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화. 떨어지는 꽃 속에 홀로 서다(落花人獨立) 4
적천이 자신만만하게, ‘운명에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말에, 상야는 일순 심사가 틀어져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했다.
"뭣이라고요 사형! 한낱 인간이 어찌 운명을 거역할 수 있겠어요? 그건 절대로 불가능해요. 절대로."
"으응? 뭐야?"
적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상야, 너···, 좀 전에 네 입으로 했던 말과 모순되지 않느냐?"
"상야 아니고 적영! 사형! 모순보다는 구별된다는 것이지요. 대저 운명을 정복하는 사람은, 깨달음을 성취한 고승이나 성인군자만 가능한 일이에요. 일반 중생과 깨닫지 못한 수행자들은, 자신이 저지른 전생다생 업장 때문에, 운명대로 살거나 그냥저냥 세파에 휩쓸려서 부초처럼 살아야만 한다고요."
"그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맞는 말이라면서 하지만은 또 뭐요?”
상야가 입을 삐죽거리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험! 상야야, 너는 지금 저 천문에 나타난 징조를 보고 이 사형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었다만···"
적천이 잠시 말을 끊고,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새벽 별들은 아침이 밝아옴에 따라 점차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적천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헌데 왜 나는··· 저 별들이 좋아지지 않는 걸까? 사매는 별이 좋아 자진해서 천문 공부까지 하는데 말이야. 이것 또한 사매의 말마따나 내 업장이 운명으로 발현되는 걸까?’
"사형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예요?"
상야가 적천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다시 상야의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적천
"아, 아니다. 지금부터 이 사형의 말을 잘 듣거라. 험! 네가 철석같이 믿는 저 별들의 천문 현상은, 모름지기 인과법(因果法)에 의해, 인간의 운명을 주관한다는 사실은 틀림없다고 본다. 하여 삼계중생 누가 됐든, 그 운명이란 걸 절대 피해 갈 수는 없을 터. 허나 스승님과 이 사형은 예외란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러자 상야의 커다란 두 눈이 반짝하고 이채를 띠었다.
"이유가 뭔데요?"
"크핫핫핫핫핫! 본 사형이 견성(見性)했기 때문이란다."
"정말요? 그리 잠 안 자고 수행하더니··· 사형 드디어 꿈을 이루고 말았군요."
"그럼! 이뤘지! 이루고말고! 크하하하!"
"그런데 사형! 견성하면 정말 운명을 피해갈 수 있나요?"
상야가 기쁨과 걱정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여부가 있나! 견성이란 건, 자신의 참성품을 보는 것이고, 참성품을 보고 머무르면, 무념무상이 이루어져 분별이 생기지 않는단다. 분별이 생기지 않는다는 건 바로 인과법에도 걸리지 않게 돼 업장을 짓지 않는 걸 말하지. 업장의 발현이 바로 팔자이고 운명이 되는 셈인데···, 본 사형은 견성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업장을 덜 짓겠지만, 전에 지었던 업장은 그대로 남아있어 운명의 지배는 다 피할 수는 없겠지."
"사, 사형, 지금 한 말···, 틀림이 없겠지요?! 정말?"
"하, 그렇대도 그러네. 사람은 내면의 참성품에 머물면 머물수록, 오온(五蘊) 즉, 생각 감정 오감으로부터 지배당하지 않게 된다. 몸과 마음의 한계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거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좀 켕기는 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차차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상야가 예리하게 그 점을 파고들었다.
“그럼 사형이 악몽을 꾸고, 별을 싫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에 지었던 업장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그런 거군요.”
“그,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적천이 대답은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탐욕과 분노, 우울함과 슬픔 같은 감정들은, 참성품으로 반조하면, 대부분 금방 해소돼 평상심으로 되돌아왔다. 헌데 악몽과 별에 대한 혐오심은, 마치 늪과도 같이···, 무언가 그를 심연으로 악착같이 끌어당겨, 여간 애쓰지 않으면 매몰되기 십상이었다.
"아! 안심이에요! 정말!"
별안간 상야가 왈칵, 적천의 두 손을 꼬옥 잡으면서 빤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홍조 띤 얼굴에 두 눈이 흑요석처럼 빛난다.
적천은 홀연 멍해졌고,
그의 생각과 감정이 딱 정지했다.
"·········"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온 적천.
갑자기 그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 상태는 꼭, 내가··· 이선, 환희의 삼매(三昧)에 들 때와 비슷하구나!’
그가 다시 상야를 내려다보자, 마침 올려다보는 상야의 두눈과 합쳐졌다.
여전히 상야의 두 눈은 환희에 빛났고 이슬처럼 촉촉했다.
적천은 얼떨결에 눈길을 돌렸다.
적천은 근래 들어 색다른 감정에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이나 식물에게까지, 미세하지만 모종의 느낌이 전달돼 오는 게, 감지되기 때문이었다.
견성을 체험하고 난 이후부터 시작된 현상이었다.
“견성하면 모름지기 자신의 참 성품을 보았기 때문에, 평소의 생각이나 감정, 습관대로 살지는 않는단다. 이유는, 그런 의식들은 순수의식인 참성품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알아채는 즉시, 그에 물들지도, 영향 받지도, 끌려가지도 않고, 그저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만 한단다. 해서 자연히 전생의 업장이 제대로 힘을 쓸 수 없게 되고, 동시에 현생에서 새로운 업장도 짓지를 않으니, 결국은 늘 청정하고 자유자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거지. 그건 운명이란 놈이 개입할 여지를 없애 버리는 것과 같다."
적천의 장기인 능숙한 설법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는 데는 설법이 그런대로 잘 먹히는 수법이었다.
"아! 사형 말마따나 그때그때 각성하면 업장이 힘을 못 쓰긴 못쓰겠네요. 그러다 보면 확실히 운명이 바뀌긴 하겠지요?"
"물론이다. 하지만 그 업장이 너무 견고해서 확실히 뿌리 뽑지 못하면, 견성했다 치더라도 업장의 힘에 휘둘리고 말지."
‘나의 악몽처럼 말이야.’, 는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견성하면 업장이 완전히 비워지지 않나요?"
"아니란다. 견성은 단지 자신의 참 성품 혹은 영(靈)을 보기만 했을 뿐, 과거에 지은 업장은 그대로 남아있단다. 다시 말해 견성을 방해했던 업장만 떨어져 나가는 것이고, 나머지 업장은 그대로 남아있지. 하여 견성 후에도 더 닦아 나가야 남은 업장을 털어 낼 수 있지. 이를 보림(保任)이나 점수(漸修)라고도 하지. 이건 우리 사형제들 모두 스승님에게 배운 내용인데, 적상야, 아니 적영 넌 그때 뭘했지?"
"설법을 들으면 뭐 해요? 소귀에 경 읽기인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책하다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상야.
돌연 그녀의 눈이 반짝 이채를 띤다.
"아! 저도 지금 긴가민가 잡힐 듯도 하네요."
"오! 그래! 종이에 향을 싸면 향냄새가 나고, 생선을 싸면 생선 냄새가 나게 마련이지. 종이는 똑같은 종이인지라, 상야 너도 계속 깨달음을 싸고 있었으니, 얼마 안 가 너의 종이에서도, 견성 향이 짙게 배어나오리라 본다."
"어쨌든 다행이에요, 사형! 견성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상야가 꾸벅 절까지 하면서 고마워했다.
"젠장! 견성은 내가 했다는데, 사매가 왜 고마워하누?"
"당연히 고맙지요! 사형이 견성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소매 심정이···!"
상야가 자신의 가슴을 두 손으로 보듬더니 환하게 웃는다.
춘풍만화(春風滿花)를 무색하게 하는 웃음.
적천은 또다시 ‘아!’ 하고 말문이 막힌다.
그걸 피하려는 듯 서둘러 자신의 마음을 반조해 보지만, 온몸을 적신 희열은 쉬이 소멸하지 않는다.
적천은 화들짝 상야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이왕 객잔을 나온 김에 바로 출발하자. 오늘 중으로 적성사(赤城寺)에 도착해야 한다. 스승님이 많이 기다리고 계실 게야.“
”예에? 아침 공양은 먹고 가셔야 합지요?“
내내 선 채로 졸고 있던 방초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가는 도중에 객점에 들를 거다. 거기서 아침 겸 점심을 푸짐하게 먹자꾸나.“
적천이 한 번 어깨를 으쓱하고는, 휘적휘적 빠르게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상야도 곁에 있던 바랑을 짊어지고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른다.
적천과 상야, 방초가 떠나고 일다경(一茶頃) 후.
불쑥, 소리도 없이 객실 방문이 열리고, 한 인영이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적천과 상야가 묵었던 바로 옆방이었다.
일신에는 백색 문사복(文士服)을 걸치고, 머리에는 문사건(文士巾)을 썼다. 일견 기품이 헌앙했지만, 자못 매의 눈과 사각 턱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돌연 그의 오른쪽 소매가 펄럭이자, 문사복 안의 무언가가 삽시간에 펼쳐졌다.
‘촤르르르르, 촤촵창!’
백선백접선(白仙白摺扇).
중앙에 백색 장포의 신선이 그려진 부채였다.
쇳소리가 날카로운 거로 보아, 부챗살이 강철로 만들어진 게 틀림없었다. 무기 대용으로 사용되는 게 분명했다.
”흠! 법명은 적영, 아명은 적상야라고 했던가? 곱게 생긴 것이 불필요한 정보를 많이도 꿰고 있군. 귀인(貴人)에게 적잖이 장애가 되겠어!“
그는 중단전 어름에서 얼굴 쪽으로 백선백접선을 부재질 하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그 상태로 붕 떠올랐다.
연이어 앞으로 일장쯤 쑥 나오는가 싶더니, 그대로 포물선을 그리면서 지붕 위로 날아갔다.
그가 사뿐하게 착지한 곳은 객점 지붕 용마루 위였다.
마치 물고기가 유영하듯, 전설의 경신술(輕身術) 능공허도(凌空虛道)를 가볍게 시전한 것이다.
유려하기가 비할 데 없는 신법.
백선백접선 괴인은 잠시 적천과 상야가 사라진 관도를 쏘아보았다.
잠시 후, 허공 속으로 누구에게인가 명령을 내렸다.
"백선대(白仙帶) 1화(火, 10명)!"
"복명!"
"지금 즉시 적성사로 잠입하라!"
"복명!"
"무림연맹 특별감찰단이 적성사에 도착하는 대로···, 차도살인(借刀殺人)지계를 써서 한쪽을 궤멸시킨다."
"한쪽이라 하옵시면···???"
"죽는 쪽! 그만 가랏!"
"복명!"
어디에도 사람의 자취는 없었다.
‘휘-잉’하고 미세한 바람 소리만 들렸을 뿐.
"흐흠! 본좌도 그만 가볼까?"
‘촤르르르 촥! 촥! 창!’
그러나 문사복 기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백선백접선을 두 손으로 빗겨 잡은 채,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흐음! 작금에 형혹성(화성)과 세성(목성)은 모습을 보였다. 헌데 황제에 대응하는 전성(塡星, 토성)과 주살을 주관하는 태백성(太白星, 금성), 그리고 태음의 정령인 진성(辰星, 수성)은 오리무중이다. 오성(五星) 중에 삼성(三星)만 집결하거나, 사성(四星)만 모이면, 전쟁과 재난이 끊이질 않는다. 오성 모두 만나 직렬해야, 세상이 바뀌고 주인의 교체가 이루어질 터. 하지만 귀인이······?"
말을 끊고 괴인은 멀리 관도로 시선을 던졌다.
"덕이 있으면 홍복(洪福)으로 천하를 쟁취해 성군이 되겠지만, 덕이 없으면 재앙을 받고 대살성(大煞星)이 된다. 귀인의 탄생별 중 하나는 그 별이 분명하니······!"
쓰세 쓰세 젊어서 쓰세? 늙어지며는 못쓰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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