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토끼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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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시크니
작품등록일 :
2022.05.1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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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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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다시 토끼를 만나다.

잃어버린 기억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DUMMY

#38. 다시 토끼를 만나다.





~너흰 선택하지 못하는 것을 선택해야 할 거야.~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 했지만,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점점 더 모를 뿐이다.


“일단 희성을 보여줘. 선택이든 뭐든 그때 해주겠어.”


뱀이 웃었다.

마치 하찮은 존재의 재롱을 보는 듯 가소로운 표정이다.


~좋아, 어차피 만나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너희의 고통은 그 아이를 만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될 거야. 그 아이는 너희의 추악한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니깐..~


그때, 줄곧 잠자코 있던 민주가 우리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안 돼요. 우리 그냥 돌아가요. 어차피 희성이는 죽었잖아요. 아직은 돌아갈 수 있어요. 네? 엄마, 우리 돌아가요. 돌아가서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아요. 다 잊어요. 내가 잘할게요.”


짝.

그때, 효숙이 민주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민주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엄마.”

“넌··· 언제나 그랬지. 민주야 언제 까지나 도망갈 순 없어.”

“······.”


효숙은 복잡한 얼굴로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고, 민주도 고개를 떨군 채다.


~나약한 인간들. 벌써 시작했군. 자, 나를 따라라. 그렇게 보고 싶다 던 걸 보여주마.~



뱀은 태양의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뱀의 그림자는 거대했다. 마치 땅의 끝까지 닿을 듯 길게 늘어져 있었다.


시계를 꺼내보았다.

남은 시간은 채 두 시간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 초조함이 밀려왔다.

효숙도 초조해 보인다. 우리는 함께 걸었고 민주는 한참이나 떨어져 따라왔다.

셋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순간 순식간에 뱀의 모습이 사라지고, 초원이 펼쳐졌다.

얼른 달려가 꽃을 만져보았다. 진짜다.

풀과 꽃의 질감이며 향기까지 모두가 생생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쉬운 것을, 그저 망각의 세계에서 상상만 하면 되는 것을. 이게 다 인 것을.~


뱀의 말처럼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있었다.

새가 울고 야생 동물이 뛰어다닐 것 같다.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점점 더 알 수 없는 지경이다.



그리고, 저 멀리 희성의 모습이 보였다.



효숙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늘 보고 싶던 얼굴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녀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 역시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진짜 저곳에 희성이 있다.

다만 의자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의식이 없는 상태인 듯했다.


하지만 분명히 희성이다. 떠나던 그 모습 그대로다.

160센티, 아담한 체구와, 잠든 채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앞니까지.

여자는 여전히 토끼를 닮았다.


효숙을 일으켜 세워 희성을 향해 함께 걸었다.

풀을 밟는 느낌, 흙의 질감까지 생생하다.

효숙은 아플 정도로 내 손을 잡은 채, 한발 한발 딸을 향해 걸어갔다.

손만 뻗으면 되는 거리에 자신의 모든 것이던 존재가 있었다.


‘어?’


그런데 무언가가 막고 있다.

분명 가로막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닿을 수가 없다.

희성의 몸에서 늘 나던 비누향을 맡았다.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다.

효숙이 절규하며 손을 휘저었다.


“희성아, 눈 떠봐. 엄마가 왔어, 어서. 희성아, 엄마야.”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효숙의 어깨를 감싸며, 보이지 않는 뱀 에게 소리 질렀다.


~순진하군, 쉬울 거라 생각했다니. 어리석군.~


뱀의 조롱 섞인 음성이 들렸다.


“제발요, 제발 딸에게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한 번만 안아 보면 돼요. 한 번만요.”


~그래, 알았다. 하지만 후회할 거야. 모든 걸 기억하기 위해, 모든 걸 잊게 될 거야. 잃어버리게 될 거야.~


꽃밭이 사라졌다.

다시 황폐한 사막이 펼쳐 쳤다. 우리는 마치 꿈에서 깬 듯했다.

우리를 막고 있던 보이지 않던 장막도 사라지고 없었다.

효숙은 달려가 희성을 안았다. 볼을 만져 보았다. 분명 온기가 느껴진다. 살아있다.

효숙은 밀랍인형을 다루듯 천천히 그녀를 안아 내렸다.

혹시나 다치게 할까 흔들어 깨우지도 못했다.


나는 옆에 서서 그런 희성과 효숙을 보았다.


동그란 얼굴에 단정한 눈썹, 쌍꺼풀 있는 큰 눈과 약간 작은 듯 오뚝한 코.

그대로다. 나 역시 희성을 만지고 싶었다.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효숙을 방해할 수 없었다.


민주도 어느덧 옆에 다가왔지만, 희성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희성아.”


나는 가만히 희성의 이름을 불렀다.


응답하듯, 희성이 눈을 떴다.





『푸코 씨, 에너지의 공급이 고르지 못해. 이대로라면 배추가 전부 전멸할 거야. 몇 시간도 못 버텨. 집중해줘. 그렇지 않으면 저장된 기억도 모두 우주로 흩어져 버릴 거야.』


현장에서는 시 시각가 직원들의 연락이 도착했다.

뱀의 소용돌이로 인해 배리어의 상당 부분이 손상된 상태였다.

대기가 없는 달의 기온은 태양 빛을 받지 못하면,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져 버린다.

달에서 영하의 개념은 10 단위가 아니었기에, 슈트를 입었다 해도 오래 버티기가 힘들다.

아직은 아무도 자리를 이탈하지 않았다.

모두가 배추밭을 덮고 있는 배리어를 복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모두가 목숨을 걸고 있었다.

대부분 다른 민족, 다른 종족이긴 했지만 단단한 신념으로 묶여 있었다.

이들을 희생시킬 순 없어. 그리고 우주의 기억이 소멸하는 건···.

지금 내가 지금 뭘 하는 걸까.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 걸까. 나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이제껏 그의 삶은 배추밭을 지켜 내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조로부터 지켜온 소중한 배추밭이었다.

그것을 자신이 망칠 수는 없기에 고민이 되었다.

또한, 기억 재생자로써 계약자와의 약속도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 그 자체였다. 지구의 생명.

선조가 달을 죽였듯, 지금 자신의 욕심이 지구를 죽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배추밭이나 기억이 아닌,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을 망각했다.


그때 무전이 들려왔다.


『푸코 씨, 배추밭이 이상해. 당장 현장으로 와줘. 에너지 공급이 중요한 게 아니야. 이건 내 권한 밖이야··· 어서 와서 결정해 줘. 거대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어.』


책임자인 바투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좀 이상하다. 분명 촌각을 다투는 상황일 텐데, 그의 목소리는 다급하거나 공포에 휩싸인 것이 아닌, 환희에 차 있는 느낌이다.

타이탄 행성 출신 바투는, 푸코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현장의 말을 믿는 게 맞다.

혼자 결정할 수 없을 땐 동료를 믿어야 한다.

푸코는 쥐고 있던 스틱을 놓았다. 급격하던 에너지 소모가 줄어들었다.

한결 사고의 전환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푸코는 먼저 지구의 상황을 체크했다. 생각했던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달은 이미 반 이상 회전한 상태다. 그리고 한동안 관성에 의한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다.

지구의 해수면은 이미 1미터가량 높아져 있었다.

이 정도의 상승이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막대한 수준이다.

방글라데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아시아의 피해가 컸고, 유럽에서는 네덜란드, 이탈리아등 바다와 밀접한 도시는 꽤 많은 지역이 물에 잠겼다.

부산도 해운대 광안리 등의 피해가 심각했고, 일본에선 후지산의 화산이 폭발했다.

달, 지구 모든 상황이 최악이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욕심 때문인 것 같았다.

푸코는 처참한 마음으로 후회했지만, 지금은 추가 피해를 막는 것이 더 중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배추밭으로 급히 내려갔다.

바투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투, 어떻게 된 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에너지 공급을 중지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겠지?”

“푸코, 배추들을 봐. 이런 걸 본 적 있어?”


그러고 보니 온도가 하강하지 않았다.

에너지 공급이 멈추면 급격한 하락을 예상했는데, 오히려 훈훈하다 싶을 정도의 온도가 유지된다. 마치 봄 같다. 더 놀라운 건 배추의 상태였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푸코가 도착한 걸 기다린 듯, 수천만 포기의 배추에서 일제히 빛이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푸코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바투, 텔레포트를 준비하게나. 잠시 후 내가 떠나면, 이곳의 지휘는 자네가 맡게. 어쩌면 우리는 오늘을 위해 준비해 온 것 인지도 몰라. 내 신호를 기다리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알겠어, 준비할게.”


푸코는, 일생일대의 순간이 다가온 것을 직감했다.


오랜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순간이다.




필요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다만 이 곳이 아닐 뿐. 의외로 달에 취직하러 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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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45. 새로운 여행 22.10.14 23 1 10쪽
45 #44. 아름다운 사람 22.10.07 22 0 10쪽
44 #43. 내게도 다시 사랑이 22.10.01 33 0 10쪽
43 #42. 일상 속으로 22.09.16 31 0 10쪽
42 #41. 또다시 이별 22.09.09 34 1 10쪽
41 #40. 신이 되려던 자 22.09.02 32 0 10쪽
40 #39. 나를 기억해줘 22.08.26 29 0 10쪽
» #38. 다시 토끼를 만나다. 22.08.19 35 0 9쪽
38 #37. 뱀의 시간 22.08.12 31 0 10쪽
37 #36화. 뱀과의 조우 22.08.05 32 0 10쪽
36 #35화 세 개의 문. 2 22.07.29 31 0 10쪽
35 #34화. 세 개의 문. 1 22.07.22 32 0 10쪽
34 #33화. 끝나지 않는 시험 22.07.15 29 0 10쪽
33 #32. 생명의 나무 22.07.08 34 0 10쪽
32 #31. 뱀의 몸속 22.06.30 37 0 10쪽
31 #30. 뱀의 몸속 22.06.19 37 0 10쪽
30 #29. 검은 소용돌이를 향하여 22.06.19 32 0 10쪽
29 #28. 달기지 도착 22.06.19 33 0 10쪽
28 #27. 버스를 타고 달로 출발 22.06.19 35 0 12쪽
27 #26. 창우의 기억. 3 22.06.16 33 1 10쪽
26 #25. 창우의 기억. 2 22.06.14 33 0 10쪽
25 #24. 창우의 기억. 1 22.06.12 36 1 11쪽
24 #23. 달 그리고 뱀 22.06.09 33 0 11쪽
23 #22. 새로운 사랑과 옛 기억의 잔상 22.06.07 36 0 12쪽
22 #21. 사라져도 슬프지 않은 것들 22.06.07 33 0 10쪽
21 #20. 희성의 기억. 2 22.05.30 35 1 10쪽
20 #19. 희성의 기억-1 22.05.27 39 1 10쪽
19 #18. 희성의 집 그리고 꿈 22.05.25 48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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