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갓겜의 보물 창고를 열었다

갈포드는 지하의 술 저장고로 헨리를 데려갔다. 저장고의 벽면에는 사람만한 오크 통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중 제일 안쪽에 있는 오크통을 뜯어내니 비밀 통로가 나왔다. 붉은 두건 길드의 비밀 금고로 통하는 통로였다.
“조심히 따라와, 하도 관리를 안 해서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갈포드는 랜턴을 들고 먼저 앞장섰다. 통로는 좁았기 때문에 허리를 숙여야 했다.
헨리는 얌전히 따라왔다. 혼잣말로 뭐라 중얼거렸지만 신경쓰일 만큼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십수년 전, 갈포드는 갑작스럽게 길드를 떠안게 됐다.
전대 길드장이 황실 마탑을 털다가 실종된 이후 길드원들은 갈포드를 길드장으로 세웠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무엇보다 붉은 두건으로써의 자긍심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표면적인 이유고, 진실은 책임을 떠넘기기 위함이었다.
안 그래도 황실 마탑을 터는데 실패하며 많은 자본과 인재를 잃은데다가, 길드장의 실종으로 금고의 보안주문도 소실.
망하기 직전의 길드를 스스로 떠맡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갈포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붉은 두건은 고아였던 자신을 먹여살린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이제는 은혜를 갚을 때라 생각하며 갈포드는 지금까지 버텨왔다.
‘결국 은혜를 원수로 갚았지만.’
쇠퇴해가는 길드를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갈포드는 길드를 담보로 사채를 빌렸고 빚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불어났다.
돈만 있었다면 여기까지는 안 왔을지도 모른다. 제국 최고는 아니어도 도둑 길드라는 명색은 이어갔을지도.
아까 흥분하긴 했지만 헨리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존의 팔을 잘라버린 걸 보니 꽤 수준 높은 마법사일 터. 게다가 감정사로써의 평판도 좋다.
마나의 흐름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감정과 주문 해제는 비슷하니 믿어볼만 했다.
‘저 자식이 복덩이일지 사기꾼일지 두고 봐야 알겠지.’
둘은 금방 비밀 통로의 끝에 다다랐다. 허리를 펴니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붉은 두건이 100년간 모아둔 재산이 잠들어있는 비밀 금고였다.
갈포드는 금고 문에 손을 댔다. 그러자 문에 걸린 마법진이 발광했다. 약 500획이 동원된 보안 주문이었다.
마법진에서 미약한 전류를 느낀 갈포드는 재빨리 손을 뗐다. 100년이 지났는데도 주문의 위력은 여전했다.
“손대는 것조차 막아둔 금고야. 열 방법은 보안 주문 밖에 없어.”
문을 아예 부술 생각으로 여러 용병들을 고용해봤지만 죄다 실패였다. 금고 재질 마저 특수한 금속으로 되어있어 부수는 건 불가능했다.
“만약 못 열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헨리는 별 신경쓰지 않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주문치고는 짧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뜻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 단번에 풀 만큼 단순한 마법진이 아닌데 헨리는 주문 하나를 외우고는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뭐해? 얼른 열라니까.”
헨리는 대꾸도 않았다. 마치 선채로 죽은 것 마냥 아무 반응 없었다.
갈포드는 헨리에게 다가갔다. 금고도 갈포드도 아닌 허공 어딘가를 응시 중이었다.
“뭐하고 있는 거야? 마법을 쓰든 뭐든 하라고!”
눈의 초점은 여전했다. 대답도 없었다.
“역시 거짓말이었냐?”
그럴 줄 알았다. 다른 마법사들도 못 연 금고를 전당포 감정사가 어떻게 열겠나.
“내가 각오하라고 했지?”
갈포드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냈다. 헨리한테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저 사기꾼의 목을 따버리고 싶은 충동이 더 강했다.
헛된 꿈을 꿨다. 기나긴 암흑기를 벗어나 다시 제국 최고의 도둑길드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전부 설레발이었다.
갈포드는 헨리의 목에 단검을 갖다댔다. 이상하게도 헨리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봐줄 생각은 없었다. 갈포드는 천천히 헨리의 목을 그었다. 붉은 피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힘이 전부 주진 않았다.
그러나 금고는 굳게 닫혀있었다.
끝이다. 갈포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쾅!
그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금고 쪽이었다. 둘은 폭발의 여파로 인해 바닥에 넘어졌다. 단검도 함께 떨어졌다.
“콜록!”
자욱한 연기가 앞을 가렸다. 헨리도 금고도 보이지 않았다.
갈포드는 손을 뻗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연기를 비집고 들어가자 이윽고 손 끝에 무언가 닿았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이었다. 한 손에 잡을 만큼 작고 가벼웠다.
휘잉!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오더니 연기가 걷혔다. 지하에서 바람이라니. 헨리의 마법이었다.
갈포드는 그제야 자기 집은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금화였다.
그리고 눈 앞에 그 금화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
나는 목에 난 상처를 만져봤다. 깊진 않았다.
아슬아슬했다. 하마터면 목이 달아날 뻔했으니.
“그러니까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 주문 외우는 척이라도 해야지!”
죽을 뻔한 건 난데 호들갑은 안젤라가 더 떨었다. 내가 죽으면 안젤라도 다시 죽는 거랑 다름 없으니까.
괜한 연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믿었으니까.
“그러니까 더 빨리 부수든가 했어야지.”
“아까 마법진 못 봤어?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면 한참 걸린다고.”
100년전에는 제국 최고의 도둑길드였으니 이 정도 보안 주문은 당연하다.
갈포드는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금고 안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평소의 위엄있는 모습은 접어둔 채 장난감 가게에 온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금화. 사라진지 몇백년이 지난 명화와 유물들. 칼리나르 곳곳의 땅문서. 이름난 대장장이들이 만든 각종 무기까지.
가치를 매겨보자면 웬만한 지방 귀족가의 재산 정도는 됐다.
“드디어··· 드디어···”
갈포드는 흐느꼈다. 그간의 감정이 북받쳤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갈포드가 길드장이 된 지도 십수년. 길드가 무너지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얼마나 미웠을까. 나로써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감정은 알 것 같았다.
내가 소울 브링어를 발견했을 때,
삶의 의욕을 되찾았던 때와 같은 마음일 거다.
나는 갈포드가 울분을 다 토해낼 때까지 기다렸다.
“고맙다! 존나게 고맙다고!”
갈포드는 갑자기 나를 껴안았다. 팔 힘이 너무 세서 숨이 막혔다. 게다가 눈물이랑 콧물도 질질.
울게 내버려두지 말 걸.
한참동안 울어재끼고 나서.
“아깐 미안했다.”
눈가가 시뻘개진 갈포드는 칼을 들이민 것을 정중하게 사과했다. 애초에 마음에 담아두진 않았다.
“그럼 이제 브랜든이 붉은 두건을 맘대로 휘두를 이유는 없는 거죠?”
“그래,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군.”
붉은 두건은 이제 브랜든에게 책잡힐 일이 없다. 빚 갚을 돈이 생겼으니 브랜든이 더 이상 길드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그동안 붉은 두건을 이용한 대가를 치른다는 명분도 생겼다.
이제 잡기만 하면 된다.
“그래도 브랜든을 몰아내는 건 쉽지 않아. 브랜든 그 자식도 길드를 포기하진 않을 테니까..”
브랜든은 힘과 권력에 취했다. 돈을 갚는다고 순순히 물러나진 않을 거다.
“상관없어요. 제가 직접 만날 거니까.”
마침 물어볼 것도 있었으니까.
나는 브랜든과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 갈포드는 내일 술집으로 오라고 했다.
묻는 말에 대답하고, 돈 받고 떠나주면 고맙겠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3구역에 남고 싶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
평생 못 떠나게 묻어버리는 수밖에.
***
다음 날, 브랜든은 갈포드가 운영하는 술집을 찾았다. 오전 중이라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왔어? 여기 앉아. 소개해줄 사람은 곧 올 거야.”
갈포드가 안쪽 자리로 안내해줬다. 맥주를 따라줬지만 브랜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바쁜 사람 모셔놓고 기다리라니. 예의가 없네.”
브랜든은 갈포드를 노려봤다. 덩치는 갈포드가 훨씬 컸지만 브랜든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깔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갈포드, 요즘 풀어줬더니 내가 만만한가봐? 너도 길드원들이랑 빚쟁이들 돈 걷으러 다니고 싶나보지?”
바로 돌아가던 갈포드는 멈칫했다. 브랜든을 째려봤지만 그뿐이었다. 브랜든은 그의 소심한 반항에 웃음만 나왔다.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처신 잘 해. 봐주는데도 한계가 있어.”
여태 길드를 이용해 별의 별 짓은 다했지만 갈포드를 건드린 적은 없었다. 전설적인 도둑길드의 수장을 존중하라는 상부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러나 브랜든은 그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조직을 장악하려면 머리부터 꺾어버려야 하는데.
옛 명성과 상관없이 자신이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을의 입장이란걸 명심시켜줘야했다.
“알았으니까 기다려봐. 만나서 나쁠 거 없는 사람이니까.”
갈포드는 잠자코 돌아갔다. 넓은 등판이 축 처진게 마음에 들었다.
그 때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다 헤져가는 로브를 두른 사내는 한 손에 스태프를 들고 있었다.
얼마 전 브랜든이 쫒던 여자가 들고 있던 스태프였다.
“이게 누구야? 3구역 최고의 감정사 헨리 아니신가.”
헨리는 대꾸없이 브랜든의 앞에 앉았다. 늘 그렇듯 무표정이었다.
예상은 했다. 3구역에 겁도 없이 브랜든을 불러낼 사람은 몇 안 되니까.
가뜩이나 헨리는 어제 일로 우쭐해 있을 테니.
“마법사였다며? 존이 잘린 팔을 들고 부리나케 달려오더라고. 헨리 너한테 당했다고.”
“마커스를 건드리길래 손 좀 썼을 뿐이야.”
“그래, 그래. 남자라면 자기 사람은 지킬 줄 알아야지. 어차피 존 같은 놈 어떻게 되든 난 상관없어.”
진짜였다. 길거리에 널리고 널린 게 존 같은 양아치였다. 그깟 놈 언제든 대체 가능했다.
“근데 나까지 건들면 안 되지. 그 스태프. 내가 찾는 물건인 거 알지?”
브랜든은 턱 끝으로 헨리의 스태프를 가리켰다. 평범한 스태프였지만 브랜든은 한 번 본 물건은 잊지 않는다.
그 여자의 스태프가 확실했다.
“내가 그거 주인을 꼭 찾아야 하거든? 위에서 시킨 일이라 말이야. 그러니까 편하게 가자고. 내놔.”
“싫다면?”
“내가 여기 혼자 왔을 것 같아? 우리 애들이 이미 포위했으니 도망칠 생각은 마.”
헨리는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브랜든이 대기시켜둔 붉은 두건 대여섯 명이 있었다.
“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
“너희가 쫒고 있는 그 여자, 대체 누구야?”
의외였다. 헨리가 호기심이 많은 성격인지는 몰랐다. 세상 끝난 것처럼 살던 놈이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는지.
그러나 그건 헨리의 문제고.
“내가 왜 알려줘야 하는데? 지금 당장 여기서 널 죽이고 뺏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헨리의 실력은 존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한 명. 술집을 포위하고 있는 길드원들만 50명이 넘는다. 전부 달려들면 제아무리 마법사라도 손수무책이다.
“어쩔 수 없지.”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웠던 분위기가 어딘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온다.
“강제로 입을 여는 수밖에.”
“얘들아, 쳐라!”
헨리가 스태프를 휘두르는 순간 브랜든은 소리쳤다.
부상은 감수해야했다. 그런 각오도 없이 헨리를 칠 생각은 없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헨리가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이 부하들이 헨리를 에워싸 마무리한다. 이게 브랜든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처음부터 어그러지고 말았다.
“여긴··· 어디야?”
브랜든을 덮친 건 바람 칼날이 아니었다.
3구역 술집의 퀴퀴한 냄새는 사라지고 풋내가 풍겨왔다.
브랜든의 눈앞에는 푸르른 숲이 펼쳐졌고 상쾌한 숲의 바람이 두 뺨을 스쳤다.
“설마··· 순간이동?”
방금까지만 해도 3구역의 술집에 있던 브랜든은 칼리나르 외곽의 숲 속에 와있었다.
순간이동은 황실 마탑의 마법사들도 어려워하는 최고난도 마법이었다.
게다가 도시를 벗어날 정도의 거리. 대마법사가 환생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브랜든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순간.
서걱!
브랜든의 다리가 바람칼날에 잘려나갔다. 브랜든은 고통을 호소하며 그 자리에 넘어졌다.
이 정도 고통은 각오했었다. 헨리가 보통 놈은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부하들이 없는 지금, 브랜든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렸다.
어쩌면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공포의 근원이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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