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갓겜의 사지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소울 브링어를 집었다.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젤라가 돌아오지 않은 탓이었다.
원래라면 안젤라의 힘을 빌릴 생각이었지만, 차선책을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나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피를 흘리며 쓰러진 루나가 혼잣말했다. 무방비 상태로 수십 개의 바람 칼날에 얻어맞았으니 곧 운명을 달리할 거다.
당연히 수리와 함께 마나를 감추는 조작도 해두었다. 기한은 작동 후 단 10분. 어차피 10분 안에 끝을 볼 생각이었으니 충분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이제 곧 경비들이···”
그 순간 경보음이 복도에 울려퍼졌다.
<침입자 경보! 현재 지하 23층에서 침입자 발견. 필수 인력 제외 모두 대피 후 경비대 전원 출동 바람.>
앞으로 5분. 5분 안에 제국 마탑 경비대가 들이닥칠 거다. 전원이 마공학 무기와 보호 마법으로 무장한 경비대. 맞닥뜨리면 끝장이다.
“아킬, 잠깐 부탁할게요.”
“서둘러. 마주치면 끝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카리나의 감옥으로 향했다. 이미 소피아가 카리나의 몸상태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얼핏봐도 좋지 않았다. 오랜 도망자 신세 때문에 피부병이 심했고 기력도 쇠해 삐쩍 마른 상태였다.
감옥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마법의 흔적. 감각 제어였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갇혀있었을 테니 정신건강도 취약해졌을 터다.
소피아는 카리나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카리나, 저 소피아에요. 좀 일어나봐요!”
“소피아···?”
다행이도 의식은 멀쩡했다. 눈이 좀 흐리멍텅했지만 말은 똑바로 했다.
소피아는 카리나를 껴안았다. 카리나의 꼴이 말이 아닌데도 해맑게 웃었다. 내가 본 소피아 중에서 가장 밝은 모습이었다.
얼떨떨해하던 카리나는 소피아의 품안에 있다가 문뜩 주변을 살폈다.
“여긴 어떻게 왔어? 너가 있을 곳이 아니야. 얼른···”
“괜찮아요. 이제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으니까.”
소피아는 용사의 검을 뽑아 보여줬다. 카리나의 집에 있을 때랑은 조금 다른 모습. 소피아의 각성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어떻게··· 내가 알려준 적 없었을 텐데···”
소피아는 대답 대신 나를 가리켰다. 카리나는 곧바로 내 얼굴을 알아봤다.
“그 때 그 감정사···”
“이것도 알아봤는데 검 하나쯤이야 껌이죠.”
나는 소울 브링어를 보였다. 카리나는 일어나 소울 브링어를 집었다.
“안젤라를 불렀군요. 어떻게 거기까지···”
잠깐 사이 카리나는 소울 브링어가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아냈다. 역시 전직 대마법사 후계자는 다르다는 건가.
“제가 보는 눈이 조금 남달라서.”
“그럼 일기장도 보신 거군요. 여기까지 왔다면···”
“물론입니다.”
카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과오가 적힌 일기장. 그 일기장을 자신을 믿었던 안젤라가 읽었다.
“한심하죠? 대마법사의 후계자가 이런 꼴이라니···”
한심할지도. 카리나가 조금 더 똑똑했다면 제국 마탑에게 배신당할리도 없었겠지. 그러나.
“저보다는 아니라서.”
마나도 없고 마법도 모르는 나는 그런 수준도 되지 못하니까. 그런 책임을 짊어질 위치까지 가지도 못했으니까.
누구나 삶의 무게는 다른 법이다. 카리나의 삶이 남들보다 너무 무거웠을 뿐이다.
“푸념은 나중에 듣고 일단 나갑시다.”
“그래요. 일단··· 윽!”
카리나는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아직 거동도 무리인가.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긴 하지만.
“제가 업고 갈게요.”
한 명 한 명이 중요한 상황인데 소피아가 카리나를 들쳐멤으로써 전투 인원은 나와 아킬 두 명이 됐다.
안젤라라도 있었으면 나 혼자 충분했을 텐데. 일단 둘이서 해보는 수밖에 없나.
띵!
망할. 복도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마탄이 날아왔다.
쾅!
자욱한 연기. 나는 맞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시야부터 확보해야했다. 가디언 코어의 마나로 약한 바람 칼날을 사용했다.
카리나 무사. 소피아 무사. 아킬··· 무사.
“이 정도는 거뜬하지.”
아킬은 마탄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팔뚝에 작은 생채기만 났을 뿐,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맷집. 과연 내 대폭발에도 쫄지 않고 달려들더니.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구만.
“내가 앞장설 테니 뒤에서 처리해줘!”
아킬은 너클을 끼고 경비대를 향해 돌진했다. 쏟아지는 마탄을 방어하며 금세 경비대 코앞까지 도달했다.
경비대는 급히 곤봉을 꺼냈다. 그러나 근접에서 아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킬은 홀로 경비대의 진영을 깨부쉈다.
과연 브리턴 최고의 용병단 단장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었다.
그러나 저것도 잠시 뿐. 척봐도 엄청난 체력을 소모하는 중이었다.
나는 가디언 코어의 마나를 끌어모았다. 가디언 코어에 충전된 마나, 수도 없이 써온 기초 마법, 선천적으로 뛰어난 속성 감응.
그 모든 것이 맞아 떨어져 거대한 바람 칼날이 완성됐다.
“피해!”
아킬은 내 소리를 듣고 옆으로 비켜섰다. 거대 바람 칼날이 아킬이 서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마치 검기와 같은 바람 칼날. 미처 피하지 못한 경비대는 그대로 반이 갈라져버렸다. 그나마 적게 다친 사람이 팔 하나 잘린 수준이었다.
“지금이야!”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진형이 무너지고 전력이 약해진 지금. 나와 소피아는 단숨에 복도를 가로질렀다. 엘리베이터를 잡아둔 아킬은 우리가 타자마자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자마자 폭음이 들려왔지만 문은 부숴지지 않았다.
“긴장 놓지마. 1층에도 있을 거야.”
“그래도 아까보단 적을걸요. 분명 방심했을 테니까.”
.
다른 놈들도 아니고 오만한 제국 마탑 놈들이니까.
놈들은 우리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 나와 소피아는 아예 모르는 인물. 아킬의 무력에 대해선 알겠지만 자기네들이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결계 밖으로만 나가면 우리 애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거기까지만 가면 진짜 끝이라고.”
용병들의 무력은 경비대와 비슷한 수준. 물론 각종 보안장치가 가득한 마탑 내부에서는 불리하겠지만, 외부에서는 비등비등하다.
즉 마탑만 나가면 우리에게도 승산은 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췄다. 문이 열리는 순간 우리는 곧장 앞으로 치고 나갔다.
경비대가 방패를 들고 우리를 에워쌌다. 그러나 아킬의 돌진에 틈이 생겼고 우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잡아라!”
마탑 경비대는 마탑을 지키는데 특화된 군인들. 기동력은 조금 떨어지기에 우리의 속도를 쫓아올 수 없었다.
마법사인 내가 구멍이었지만 아킬과 소피아가 조금씩 밀어준 덕분에 뒤처지지 않았다.
쾅!
마탑 출입문을 박차고 나오자 저 멀리 용병단이 보였다. 저기까지만 가면 끝이다.
문제는 결계였다. 마탑을 둘러싼 결계가 견고했다는 점. 단순 무력으로는 뚫을 수 없었다.
“헨리! 어떻게든 해봐요!”
소피아가 재촉했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바람 칼날따위로 부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킬은 뒤에서 날아오는 마탄을 막아줬다.
“얼마 못 버텨! 서둘러!”
용병단들이 다가와 결계를 부수려했지만 소용없었다.
어쩔 수 없나. 위험하지만 마인화를 시도해서라도···
“늦어서 미안.”
그 순간 하늘에 포탈이 열리더니 안젤라가 튀어나왔다. 안젤라는 사흘 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표정은 심각했다.
“왜 이리 늦었어!”
“미안, 생각보다 일이 길어져서.”
안젤라는 대충 사과했다.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어떤 사실을 듣고왔든 격양된 목소리로 들떠 말할 인물인데. 지금은 진지했다.
“카리나 로웬델이 얘야?”
안젤라는 소피아 등에 업힌 카리나를 가리켰다. 언짢은 표정. 후계자인데 자길 부르지도 않았으니 그럴 만하다.
“죄송합니다, 그럴만한 사정이···”
“알고 있어. 전부 듣고 왔으니까.”
안젤라는 금방 시선을 거두고 눈앞의 적에게 집중했다. 알고 있다니. 카리나가 소울 브링어로 자길 부르지 않은 이유를.
‘뭘 알아낸 거냐.’
당장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일단 도망치는게 우선이었다. 안젤라가 돌아온 지금, 식은죽 먹기지만.
“다시 마탑으로 들어가야해.”
그러나 안젤라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다시 마탑으로? 겨우 포위망을 뚫었는데? 아킬의 체력은 이제 한계다. 이런 탈출극을 다시 하는 건 불가능.
“저 안에 족쳐야할 놈이 있거든.”
“누구?”
“마족 군단 군단장.”
“뭔 개소리야?”
“자세한 건 가면서 말할게.”
안젤라에게서 평소의 장난기가 보이지 않았다. 대마법사도 긴장하는 순간.
마족 군단장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마왕이 봉인되며 마족들도 다시 마계로 추방당했을 텐데.
다른 곳도 아니고 제국의 수족인 제국 마탑에 숨어있다니. 머리로는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방금 제국 마탑을 뒤집어놓고 탈출했다. 지금 상황 역시 머리로 믿기 힘든 상황.
“아킬, 카리나를 부탁해요.”
아킬은 소피아에게 업혀있던 카리나를 들쳐맸다. 순간 빈틈이 생기면서 경비대가 발사한 마탑이 날아왔다.
팡!
나는 안젤라의 힘을 빌려 보호막을 전개했다. 마탄은 내 보호막에 흠집도 내지 못했다. 가디언의 코어 덕에 마나 부담도 없었다.
“아킬은 카리나를 데리고 도망가요. 소피아는 나랑 다시 들어간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곧바로 작은 포탈을 열었다. 포탈은 결계 밖으로 이어져있었다.
“포탈로 들어가게해선 안 돼!”
경비대는 도망치는 아킬을 제지하려고 달려들었다. 힘의 균형이 무너진 것도 모르고.
나는 전개한 보호막으로 경비대를 밀어냈다. 달려오던 경비대는 제 속도를 주체 못했다. 보호막에 가로막힌 경비대는 그대로 자기 진영까지 튕겨났다.
아킬은 그 사이 포탈을 통과해 용병단과 합류했다. 결계 안에는 나와 소피아, 안젤라 뿐. 휩쓸릴 사람은 없었다.
나는 온몸의 마나를 끌어모았다. 저번과 달리 마나에 여유가 있었다.
“조심해! 대폭발이다!”
그러나 저번과 달리 마음에는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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