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화. 적천을 부르는 강호(召寂天江湖) 09
"파양화는 백일홍(百日紅)이라고도 하고, 자미화(紫薇花)라고도 하지요. 또한 파양화는, ‘손톱으로 건들면 가지와 잎이 모두 부끄러운 듯 흔들리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라고 들었습니다. 파양화의 다른 이름인 백일홍은, ‘한 번 꽃이 피기 시작하면 백일 동안 피고 진다···’ 한 데서 연유되었지요. 그리고 자미화란 이름은······"
‘스르르르륵!’
잠시 목소리가 멈추고, 대신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반쯤 열린 문 사이로 한 여인이 살포시 들어섰다. 조신하게 아미를 숙였는데···
다홍색 적삼과 긴 녹색 치마를 입고, 어깨에는 황금색 피백(披帛)을 둘렀다. 양손에는 우아하게 거문고를 가슴에 안고.
걸음 걸음이 긴 치마가 땅에 끌릴 듯 말 듯 유연하여, 천상의 고아(高雅)함이 지상에 펼쳐진 듯했으니···
훗날 청운엽은 그녀와의 첫만남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천향무화(天香霧花), 천상의 향기와 호수의 안개 꽂으로 표현하며, 회상에 잠기곤 했다.
그러는 사이 일행의 서너 자 앞으로 다가온 담조영.
살포시 아미를 숙여 예를 표하는데,
"본녀는 화선천 부천주 담조영(曇照英)이라 하옵니다. 오늘 이렇게 중원 무림의 영걸이신 무장룡 님, 청운엽 님, 소설현 님, 세 분을 모시게 되어, 화선천과 더불어 본녀에게는 일생일대 무상의 영광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무장룡, 청운엽, 소설현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이서 본 담조영의 용모가··· 미모도 미모지만 극히 신비로웠던 까닭이다.
그녀는 중원 미인의 이목구비와는 묘하게 다른 것처럼 보였다. 어찌 보면 서역(西域) 여인의 모습이나, 고려 여인의 분위기가 언뜻 드러나 보이기도 했다.
"중원 무림의 영걸은 무슨···?“
무장룡이 청운엽과 함께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마주 답례 인사로 고개를 숙이면서, 얼떨결에 한마디 했다.
"개, 개봉에서··· 그 누구도 본 적 없다는 담 천주님을··· 이리 뵙게 되어서··· 우리야말로··· 영광도 여간 큰 영광이 아니올시다!”
청운엽도 떠듬떠듬 한마디 곁들였다.
"아! 본녀는 부천주에 불과하지요! 목하 천주님은 부재중이라,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옵니다. 본 부천주 또한 오랫동안 화선천을 비워서 그런 오해가 생기지 않았나···? 생각되옵니다. 본녀의 소임이 중원 곳 곳에 산재한 내로라하는 명주(銘酒)와 명차(名茶), 그리고 좋은 안주를··· 직접 마련해서 귀빈들에게 진상하는 것이라, 무시로 출행을 나서곤 하였지요. 허니 저를 개봉의 귀빈님과 고객님들이 모를 수밖에요!“
”아,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군요!“
무장룡과 청운엽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소설현이,
"자, 자! 그만 자리에 앉아서들 말씀하시지요. 언제까지 서서 그러실 작정이십니까?"
그제서야 자리에 앉는 세 사람.
그런데 담조영은, 자리에 앉자마자 좀 전에 설명하다가 멈춘, ’자미화‘란 유래를 마저 이어가기 시작한다.
"이 객실의 이름을 지을 때, 당나라 백거이(白居易)가 지었던, ’자미화‘ 시구도 참고를 했지요. 그가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있을 때, ‘황혼에 홀로 앉았으니, 그 누가 내 벗이 될꼬(獨坐黃昏誰是伴), 자미화만이 자미랑과 서로 마주하였네(紫薇花對紫薇郞)···’ 라는 시를 썼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중서성 화단에 자미화를 많이 심었는데, 낙천(樂天)은 중서성을 자미성, 중서사인을 자미랑이라고 표현했던 것이지요."
"허허허! 낙천의 표현대로라면··· 화선천은 자미성, 우리는 자미랑이 되는 셈이군요!"
"그리고 이 방의 주인공은 자미화가 되는 셈이구요! 그것도 천향무화 자미화!"
청운엽이 그윽한 눈길로 담조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호호! 소녀가 천상의 향기 호수의 안개꽃, 천향무화라면···? 아미일미(峨嵋一美) 소설현 자매님이야말로, 달이 숨고 안개꽃이 부끄러워한다는 절세미인의 표본··· 폐월수화(閉月羞花)가 아닐런지요?"
소설현에게 은은한 미소를 보내며 담조영이 말했다.
자신에 대한 칭찬을 부인하지도 않으면서, 덧붙여 본인보다 상대를 돋보이게 만드는 담조영의 말에, 소설현은 온통 분홍빛으로 아미를 물들이며 말을 더듬었다.
"아, 아! 무, 무슨 과한 말씀을··· 담 부천주님이 더 미인이시면서··· 제가 어찌···?"
기실 소설현은, 처음에 담조영의 빼어난 자태를 보자마자, 불현듯 난생처음으로 질투심을 느끼던 참이었다.
평소에는 자신의 미모에 도시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녀였다.
천하오미(天下五美)라 불리는 당휘령(唐徽玲)이 틈만 있으면, 자신과의 미모를 비교하며 온갖 험담으로 도발해도, 아무렇지 않게 귓등으로 웃어넘기던 그녀였다.
하지만 담조영의 칭찬에 그녀의 질투심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런데 담조영이 한 술 더 떴다.
"소 자매의 용기는 어지간한 협객보다 훨씬 더 뛰어나요. 어떻게 무림연맹의 달콤한 흥정을 물리칠 수 있었지요?"
"아, 알고 계셨나요?"
"아! 미안해요! 좀 전에 밖에서 들은 것도 있고··· 저, 저기···, 청운엽 대협님!"
담조영이 소설현 우측 옆자리에 앉아있는 청운엽을 불렀다.
”예? 대협···? 저, 저를 부르셨나요?“
대협이란 말에 대번에 기분이 좋아진 청운엽,
”잠깐 소녀와 자리 좀, 바꾸어 앉으실래요? 소 자매님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요···“
”하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호탕하게 웃으며, 선뜻 자리를 양보해 준다.
자리를 바꿔 앉자마자, 담조영이 소설현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쉬잇! 우리 화선천은 늘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수시로 드나들곤 한답니다. 하여 종종 대어급에 해당하는 정보도 흘러들곤 하지요. 한 닷새 전에는 두 사람이 본 화선천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월척급 정보를 토해내고 말았지요."
"그 두 사람이라면 바로···?"
"누구긴 누구겠어요? 아미파와 경쟁하는···“
담조영이 일순 말을 멈췄다.
"청성파 여일기와 사천당가 당휘령이 아니던가요? 그들은 같은 사천성이라··· 이권 싸움에서 서로 경쟁 의식이 대단할 겁니다."
중간에서 청운엽이 말허리를 자르며 참견했다.
그러자 눈을 곱게 치켜뜨며 담조영이 핀잔을 주었다.
"어머머! 우리 둘만의 비밀 얘기에 귀를 바짝 세우고 듣고 계셨네요."
"하하하!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고요?"
"호호훗! 오늘만큼은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우리 편이니까요!"
"오늘만큼은 우리 편이라···! 하하하! 담 부천주님의 지금 그 말씀··· 격렬하게 지지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편끼리··· 이 시점에서··· 곡차 한잔 함께 하심이 어떨런지요? 자아!"
무장룡이 갑자기 잔을 높이 들며 제안했다.
”예!“
”좋지요!“
”예! 오늘만큼은 우리 편이요!“
곧이어 의기투합한 네 개의 잔이, 공중에서 살짝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청운엽이 제일 먼저 잔을 내려놓으면서, 감탄한 듯 말했다.
"허-어! 시선 이백(李白)이, 모피 옷을 팔아 검남소춘(剑南烧春)을 실컷 마셨다고 하더니··· 빈말은 아니었군요!"
담조영도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받았다.
"중원에서는 모오검(茅五劍)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하지요. 모태주(茅台酒), 오량액(五粮液), 검남소춘의 앞 글자를 한 자씩 따서 만든 것이랍니다."
"오우! 그럼 오늘은 귀주모태주와 검남소춘을 맛보았으니, 모오검 중에 오량액을 견식하는 날이 되었습니다그려. 고맙기 그지없군요. 담 부천주님!"
"별말씀을요. 오히려 소녀가 고맙지요. 장차 중원 무림의 생명줄은 세 분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말이에요."
담조영이 좀 전과는 다르게 정색하며 대답했다.
무장룡이 의아해서 물었다.
"중원 무림의 생명줄이요? 그건 우리가 아니라··· 현 무림연맹 맹주 조광천이 잡고 있지 않은가요? 그는 또 황조세가(皇趙世家)의 가주인 만큼, 송 황실과도 혈연적으로 관계가 깊으니까 말이요."
"그러니까 더 문제란 말이지요. 금년은 기묘년(己卯年)이고, 태평흥국(太平興國) 4년이지만, 황제 승계의 정당성에 대한 잡음이 극에 달하고 있지요!"
"아, 아니, 지금, 그, 그런 위험한 말씀을···?"
급히 입을 다물고 주위를 살피는 무장룡.
담조영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싱긋이 웃는다.
"안심하십시오! 이 파양화 객실 근처에는 그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조치해 놓았지요."
"아! 그럴 필요까지야······?"
"혹시 조심하려는 뜻이··· 송 태조가 4년 전에 돌연 붕어한 것··· 태조의 적장자인 조덕소(趙德昭)가 황제 위를 잇지 못하고, 대신 숙부 조광의(趙光義)가 2대 황제에 즉위한 것··· 그리고 얼마 전에 그 조덕소 황태자가 자살한 것··· 하여 강호에서는 현 황제의 정당성 의혹이 무성하게 제기되고 있다는 것. 그에 대해 황실과 조정에서는 음모 제기론자들에 대해 가차 없이 척결하는 상황이라고··· 이걸 알려주려 한 것이 아니옵니까?"
무장룡의 입이 쫙 벌어졌다.
자신의 의중을 정확히 짚어냈으니 놀랄 만도 했다.
담조영의 말은 계속됐다.
"작금의 무림맹주 지왕검 조광천은, 현 황제의 아우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가 않아요. 황제의 다섯 형제 중 조광제, 조광찬은 어려서 요절했고, 태조 조광윤(趙匡胤)은 병자(丙子)년에 붕어했으니, 이제 남은 형제는 조정미(趙廷美) 한 분밖에 없지요. 일설에는 요절했다는 조광찬이··· 현 맹주 조광천이 아니냐? 라는 말도 떠돌지만··· 확인할 수는 없고요. 사실 여부야 어떻든 황실과 맹주와의 관계가 돈독한 건 확실하지요. 그 결과로 중원 무림은 황실의 주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도 틀림없는 사실이고요."
점차 무장룡과 청운엽, 그리고 소설현의 안색이 침중하게 변했다.
목이 타는 듯, 소설현이 급히 잔을 들어 마셨다. 담조영이 곧바로 그녀의 잔에 술을 부어 주며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요? 적성사 멸문 건은··· 황제에게 아부하는 간신배들이 사주해서 벌어진 일일 뿐입니다. 만시지탄인 감이 없지 않지만, 목하 님들의 처신이야말로··· 배운 뜻을 굽혀 세상에 아부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를 배격하는··· 진정한 협의지사 행이라고 생각되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청루나 홍루에 종사하는 기녀나 업주들은, 손님들의 입에서 오가는 민감한 화제나 문제에 대해, 절대 함구하고 본인의 소견을 밝히지 않는 것이 불문률이다.
그러나 담조영은 달랐다.
세태를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무장룡, 청운엽, 소설현의 소신을 칭찬해 주는 것이 아닌가?
’담조영 부천주님! 당신은 진정 우리를 믿는 것이오? 어찌 후환과 뒷감당을 고려치 않고, 대놓고 우리를 지지해 주고 추켜올려 주는 것이오?‘
세 사람의 표정이 그리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왠지··· 담조영이 초면인데도 같은 편이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었다.
훗날 그 확신이 정확했다는 걸, 그들이 하나의 결사 조직으로 묶였을 때 증명이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빈승은, 평생 후회하며 죄인처럼 살 것이옵니다. 우리는 아무 증거도 없는 적성사를 멸문시켰고, 천태현의 민초들까지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커억!"
무장룡은 술잔을 들더니 단숨에 마셔버렸다.
곧바로 그의 빈잔에 술을 채워주는 소설현.
그들은 잠자코 말없이 잔을 비우기만 했다.
"수하에게 술을 더 가져오라 시키겠습니다."
담조영이 귀주모태주와 검남소춘 빈 술병을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아래층에서 ’쿵!‘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이어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호통치는 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파양화 벽면이 상당하게 흔들릴 정도였으니, 내공을 실어 날린 게 분명했다.
담조영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죄송한 듯 먼저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어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예! 부천주님! 소첩이 즉시 알아보고 보고토록 하겠습니다!“
영가 진옥경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너희들은 이곳을 단단히 지키고 있거라? 호법 님에게도 속히 연락드리고!“
이어 기녀들에게 당부하는 목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쓰세 쓰세 젊어서 쓰세? 늙어지며는 못쓰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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