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갓겜의 고향을 떠났다

“역시 고아 수집가가 네 후계자였군.”
소울 브링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부터가 수상했다. 안젤라의 말대로 대마법사의 후계자만 손댈 수 있는 물건이니까.
“혼자 마왕 봉인을 막으려 했던 것 같은데··· 날 안 부른 건 괘씸하네.”
안젤라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후계자가 무사하다는 안도감과 자신을 믿어주지 못했다는 서운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잖아. 결국 마나도 잃었고.”
일기장에 따르면 고아 수집가는 어떤 후유증으로 인해 마나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후계자의 역할을 못하게 됐다는 뜻. 안젤라를 불러 그 사실을 말하긴 쉽지 않았을 거다.
“충격이네. 내 후계자가 마나를 잃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격받은 안젤라는 곰곰이 전말을 유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충격받은 사람은 안젤라가 아니었다.
“카리나··· 이게 대체 무슨···”
언제나 냉정한 소피아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부모와 같은 사람이 대마법사의 후계자였고 자신은 100년 전 세상을 구한 용사의 후손이다. 놀랄 만하지.
고아 수집가의 계획을 요약하자면,
모종의 사건으로 고아 수집가는 봉인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100년 전 마왕을 물리친 용사의 후손을 이용해 마왕을 물리치려 했다.
그리고 그 후손이 소피아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용사의 검은 어디서 났는지, 무슨 일이 있었길래 마나를 잃은 건지.
의문점 투성이였다. 일기장에는 칼리나르에 도착한 후의 일만 적혀있으니.
“헨리 아저씨, 이게 다 무슨 소리에요? 카리나가 대마법사의 후계자라니···”
“그래, 대체 무슨 일이냐고. 얘가 용사의 후손이라고?”
안젤라가 원문 자체를 바꿔놓아 모두가 일기장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둘에게도 보여주라는 안젤라의 의도겠지.
이렇게 된 거 숨길 생각은 없다. 이미 이 둘은 나와 엮여버렸으니 내 말을 믿어주겠지.
나는 소울 브링어와 안젤라에 대해서 얘기해줬다.
“그러니까 네 옆에 대마법사의 영혼이 있다고?”
갈포드는 내 옆을 가리켰다. 안젤라는 거기 없었지만.
“네, 이것도 그래서 달라고 한 거예요.”
나는 영혼의 주머니를 꺼냈다. 갈포드가 내게 준 물건. 이것 덕에 안젤라를 상시 소환할 수 있다.
“이게 대마법사의 스태프인 건 어떻게 알았는데? 원래 마법도 못 썼다면서.”
“다 방법이 있어요. 영업 비밀입니다.”
감정 스킬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았다. 마법도 아닌 스킬에 대해서는 이해 못할 테니까.
“그럼 아저씨가 이제 대마법사의 후계자인 거에요? 카리나 대신?”
“그렇긴 하지. 그 사람이랑 달리 난 직접 마왕을 봉인할 거지만.”
지금은 안젤라의 힘을 빌려 겨우 마법사 행세나 하는 수준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봉인 마법을 배울 수준의 마법사가 될 거다. 원래의 후계자와 비교도 못할 마법사가.
“그럼 카리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소피아가 물었다.
어떻게라. 레이먼드는 내가 처리했으니 안전하긴 하겠지만, 다시 칼리나르로 오긴 힘들 거다. 칼리나르에는 레이먼드 말고도 고아 수집가를 노리는 놈들이 많을 테니.
“그건 왜 물어?”
“카리나··· 이런 이유로 절 구해준 건 몰랐지만 그래도 절 구해준 사람이에요. 거리에서 근근히 살아가던 저를···”
의도가 좋긴 했지만 결국 고아 수집가는 소피아를 이용하려 했다. 불쌍한 고아라 거둬준 게 아니라 용사의 후손이라 거둬준 거다. 그걸 몰랐으면 지금도 거리를 전전하고 있을 지도.
“그러니까 부탁할게요. 카리나 꼭 찾아주세요. 제가 도울게요. 카리나가 절 구해준 것처럼, 저도 카리나를 구하고 싶어요.”
그러나 소피아는 고아 수집가를 두둔했다. 의도가 어땠든 구해줬으니까. 하나뿐인 가족이 되어줬으니까.
고민됐다. 정말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고아 수집가를 찾는데 쓸 시간이 없었다.
마왕의 부활은 다가오고 나는 아직 봉인 마법을 배우지 못했다. 고아 수집가는 이제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을 거다.
“구해주자. 우리 입장에서도 고아 수집가는 무조건 찾아야 하니까.”
옆에서 듣던 안젤라가 단호히 말했다. 이미 생각을 마친 듯 진중했다.
“봉인 마법을 모른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거든. 어떻게 됐는지 알아야겠어.”
“봉인 마법은 너가 알려주는 거 아니었어?”
“그게 가능했으면 살아 생전에 가르쳐줬겠지. 내 시험을 다 통과하면 배울 수 있게 해뒀어. 후계자였다면 봉인 마법을 알고 있을 텐데··· 뭔가 이상해.”
“마나를 잃었잖아. 그래서 시험을 못 마쳤겠지.”
“그러니까 그것부터가 이상하다고. 내 시험 때문에 마나를 잃을 리가 없거든.”
소울 브링어를 알아보는 인재는 흔치 않다. 후계자 검증하겠다고 위험한 시험을 준비하진 않았을 것다.
“후계자 시험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
다른 말로는 지금 내가 후계자 시험을 통과해도, 봉인 마법을 배울 수 있는지는 미지수라는 말이다.
후계자 시험에 대해서 아는 건 제국 마탑과 고아 수집가. 제국 마탑에서 내게 순순히 알려줄리는 없으니 답은 고아 수집가한테 듣는 것 뿐이다.
“대마법사님이랑 얘기 끝났어요? 뭐래요?”
내 혼잣말을 듣던 소피아가 물었다. 이제는 다 아니까 목소리를 높인 탓이었다.
“구해줄게. 이쪽도 그 사람 찾을 이유가 있거든.”
“고마워요. 또 신세 지네요.”
소피아는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거절을 생각했던 내가 괜히 미워졌다.
그나저나 안젤라의 모습을 보게 할 방법도 찾아봐야겠다. 당분간 함께 다닐 테니.
“근데 어디로 갔을까요? 그런 건 안 적어뒀는데.”
“‘다른 대륙으로 가야지.’ 뻔하잖아. 제일 가까운 항구도시로 갔겠지.”
칼리나르는 내륙 지방이라 배가 오가지 않는다.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려면 가까운 항구도시로 가야한다. 칼리나르에서 제일 가까운 항구도시라면··· 브리턴이다.
정체를 감추고 밀항을 준비 중일 테니 찾기 쉽진 않겠지만 그건 거기서 생각하면 된다.
“그럼 내일 출발하자. 벌써 다른 대륙으로 갔을지도 모르니까.”
“잠깐. 조금 나중에 출발하면 안 되나?”
“왜 그래, 안젤라?”
“저 애 말이야, 이제 용사의 검법 알게 된 거지?”
“그렇겠지. 어떤 검법인지는 모르겠지만.”
“하긴 너도 모르겠구나. 100년 전 사람이니까.”
여기서 용사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건 100년 전에 직접 봤던 안젤라 뿐이다. 나조차도 용사가 어떤 루트를 탔는지 모르니까.
“용사를 곁에서 봐온 내가 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흘이면 충분해.”
내 마나량은 여전하다. 칼리나르에서야 그래봤자 깡패들이라 쉽게쉽게 해결했지만 다른 지역은 쉽지 않을 거다.
내 마나량을 늘리는 것 외의 선택지, 보디가드를 구한다. 그게 14살 여자애가 될 줄은 몰랐지만. 선택지가 늘어나면 좋으니까.
“알았어. 너랑 소피아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
앞으로 사흘동안 소피아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용사의 능력을 각성한다라. 원작의 팬으로써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
사흘 후 출발 직전, 갈포드는 내 멱살을 잡았다.
“이 미친 놈아! 도대체 뭘 한 거야!”
오늘 아침 칼리나르의 지배자 레이먼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자택의 숨겨진 방에서 발견됐다고. 역시 영원한 비밀은 없는 건가.
“정신 나갔냐? 레이먼드를 죽여?”
“그게 뭐 어때서요. 다 끝난 일 가지고 참.”
“다 끝난 일? 너야 다른 곳으로 가면 끝이지만 우린 어떡하라고. 레이먼드 부하들이 죽인 놈 찾겠다고 이잡듯이 뒤지고 있을 걸?”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뭐가 그럴 일 없어, 임마!”
“어차피 밑에 있던 놈들 다 돈 보고 따르던 놈들이잖아요. 이미 흩어진지 오래일 걸요?”
레이먼드가 칼리나르의 지배자지만 그건 무력에 관한 얘기가 아니었다. 사업수완은 좋지만 본인의 힘이나 세력은 강하지 않다.
부하들은 그저 돈으로 붙잡아뒀을 뿐. 이제 돈줄이 끊겼으니 다들 독립하거나 다른 놈한테 붙었을 거다.
“그러니까 애들이나 잘 보고 있어요. 고아 수집가만 찾으면 다시 올 거니까.”
“카리나. 이제 이름도 아는데 이름 불러요.”
옆에서 짐가방을 메고 있는 소피아가 소리쳤다.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네.
소피아는 사흘 동안 어딘가 분위기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그래봤자 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베테랑 기사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도대체 사흘 동안 애한테 뭘 가르친 거야.”
“나중에 보면 알아.”
안젤라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도 보면 안다니까. 각성에 성공하긴 했나보다.
그래도 무슨 능력인지, 전작의 팬으로써 너무 궁금했다.
“안젤라가 뭐 가르쳐줬어?”
“방금 들었잖아요. 나중에 보면 안다고요.”
죽도 잘 맞네. 소피아는 안젤라와 똑같이 대답했다.
[영혼 투시경]
[등급:희귀함]
[영혼을 볼 수 있는 안경. 목소리 또한 들을 수 있고 원한다면 특정 영혼만 볼 수 있다.]
영혼 투시경. 이것만 끼면 일반인도 안젤라의 영혼을 볼 수 있다.
“고마워요, 마커스. 덕분에 도움이 됐어요.”
“별 거 아니야. 이번에는 돈 내고 사갔잖아.”
영혼 투시경은 마커스의 전당포에 있던 물건이었다. 이전에 봐둔 물건인데 소피아에게는 꼭 필요하니까 이참에 샀다.
원래 가격의 반값도 안 냈으니 샀다기도 뭐하지만.
“이제 아예 가는 거야?”
“글쎄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다시 칼리나르로 돌아올지도 있겠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어쩌면 평생 못 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이라도 해야지.
“기회되면 올게요.”
여기가 진짜 고향도 아닌데 괜히 뭉클한 감정이 들었다. 몇 달이지만 정말 집 같은 곳이니까.
소피아도 고아원의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우는 애들도 있었지만 소피아는 능숙하게 아이들을 달래줬다.
마음의 준비는 소피아도 되어있다. 자기가 용사의 후손이란 걸 알게 된 후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겠지. 어린 애에겐 가혹한 시련이 오겠지만 소피아는 이겨낼 준비가 됐다.
“그럼 잘 있어요.”
“그래,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말고.”
나는 마커스와 짧은 포옹 후에 짐가방을 멨다. 소피아도 가방과 검을 챙겼다. 우리는 갈포드가 준비해준 브리턴 행 마차에 올라탔다.
처음 던전으로 떠나던 때가 떠올랐다. 그 땐 설렘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확신 뿐이었다.
고아 수집가를 찾고 내가 마왕을 봉인할 거란 확신 뿐.
***
그러나 브리턴에 도착하자마자 확신은 사라졌다.
“그 거지꼴한 여자? 누가 이미 잡아갔어. 현상금이 짭짤하던데.”
고아 수집가를 먼저 찾은 건 내가 아닌 현상금 사냥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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