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화. 불타는 성에 또 꽃은 핀다(燃燒城又花開) 07
다시 적성계곡으로 시선을 내리며 적천이 중얼거렸다.
"속히 적성사에 복귀해서 스승님께 여쭤보는 수밖에 없구나. 한데 진짜 문제는···?"
그랬다.
그가 맞딱뜨린 두 번째 문제는, 적성계곡을 건널 돌 징검다리가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것.
그 돌다리는 칠팔 장(丈)이 넘는 계곡 폭에, 대략 1척(尺) 간격으로 촘촘하고 박혀 있어, 어린 소사매들도 무리 없이 건너 다닐 수 있는 징검다리였다.
800여 년 전 담연 선사가 수행하면서 놓았다는 그 돌다리인데···,
"없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사라졌어요? 뭐, 뭐가요?"
"뭐가요?"
사람보다 말소리가 먼저 도착했다.
상야와 방초가 이내 적천 곁으로 나란히 섰다.
적천은 말없이 우수로 적성계곡을 가리켰다.
"적성계곡에 물만 기운차게 잘 흘러가는구만. 뭣이가 사라졌다는 겁지요?"
방초가 고개를 쭉 빼서 계곡 위와 아래를 쭐래쭐래 살펴보며 물었다.
"어맛? 진짜 사라졌···!"
상야가 기가 막히는지 말끝을 채 맺지 못했다.
“진짜 사라졌습지요.”
"아니···? 돌다리가 갑자기 발이 생겨 도망갔나요? 저기 놓여 있던 돌다리가 수십 개가 넘었는데···, 이건 뭐?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네요. 어떻게 된 거지요?"
"어떻게 된 겁지요?"
방초가 상야의 말을 계속 따라 하며 적천에게 물었다.
하지만 적천이 계곡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말이 없자,
상야가 우수로 적성계곡을 가리키더니, 고개를 돌려 적천을 올려다보면서 다시 물었다.
"적성계곡에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라도 현신했나 보지요. 돌다리를 몽땅 뽑아 없애게? 저 돌다리가 개당 적게 잡아도 대략···, 아, 천 근 이상은 나가지 않겠어요?"
"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냐?"
"호호훗! 못 있겠지요. 사형 성질에···."
상야가 선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적천이 우수를 들어 계곡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길 보거라? 정녕 터무니없는 건···, 저 건너 절벽에 파여 있던 계단이다. 몇백 년도 넘은 바위 계단이었다."
"어맛! 절벽의 계단 길도 없어졌네요?"
"그렇다. 바위에 한 자 정도로 움푹 파서 만들어졌던 돌계단이었다. 헌데 지금 두루뭉술하게 변해버렸다. 이건 마치 밀가루 반죽하듯 매끈하게 손질해 버린 것과도 같구나."
"이게 꿈이야? 생시야? 돌다리는 흔적조차 사라지고, 바위 계단까지 밋밋하게 돼 버렸네. 사, 사형! 이,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요?"
상야가 자신의 두 눈을 손가락으로 까뒤집으며 소리쳤다.
"뭐, 가능했으니까 그랬겠지!"
"가능하다고요? 그, 그럼 누가 일부러 저렇게 했단 말이예요? 세상에 누가···?"
"누구긴 누구예요. 초고수들입지요. 그들의 내공이라면 가능한 일입지요. 두 분이야 이런 산속에서 도 닦느라 세상 물정에 대해서는 도통 모르시겠지만요. 에, 무림 초고수들은 자신의 내공을 뽐내기 위해서라도, 바위에다 ‘휘리릭!’ 글을 쓰기도 하고요, 싹 지워버리기도 합지요, 또 바위를 매끈하게 다듬어 놓기도 합지요. 아마 저기 돌다리도 홀랑 뽑아서 어디론가 옮겼겠지요. 소제의 말이 틀림없습지요. 암요!"
방초가 두손 두발 활개를 쳐가며 의기양양하게 떠벌렸다.
그런 방초를 돌아보며 적천이 물었다.
"네가 직접 본 적이 있었느냐?"
"그럼요! 개방(丐幇) 총단에서 소인의 요 두 눈깔로 똑똑이 보았습지요. 거기 방주님 함자가 조, 종휭무애(縱橫無礙) 양세걸(兩世杰)이라 불리시는 분입지요, 한데 어느 날 갑자기 저거와 비슷한 무공을 억지로 보여주면서, ‘너 얼른 내 직전 제자 해라? 그러면 본 방주가 가진 엄청난 무공을 공짜로 전수해 주겠노라.’ 하며 저를 살살 꼬드겼지요."
"직전 제자? 그거 엄청난 자리가 아니더냐? 그건 개방의 차기 방주나 결이 여러 개인 높은 자리를 보장받는 거와 같다. 허니 아무나 직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런 데도 넌 왜 그 좋은 방주님의 제의를 거절했지? 말해 봐? 우리를 세상 물정 모르는 산승이라고 속였다가는 경칠 줄 알아라."
상야가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격하게 좁히며 방초에게 따져 물었다.
방초는 그런 상야를 거들떠보기는커녕 오히려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에게 양 방주님의 제의를 거절한 세 가지 이유가 있었습지요. 하나는 화선천주 누이 때문이옵고요, 다른 하나는···?"
"뭐야? 다른 하나는?"
"‘신직소’ 때문입지요."
"시, 신직소···? 사형은 알아요?“
”난들 알겠냐? 금시초문이다.“
적천이 고개를 좌우로 내둘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적성계곡을 향해 있었다.
"헤헤헤! 다른 사람은 전혀 모릅지요. 왜냐? 화선천주 누이가 직접 소인께만 가르쳐 준 것이니 깝쇼. 신직소가 뭐냐면? 에헴!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신묘하고 영험한 직감의 소리’라고 했습지요. 그리고 거기에 삶의 모든 답이 들어있다···고도 했었고요, 소인은 그걸 그냥 줄여서 ’신직소‘라고 부릅지요."
"그럼 그 신직소인가 뭔가 때문에···, 그 개방 방주의 청을 거절했다는 말이냐? 그걸 믿으라고?"
"믿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제 마음의 신묘한 직감의 소리가 방주의 제의를 거절하라고 시키는뎁쇼!"
방초가 제 가슴을 ’탕탕!‘ 치며 답했다.
그때 상야가 눈자위를 찡그리며 말했다.
"너는 나이도 어린놈이 종잡을 수 없는 말만 하는구나. 도대체 얼토당토않게 뭐? 신묘한 직감의 소리? 그 때문에 개방 방주가 제안한 직전 제자 자리를 뿌리쳤다고? 이게 말이야? 방구 뀌는 소리야?"
"방구 뀌는 소리는 ’뽕!‘입고요. 화선천주 누이가 말하길, 신묘한 직감의 소리는 바로 양심의 소리라고도 했습지요. 소인은 태생이 비록 거지지만, 이 신직소를 잘 듣고 살아와서 이제껏 죽지 않고 생존했다고 하면서요.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이상 결코 거지가 아니라고 했습지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요, 이 신직소를 듣지도 못할뿐더러 들었어도 들은 대로 못 한다고 했습지요."
방초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허허허! 방초 말에 일리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혹 들었어도 실천 못 하는 이가 태반이다. 방초가 언급한 그 신묘하고 영험한 직감의 소리란 게 바로 양심의 소리이고 영의 울림이며, 본성의 표현인지라, 결코 탐욕을 구하지도 않는다."
적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럼요! 그럼요! 소인도 곤란한 일이 닥칠 때마다, 요 신직소를 듣고 그대로 행하면 잘 수습이 됐고 마음 또한 편해졌습지요. 아, 그럼요!“
그러자 상야가 아직도 떨떠름해서 물었다.
"양심의 소리? 영의 울림요? 그게 말이 돼요?"
"말이 되고말고···. 머리로 말고 가슴으로 살면···, 금방 수긍되는 얘기다."
"가슴으로 살다니요?"
"험! 머리로만 산다는 건, 생각과 감정과 오감으로만 산다는 의미다. 그렇게 살수록 따지고 계산하는 번뇌적 삶이 펼쳐진다. 하지만 가슴으로 산다는 건, 양심과 공감, 직감으로 산다는 얘기다. 그러면 너와 나 상대적인 관점에서 하나로 수렴되고, 마침내는 나라는 게 없어져 무아가 되는 거란다. 다시 말해 방초가 말하는 신묘한 직감의 소리란? 무지와 무명의 먼지를 없앤, 원초의 양심과 영과 본성의 소리란 얘기다."
"그, 그럼 제가 공부하는 천문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소리예요?"
"그렇다. 머리는 너 자신과 천문 현상을 주체와 객체로 분리시켜, 너의 천문지식으로만 진실을 읽게 만든다. 반면 가슴은 주객 둘을 하나로 합일시켜 직접 천문에서 진리를 얻는다."
"······?!"
상야는 입을 헤 벌리고 적천을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사형이란 인간은 왜 이리 박식할까? 나랑 세 살 밖에 차이도 나지 않는데···!’
잠시 후, 그녀의 의식 속으로 적천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러나저러나 돌다리가 없으니 계곡을 건너가는 게 문제로군. 물살이 세고 깊어서 위험하다."
적천계곡은 천태산과 적성산의 물이 합쳐진 계곡이었다.
"쩝! 방주에게 경공술을 배웠더라면 이때 잘 써먹었을 텐데!"
방초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러니까 왜? 양세걸 방주의 청을 걷어 찼냐구? 쥐뿔도 없이 말이야! 나머지 세 번째 이유란 게 뭐냐?"
상야가 또 시비를 걸듯 물었다.
"하아! 적영 스님 이런 때보면 꼭 짓궂은 계집아이 같소."
"뭐, 뭣? 계집아이? 너 이리 와봐!"
상야가 방초를 잡으려고 적천의 뒤로 돌아가려 했다.
방초는 적천의 오른쪽에 가서 서 있었다.
그때 적천이 상야의 손을 낚아챘다.
"자! 계곡을 건너갈 테니 둘 다 내 손을 꼭 잡거라!"
적천이 상야의 손과 방초의 손을 동시에 부여잡고 말했다.
"예에? 어, 어떻게요???"
잡힌 손에 신경을 쓰며 상야가 물었다.
"너희들 좀 전에 내가 비행하는 모습을 잘 보았지?"
상야와 방초를 번갈아 돌아보며 묻는 적천.
"예, 아주 순식간에 날아갔습지요."
"그거 사형이 몰래 무림 고수한테 전수받은 거지요?"
"아니란다. 본 사형은 무림의 경공술이란 걸, 알지도 배운 적도 결코 없었느니라."
"알지도 배운 적도 없었다면서 어떻게 포르르 날아갔지요?"
상야가 두 눈을 홉뜨며 물었다.
"핫핫핫! 처음에는 나도 얼떨떨했는데, 잠시 궁구해보니 그것이 아니었던가? 생각했단다."
"도대체 그것이 뭔데요?"
사형은 하는데, 자신은 왜? 못 하느냐고 따지는 투였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을 때, 육신통(六神通)도 함께 얻으셨다. 그 육신통 중에는 신족통(神足通)이란 게 있는데, 비행술은 그 신족통의 능력 중 하나란다. 뭐, 오늘 나에게 갑자기 비행술이 발현된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내가 견성을 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니 상야야! 이 사형을 믿거라. 추호도 의심 없이! 방초 너도!“
양쪽의 상야와 방초를 번갈아 보며 적천이 단단히 다짐을 줬다.
"옙! 스님! 저는 스님을 처음 뵌 순간부터 믿었지요."
"푸-흡! 처음 뵌 순간? 뭔 소리랴?"
"얘가 신묘한 직감의 소리를 듣는다지 않냐! 자,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거라."
"예, 사형!"
"예, 스님!"
"하늘을 보거라."
"하늘이요?"
고개를 드니 늦은 오후의 하늘은 고즈넉했다.
쓰세 쓰세 젊어서 쓰세? 늙어지며는 못쓰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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