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갓겜의 용병과 붙었다

“무례하시군요. 고작 그런 일로 저흴 부르신 겁니까?”
“무례 같은 걸 신경쓸 입장이 아니라서.”
검은 늑대의 용병과 나는 신경전을 벌였다. 자존심 센 것들한테 얕보였다간 아무것도 못 얻는 수가 있다. 기에서 밀리면 안 된다.
“의뢰인의 정보는 함부로 알려드릴 순 없습니다.”
그럼 그렇지. 의뢰인의 정보를 불지 않는다. 일반적인 용병단의 암묵적 룰이다. 이런 비밀 스런 용병단들은 더 하겠지.
“그럼 질문을 바꿔서, 왜 잡은 거야? 너희한테 2만 실링이 그리 큰 돈은 아닐 텐데.”
사람 하나 생포하는데 2만이면 거저먹는 거긴 하지만, 검은 늑대는 고귀하신 용병단. 자존심 상해서라도 그런 쉬운 일은 안 할 거다.
“그건 저희 내부 사정이라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있냐 없냐가 문제가 아니야.”
“무슨 말씀이신지?”
“그냥 말하라고. 뒤지기 싫으면.”
평소의 나와는 달리 세게 나갔다. 침착했던 용병의 인상이 조금씩 구겨졌다. 내가 무례하긴 하지만 이걸 원했거든.
그 잘난 자존심 뒤에 있는 본모습이 나오기를.
“저희 용병단을 잘 모르시나 봅니다?”
“그래봤자 용병이지. 뭘 대단하다고.”
“그렇게 보실 수도 있죠. 하지만 여기 북쪽 숲은 저희 영역입니다. 저희가 왜 여기서 의뢰를 받겠습니까?”
그 순간 사방에서 검은 갑옷을 입은 용병들이 튀어나왔다. 이미 무기를 뽑은 상태. 용병들은 순식간에 우리를 에워쌌다.
“여긴 저희 구역입니다. 당신 하나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모른단 겁니다.”
나와 대화하던 놈도 무기를 꺼내들었다. 소피아도 경계심을 세우며 검을 뽑았다.
상대는 여섯. 하지만 얼마나 더 숨어있을 지는 미지수.
지금이라도 물러나는게 맞다.
검은 늑대 용병단이 전멸하고 싶지 않으면.
“말 못하겠으면 강제로 여는 수밖에.”
나는 온몸의 마나를 전부 끌어모았다. 누구 하나 당한다고 꼬리내릴 놈들도 아니니. 일격에 끝내야 했다.
고위 마법 ‘대폭발‘. 주변 일대를 폐허로 만들어버리는 강력한 파괴마법.
시전 후에 뻗어버리겠지만 소피아가 있으니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자갈돌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소피아도 내 의중을 눈치챘는지 휩쓸리지 않게 내 옆으로 붙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용병이 당황하며 외쳤다.
“부단장! 저놈 쓰려는 마법, 수상한데 도망칠까요?”
“뭔 개소리야! 쓰기 전에 조지면 돼!”
나와 대화하던 용병은 내게 달려들었다. 저 놈이 부단장이었나. 부단장 치곤 상황 판단력이 좋지 않군.
미안하지만 이미 준비는 끝났다. 이미 주변을 초토화시키기엔 충분한 상태.
나머지는 내 결단에 달렸다.
솔직히 위협만 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나오면 나도 빨리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이야야야!”
텁, 휘익!
대폭발을 시전하려는 순간, 누군가 기세 좋게 달려든 부단장의 뒷덜미를 잡아 뒤로 던졌다. 부단장은 보기 좋게 나자빠졌다.
“멍청한 놈. 부단장이란 놈이 대폭발도 못 알아봐?”
부단장을 던진 건 거구의 남성이었다. 나보다도 머리 두 개는 컸고 어깨가 하나는 더 넓었다. 검은 가죽 갑옷을 보아 검은 늑대의 일원이었다.
“단장님!”
“무기 거둬. 어차피 너희가 못 이길 상대야.”
용병들은 무기를 거뒀다. 단장은 고갯짓으로 자기 부하들을 돌려보냈다. 용병들은 넘어진 부단장을 챙겨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상황 정리를 마친 단장은 내게 허리 숙여 사과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애들이 좀 과격해서.”
“아뇨, 저야말로 먼저 시작해서 죄송합니다.”
나도 고개 숙여 사과했다. 반은 진심이었다. 그야 이렇게라도 안 했으면 내 얘기를 귓등으로도 안 들었을 테니까. 나도 자존심 좀 세울 필요가 있었다.
“이 근방 분은 아니신가 봅니다? 브리턴에서 대폭발을 쓸만한 마법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제가 타지 사람이라. 누굴 찾느라 왔거든요.”
“카리나 로웬델 말입니까?”
“다 들으셨나봐요?”
“목적이 뭡니까? 그녀를 찾는 목적.”
“알려드려야 하나요?”
“말씀해주셔야 저희가 왜 그녀를 잡았는지 말씀해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가 외부인한테는 조금 조심스러운지라.”
“얘 엄마라서요.”
“에?”
나는 소피아를 가리켰다. 소피아는 당황하며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실 엄마 맞잖아. 밥 먹이고 키워줬으니까.
“그런 것치곤 애가 좀 큰데···”
“나이가 뭐가 중요합니까? 엄마 찾으러 타지로 온 불쌍한 애 안 보이세요?”
소피아는 멀뚱멀뚱 서있기만 했다. 나는 옆구리를 찔러 눈치를 줬다.
“아··· 그 엄마 보고 싶어요.”
그냥 내비둘 걸 그랬나. 소피아의 어설픈 연기를 본 단장은 호탕하게 웃어재꼈다.
“하하하! 따님이 연기를 참 못하시네요.”
그럼 그렇지. 이렇게 뻔한 거짓말에 속을 리가 없지.
“딸이라고 한 것부터가 뻔했어.”
나도 알아, 안젤라.
“그래도 완전 틀린 말은 아니시네요. 고아 수집가가 키우던 애니까, 어떻게 보면 딸이 맞네요.”
고아 수집가라는 이명을 알고 있다고? 그 얘긴 단순히 돈 때문에 고아 수집가를 사로잡았다는 게 아니라는 뜻.
이미 고아 수집가, 아니 카리나 로웬델에 대해 알고 있던 건가.
“칼리나르의 고아 수집가, 카리나 로웬델. 제국 마탑 출신으로 마탑의 보물을 훔친 도둑년. 맞죠?”
“도둑년이라뇨! 카리나가 그런 짓을···”
“아가씨, 장담할 수 있어?”
“뭘요?”
“카리나 로웬델이 진짜 도둑이 아니라는 증거는? 칼리나르에 오기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소피아는 아무 말도 못했다. 소피아가 봐온 고아 수집가는 다정한 모습이었지만, 그전의 모습은 모른다.
제국 마탑 시절의 카리나 로웬델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다.
물론 도둑질이란 건 제국 마탑에서 씌운 누명같지만.
“제국 마탑이 하는 말을 전부 믿는 겁니까?”
확실한 건 하나. 카리나 로웬델은 안젤라의 후계자다. 증거는 소울 브링어고.
제국 마탑은 대마법사의 후계자에게도 중요한 존재다. 비록 마나를 잃었다지만 마왕 부활에 관해 아는 유일한 집단이니까.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유지할 법도 한데 이런 누명을 씌워 사로잡다니. 제국 마탑에서 구린내가 난다.
“아뇨, 그놈들 음흉한 거야 당연히 알고 있죠. 뒷꽁무니가 잡힐까봐 현상수배라는 대외적 명분까지 저희에게 강요했으니까요. 다만···”
“다만?”
“저희도 그년한테 갚아줄 게 있었거든요. 그년 때문에···”
단장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갔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세. 나와 소피아는 혹시 몰라 뒤로 떨어졌다.
“아무튼 그런 이유라면 정보를 알려드릴 수는 없겠네요. 죄송합니다.”
단장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쫓지는 않았다. 이미 감정적으로 격양된 상태다. 불필요한 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카리나라는 애, 대체 뭘하고 다닌 거야? 후계자 시험만 봤다면 그럴 일은 없는데.”
“무슨 소리야?”
“후계자 시험 때문에 누구한테 원한 살 일은 없다고. 철저히 후계자 한 명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 준비했단 말이야.”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문제들은 아니었다는 말. 검은 늑대 단장이 원한을 살 일은 없었을 거란 말이다.
후계자 시험이 정상적으로 치러졌다면.
대마법사의 후계자는 마나를 잃고, 용병단 단장은 그 후계자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 게다가 제국 마탑은 후계자에게 누명을 씌워 쫓고 있다.
모든 문제의 시작은 거기서부터다.
***
“단장님, 오셨습니까!”
검은 늑대 용병단 단장 아킬은 부하들의 인사를 받으며 산채로 들어섰다. 벌써 2년 동안 사용 중인 산채였다.
통나무로 세워둔 목책, 열댓 개 되는 주거용 천막. 허술하지만 상관 없었다. 거주자가 허술하지 않으니까.
“부단장 어딨어?”
“지금 단장님 천막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킬은 산채 중앙에 있는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단장의 천막이지만 내부는 초라했다. 간이 침대와 옷가지, 그리고 응접용 테이블과 무기 정도. 원체 소탈한 성격 탓이었다.
부단장 레온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있었다. 아까의 일 때문에 경직되어 있었다.
“야, 긴장 풀어. 잔소리할 거 아니니까.”
그래도 레온의 몸은 굳어있었다. 하기야 아까 너무 갈궜지. 아킬은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까 그 여자애 있잖아, 마법사랑 있던. 카리나가 키우던 애더군.”
“칼리나르에서 말입니까?”
“그래, 키랑 얼굴 보니 맞는 것 같아.”
칼리나르의 정보원에게서 들은 인상착의와 비슷한 여자애였다.
2년 전 카리나가 칼리나르로 숨은 후로 지역 정보원을 통해 계속 추적해왔다. 남의 구역에서 날뛰었다간 지역간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설마···”
“그냥 놔줬어.”
“카리나 그년 찾는 놈들이면 정리하는게 좋지 않습니까?”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봤잖아, 그 마법사.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야.”
카리나를 쫓는 마법사. 처음 보는 녀석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강자였다. 아킬이 상대할 수 없을 만큼.
아킬 역시 자기 실력을 자부하는 용병이었지만 그 사람은 수준이 달랐다. 일개 용병이 혼자 상대할 놈은 아니다.
“그런 마법사가 괜히 뒤를 파고다니면 골치아파질 텐데요.”
“괜찮아. 카리나는 이미 마탑에 넘겼고 현상금이라는 대외적 명분도 있었어. 우리가 깊게 연결돼있다는 증거는 없어.”
이미 끝난 일이다. 뒤를 파고 싶어도 나올 껀덕지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애꿏은 사람 건드렸다간 법의 심판을 받을 테니.
“그나저나 의외였습니다, 단장. 카리나 그년한테 아무 짓도 안 하고 그냥 보내다니.”
“내가 뭘 했어야 했나?”
“손을 자르든 뭐든 했어야죠! 2년 전 우리가 당한 일 잊으셨습니까?”
레온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까의 경직은 사라지고 흥분만 남아있었다. 반면에 아킬은 감정을 비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걸 어떻게 잊어.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그냥 더 복수할 필요를 못 느낀 거야.”
“복수할 필요?”
“너야말로 2년 전 제대로 기억 못하나 보네. 그년 죗값은 그 때 치렀어. 난 그걸로 충분해. 마탑 놈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지만.”
“단장님도 참··· 너무 유하다니까. 그럼 가보겠습니다.”
레온은 천막을 나섰다. 아킬은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상념에 빠졌다. 2년 전 그 일에 대해서.
“내가 유하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예나 지금이나 유하다 못해 우유부단한 놈이니.”
***
“첫 번째 후계자 시험. 어디서 이뤄졌어?”
나는 일행과 함께 여관으로 돌아왔다. 숲에 더 있어봤자 건질 건 없었다. 심증만으로 처들어갈 수는 없고, 그럴 수도 없으니까.
검은 늑대의 명성은 전부 단장이 올려놓은 것 같다. 그 짧은 사이 내 마법을 알아채고 제지하다니. 보통 실력, 보통 강단이 아니다.
“이 근처에 내가 만든 미궁이 있어. 거길 통과하는게 첫 시험이었어.”
이 세계에서도 미궁은 난이도 높은 던전 취급받는다. 마물, 함정 등을 제외하고도 일단 길찾기가 힘드니까. 자칫하면 평생 갇힌 채 늙어죽을 수도 있는 곳이 미궁이다.
근데 미궁이라···
“대마법사 후계자한테는 너무 쉬운 시련 아닌가?”
대마법사의 후계자, 카리나 로웬델은 비범한 마법사였을 거다.
나만 해도 조잡한 마법으로 삼엄한 저택 경비를 뚫은 적이 있는데, 그만한 마법사한테 미궁 하나? 거의 산책길 수준이다.
“그야 첫 시험이니까. 혼자 치르는 시험이라 쉬운 걸로 준비했다고.”
“혼자 치른다고? 그럼 대체 왜 검은 늑대 놈들의 원한을 산 거지?”
“글쎄? 시험 치르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 후일수도 있고.”
그럴지도 모르지만 카리나 로웬델은 첫 번째 시험 이후로 변했다. 마나도 잃고 마탑에서 쫓기고 후계자 자리도 내려놓고. 분명 그 때 뭔가 잘못됐다.
“그럼 안내해줘. 지금 바로 간다.”
“지금? 곧 있으면 밤이야.”
“지체할 시간 없어. 제국 마탑에 이미 잡혀간 이상 어떻게 됐을지 모르니까.”
제국 마탑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미치광이 마법사들만 모인다는 건 안다. 그런 마탑에서 수배해서 찾은 인물이니. 서두르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
“준비됐어요. 가요.”
소피아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준비를 마쳤다. 나도 금방 준비를 마치고 여관을 나섰다. 우리는 안젤라의 안내에 따라 미궁으로 갔다.
“대체 뭐가···”
그러나 우릴 맞이한 건 후계자 시험용 미궁이 아니었다.
미궁에서 안젤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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