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화. 떨어지는 꽃 속에 홀로 서다(落花人獨立) 2
악몽을 꾸자마자 알아채서 깨어나면, 매사가 순탄하다. 문제는 알아채지 못해,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다. 매사는 꼬여지고 주변은 한바탕 격랑을 겪어야 한다.
상야가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았으니, 뒤탈도 그런 뒤탈이 없을 수가 없었다.
“호! 쌍햐! 뭐라는 거시냐? 너 씰룩이는 볼따구니를 보니 꼭 양갓집 규수가 심통 부리는 것과 같구나. 스승님이 그리 출가(出家)를 반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거역하고 머리를 박박 밀어버리더니, 법명까지 스스로 달아? 적영? 웃기네! 고요한 그림자? 빌어먹을,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
이상하게도 주기적으로 악몽을 꾸는 적천이었다.
물론 그는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나름대로 극복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바 있다.
악몽을 꾸자마자 즉시 알아채서 깨어나는 방편인데, 일단 깨어나면 다시 눕지 않고, 아침까지 쭉 수행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적천은 가끔 악몽꾸는 걸 옹호하기도 했다.
”악몽을 꾸면 좋지 않지만···, 어찌 보면 이게 수행을 더욱더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야!“
그랬던 그가 어젯밤은 달랐다.
종일토록 걸어온 여독 때문에, 악몽을 알아채서 헤쳐나오기는커녕, 밤새 악몽에 시달리면서 여분의 수행마저 놓쳐 버리고 만 것이다.
적천이 기둥 모서리에 대갈통을 마구 박아버리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데, 사매인 적상야가 기름에 불을 붙였던 것.
"야! 그 출중한 미색으로 얼른 시집이나 가면 될 일을··· 여자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출가했단 말이냐! 아직 늦지 않았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번듯한 사내와 혼인해서, 아들딸 줄줄이 낳고 행복하게 살면··· 그게 바로 너의 극락이니라. 너같이 어여쁜 여인이 이게 무슨 개고생이란 말이냐?"
이래저래 약이 오르던 차, 적천은 상야가 가장 싫어하는 말들만 골라서 지청구를 날렸다.
"사, 사형은 정말이지···!"
상야가 기가 막히는지 입을 딱 벌렸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언뜻 들으면, 머리를 갸웃할 만하다.
상야도 수행자이기 이전에 여자가 아닌가···? 라고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양갓집 규수니, 미색이 출중하니, 시집이나 가라는 둥, 여자가 무슨 수행?’이란 말을··· 징그러운 바퀴벌레나 지네보다 실로 기천 배나 더 증오했다.
적천 사형 말마따나, 오죽했으면 아버지 말을 거역하고, 저 스스로 구름 같은 머리카락을 삭발하고 법명을 달았을까?
‘흥! 아버님과 적천 사형은 정말 바보야! 죽을 때까지 내 마음을 모를 거야! 너무 야속해! 하지만 이 또한 나의 업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적상야, 아니 적영은 욕을 막 퍼부어 맞대거리 하고 싶었지만, 끝내는 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까 본 천문이 되살아 올라,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슬픔이 가슴에 차올랐던 까닭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천은 한술 더 떴다.
"당장 너의 볼썽사나운 중대가리에 흑발만 척 얹어 놓으면, 강호인들은 언필칭 천하 미인 서시(西施)나 옥환(玉環)이 귀환했다면서 떠받들게 틀림없다. 아함! 그렇고말고! 너는 정녕 평생 중노릇하기에 너무도 아까운 미색이니라! 어디 다시 볼까나?"
적천이 상야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그녀의 얼굴을 제 손으로 받쳐 들고 유심히 들여다본다.
그런데 평소 바락바락 대들던 상야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저 망연히 커다란 두 눈으로 적천을 올려다보고만 섰다.
"프홧핫핫! 본 대사형의 말을 듣고 일견 깨우쳤나 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갑자기 돌부처가 됐을 리가 없지. 크하하! 좋아! 좋아!"
"············"
"상야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스승님과 이 사형은 너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고 있단다."
"············"
"사모님의 은애(恩愛)도 제대로 받지 못한 네가 아니더냐? 여자의 몸으로서 출가 수행자의 길을 간다는 건··· 응당 네가 누려야 할 부귀영화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
악몽에 대한 화풀이로 시작한 부아가 가라앉자, 적천은 오라버니의 심정으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상야가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으응? 무슨 심산이야? 본 대사형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단 말이냐? 아니면 갑자기 득도라도 했단 말이냐?"
"············"
대화나 인간관계에서 상대의 무대응만큼 헛심 빠지는 게 없다.
다시 치받쳐 오르는 화통을 억누르고, 적천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호오! 전에는 죽자 살자 덤비더니··· 가만있거라? 오늘은 무슨 연유인고?"
이 궁리 저 궁리 머리를 굴려대지만, 딱히 집히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뭐냐? 혹시··· 좀 전에 네가 봤던 별점 때문인 것이냐? 점괘에 본 대사형이 급살 맞기라도 한단 말이냐? 정말 그런 점괘가 나온 게냐? 정말 그러언···?“
‘우다다다다닥탕탕탕!’
"응? 어어어어··· 어? 얘가?"
상야가 참다 참다··· 급기야 폭발했다.
갑자기 득달같이 적천에게 달려들더니, 그녀의 두 주먹으로 적천의 가슴팍을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한 것.
적천은 당황하고 난감하여 고개를 하늘로 쳐들어 올렸다.
마침 동녘 가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불어오는 샛바람도 상쾌했다.
그런데···,
"뭐라고욧? 사형이 급살 맞다니요? 말을 해도 그런 몹쓸 말을! 사형은 천년만년 잘만 사시니까 걱정 마시라고요! 흥! 사형은 정말 알지도 못하면서. 흥!흥!흥!"
상야가 입을 삐죽 내밀더니 팽 돌아섰다.
언뜻 보니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응? 어랏! 그, 그렇구나!"
적천이 감을 잡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쨌든 그녀가 입을 열었다는 게 중요했다.
적천은 성큼 성큼, 상야의 등 뒤로 다가섰다.
그리고 큰 손으로 상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적영 사매! 그깟 별점 가지고 뭘 그러냐? 냉큼 화 풀거라!"
점잖게, 좋아하는 법명까지 불러 주면서, 슬슬 달래주면 잘 풀릴 줄 알았다.
그런데 상야가 팽 돌아섰다.
그녀의 고운 아미가 확 찌푸려지더니, 그야말로 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내, 내가··· 뭐, 뭘 어쨌다고···?"
"뭐욧? 그깟 별점요? 사, 사형!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별점이 아니고 천문이라고욧, 천문! 사형은 천문을 이 사매가 제일 좋아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쩌면 그리 매정하게 말할 수가 있죠? 천문은 한낱 별점이 아니라, 천문 현상을 살펴 인간의 운명을 예측하는 우주의 학문이란 말입니다, 학문!"
상야가 ‘빼액!’하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녀를 달래주려다 오히려 긁어 부스럼만 만든 적천.
미안한 듯 내쳐 뒷머리를 긁는다.
"아, 아니 그러니까 본 사형 뜻은···, 사매가 피곤할 텐데 잠도 안 자고, 꼭두새벽부터 천문 본답시고 수선을 떨어서 하는 말이지! 새벽바람이 꽤 찬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냐고?"
"늘상 제가 하는 일이잖아요? 동지섣달 엄동설한에도 했고요. 모기가 극성인 펄펄 끓는 가마솥더위에도 천문을 봤다고요? 새삼스럽게 오늘따라 관심 있는 척 그러시오? 흥!"
"뭐? 관심있는 척··· 얘가··· 험!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저 무심한 별들이 뭔 능력이 있다고 인간의 운명에 개입해서 영향을 준다는 말이냐? 그게 이치상 정녕 말이 된다고 생각하, 하···, 아!"
적천이 잘 나가다가 또 삐끗하고 말았다.
상야도 지지 않고 대뜸 대들었다.
"흥! 무식하면 배우세요, 사형! 험! ‘상통천문(上通天文)··· 위로는 천문의 이치를 통하고, 하찰지리(下察地理)··· 아래로는 땅의 이치를 깨달은 다음, 중통인의(中通人義)··· 천지간 사람 사는 도리를 꿰뚫으면, 무리불통(無理不通)하고 무소부지(無所不知)하니라. 즉, 이치를 통하지 않는 것이 없고, 알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되니라···‘라고 했어요. 헹! 사형! 뭘 모르면 좀 배우시라고요?"
적천의 눈이 번쩍 번개가 쳤다가 사라졌다.
"뭐, 뭐야? 무, 무식? 이, 이게···!"
적천이 상야를 향해 험상궂은 얼굴로 주먹을 들이댔다.
무식하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상야는 밝아오는 동쪽 하늘로 고개를 돌리더니, 쉬지 않고 입술을 놀려댔다.
"세상 만물은 각자 고유의 기운이 있어요. 또한 서로가 그 기운으로 얽혀 있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법이고요. 사람은 사람의 형상으로 존재하는 한, 크게 세 가지 힘과 맞서 싸우면서 살아가야 해요.“
상야의 뒷모습이 아침 노을빛을 받아 범상치 않은 그림자를 그려냈다. 그러나 적천은 머리를 흔들었다.
"세 가지 힘과 맞서 싸워? 그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란 말이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귀가 솔깃해지는 적천이었다.
새로운 앎에 대한 호기심에서 오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그때 상야가 적천에게로 돌아서자마자, 팔을 쭉 뻗더니, 손가락 세 개를 폈다.
그 바람에 몸통을 쭉 뒤로 뺀 적천.
"흥! 개뼈다귀는 절대 아니니까, 귀 씻고 사형은 잘 들으시요? 첫째는, 자기 육체 내부로부터 오는 힘. 즉 육체가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으로 형성된 데서 야기되는, 100년조차도 채 못 견디는··· 육체의 유한적 한계의 힘과 싸워야 하고요, 둘째로는 자기가 쌓고 얽혀 온 전생 다생 업보의 힘이에요. 즉 그 운명의 힘에 순응하거나 아니면 그 운명에 저항하기 위해 싸워야 돼요."
"흐흠! 언뜻 그럴듯한 말이긴 하다. 그럼 세 번째는 뭐냐?"
적천이 ’척!‘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관심이 갔던지, 잠시까지만 해도 얼굴에 가득했던 조롱기가 싹 사라졌다.
늘 미지의 학문에 대해 유별나게 집착하는 적천이었다.
"세 번째는··· 바로 우리 육체 바깥의 힘이지요. 즉 대자연의 힘! 인간은 육체로 존재하는 한, 하늘과 땅의 거대한 기운에 의해, 무시로 영향을 받게 되어 있지요."
"흐흠! 하늘과 땅의 거대한 기운이라?"
"그래요. 천기(天氣)와 지기(地氣)예요."
"······???"
"물론 저 하늘의 별들은 의식적으로 인간에게 호의나 악의를 품고 있지는 않지요. 즉, 그 별빛 자체로는 모든 인간에게 유익하거나 해롭지는 않다는 얘기예요. 다만 인간 각자가 전생에서부터 쌓아 온 업보를 발현시키는 인과율(因果律)에 노출되거나 적용될 때, 그 별들이 운명의 법칙적 통로나 기운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천체의 별들이, 인간 각자의 업(業)과 산술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바로 그날, 그 시각에, 아이는 정확하게 태어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 아이의 천궁도(天宮圖)는, 확정된 전생과 불확정된 미래를 나타내 주는 중요한 징표가 될 수 있는 것이고요."
"전생과 미래에 징표가 된다···?"
낮게 중얼거린 적천이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이 웬일인지 여러 번 경련을 일으키는 듯도 보였다.
그런 적천을 흘낏 일별한 상야,
작정한 듯 입술에 침을 묻히고는,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쓰세 쓰세 젊어서 쓰세? 늙어지며는 못쓰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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