼을 내려놓는다. 무슨 말을 하려는데 용수가 끼어든다.
“이야, 여기에 오니까 수지를 다 보내. 집안 행사도 나오지 않더니.”
용수의 얼굴이 수지를 보고 밝아지자. 재훈이 머쓱하다.
“진 진짜, 수지 얼굴 보기 힘들어 그치. 와 줘서 고맙다. 수지야!”
재훈이 용수 얼굴을 다시 확인하며 어색하게 웃는다. 수지는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아도 역시 아는 선배나 친구는 없다.
"재훈 오빠 생일 축하해요."
'손을 흔들고 아무렇지 않게 천천히 걷는 거야.'
수지가 화장실로 향한다.
‘재훈 오빠가 날 봤고 여기 온 게 확실하니까. 엄마도 뭐라 하지 않겠지.’
“얼굴도장 찍었고 여기서 나가면 돼.”
뚜껑 덮은 변기에 앉아 시계를 보다 수지가 결심한 듯 화장실을 나온다.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갈 때였다.
“어디가?”
소희가 수지 블라우스를 잡아당겨 허리에서 블라우스 밑단이 삐져나왔다. 바텐더가 누군가와 이야기하다가 유리잔으로 둘을 비춘다.
“도둑 고양처럼 어딜! 가려고.”
“왜, 그래.”
“그러게, 내가 이러기 전에 진작 갔어야지. 초대받지도 못했으면서.”
“그래, 맞아 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렇지, 혹시나 했는데 내 짐작이 맞았어 착해 빠진 용수 오빠를 이용할 줄도 알고, 이젠 네 엄마 빼닮는구나. 끼 부리는 엄마 덕에 여기저기 걸치고 사는 주제에.”
찰싹!
수지가 소희 뺨을 때렸다.
주변 시선이 수지와 소희에게 쏠리며 배 다빈이 걸어온다.
“천박하게······ 너희들, 선배 생일에 와서 이게 무슨 짓이야.”
“다빈 언니! 초대도 받지도 못했으면서 얘가 나를 때렸다고요.”
다빈이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채 냉랭하다.
“너 이름이?”
“수지, 김 수지예요.”
“처음 듣는 이름인데 어쨌든 네가 잘못했네. 소희한테 사과해.”
수지는 엘리베이터를 한번 쳐다보고 말한다.
“미안해, 소희야.”
찰싹! 찰싹!
“사람 때리고 망신 줘 놓고서 미안해. 그러니까 넌 두 대야.”
소희의 도발적인 모습에 다빈이 놀라는 사이, 수지가 말없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빨갛게 부푼 볼에 눈물이 흐른다.
'이번에 진짜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집에 가서 나도 침대에서 울려고 했···'
바텐더와 함께 있던 용수의 빠른 발소리가 둔탁하게 다가왔다.
'하늘이 오늘도 나를 시험에 들게 하시네.‘
용수가 수지와 소희 사이에 심판을 서듯 선다.
“모처럼 기분 좋게 왔는데 엉망이 되려고 하네.”
용수는 소희가 못마땅하다.
"넌, 도대체!”
술잔을 들고 돌아다니던 재훈이 인상을 쓰며 뛰어온다.
'아이 씨. 오늘은 엄마가 조용히 지내라고 했는데.'
"워워, 애들 일이야. 그냥 냅 두자."
수지 손을 덥석 잡는 용수.
“너나, 나나 웬만하면 참고 넘어가지만 딱하나 관대할 수 없는 게 있잖아.”
소희는 수지를 노려보며 억울하다는 듯 울먹거린다.
"용수 오빠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한테만 그래요."
"얘 봐라. 진짜, 어이가 없네. 싸가지없는 건 그렇다 치자. 근데 난, 가식적인 존재는 그 자체를 싫어해."
재훈이 곤란한 듯 애써 웃으며 용수 앞을 가로막는다.
“자자! 얘들 싸움이 어른 싸움된다. 어른이 끼면 되겠냐"
"재훈아, 미안한데 지금 이 상황 말리면 너도 싫다."
두 손을 오버하며 휘젓는 재훈이다.
"어이, 꼬맹이들은 저리 가서 놀아라. 용수는 나랑 술이나······ 이제 보니 너 아직 술 한잔도 안 했어. 생파는 술로 시작하는 게 원칙이지. 참는 자에게 술이 있나니.”
둘러앉아 조용히 지켜보던 이들이 관심을 보인다.
"봐라, 봐. 용수야! 저기 냄새 맡고 바퀴벌레들 몰려온다."
재훈이 용수를 달래며 손을 잡아끈다.
“야, 너 이런 모습 중딩 때 보고 처음 본다.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 작가의말
당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
어떤 감정으로 시험에 든다는 것은 정서적 취약성. 잠재된 지뢰밭, 이것이 터져 다치는 건 오직 당신이죠. 감정의 지뢰밭을 두고만 볼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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