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임종훈은 말했었다.
[사람들마다 ‘주인공화’된 창작물이 다르다 보니, 그 설정 또한 각각 다릅니다.]
라고.
그때 나는 임종훈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말한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임종훈도 그렇게 말한 것일 거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 말을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식으로도 해석이 된다.
‘각기 다른 창작물로 ‘주인공화’가 된 사람들은 무엇이든 간에 서로 개념이 다를 수 있다.’
거의 대부분, 아니, 모든 사람들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 물, 나무, 종이, 컴퓨터, 뭐 이런 것들의 경우는 다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을 거다.
다만 아직도 그 정체, 혹은 개념이 확실치 않은 우주, 시간 같은 것들은 다르겠지.
그러니깐 내가 시간과 관련된 문제에서 자유로운 것이 실제로 내가 시간에 아예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닌,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유하게 생성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말 뒤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내게 이 말을 덧붙였다.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선, 이해해야만 한다.
이해할 수 없어도, 해야하는 것이다.
“아저씨?”
“어? 어어. 왜.”
내가 잠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었는지 강유인이 내 앞에서 손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아니 뭐... 너무 가만히 있으시길래... 뭐 생각나신 게 있으세요?”
“그랬는데, 너 때문에 다 까먹었다.”
“앗. 하하하하...”
나는 과학자도 아니고,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는 학자도 아니다.
따라서 내 머릿속에 무슨무슨 이론이라던가 하는 전문 지식이 없다.
있는 건 오직 경험과 직감뿐.
다행히 이런 문제들은 흔히 상식이라 일컫어지는, 혹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지식과는 상당한 괴리를 띠고 있는 게 대부분이라 잘 모르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곤 하는데.
‘될 수도 있는 거지, 확정은 아니란 게 문제고.’
여하튼, 부딪혀 볼 수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 이따가 종훈 아저씨 오시면 이거 다 해볼 생각이세요?”
“이거는 장난이고, 그 밑에.”
“밑에... 음... 이게 무슨 소리... 으흠... 제가 봤을 땐 절대로 안 하실 거 같은데요.”
“절대까지?”
“네.”
“뭐, 안 되면 되게 해야지.”
“과연...”
.
.
.
오전 11시 38분.
화아아악-.
책상 옆 빈 공간에 주황색 포탈이 생기곤,
“아이고~ 뻐근ㅎ...”
“방금 전까지 하품하시ㄷ...”
“스읍!”
‘뭔 꽁트찍나.’
임종훈과 최승한이 사무실에 나타났다.
“어, 뭐야. 유인이는 언제 왔어?”
“저요? 한 10신가 그쯤에요.”
“그러냐? 온 김에 밥이나 먹고 가.”
“감사합니다~!”
자연스러운 거 보니깐 한 두 번 얻어먹은 게 아닌 거 같은데.
임종훈은 정장 외투만 벗은 뒤 소파에 앉아 내가 여러 가지 써놓았던 종이를 흝었다.
“승한아. 그거, 뭐냐. 늘 먹던 거 있잖아. 그거 4개 시켜줘.”
“네. 알겠습니다.”
“그럼 됐고, 어디 보자...”
종이를 읽어 내려가던 임종훈은 읽다 말고 종이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에이... 이거 완전 나 골탕먹이려고 한 거 아녜요?”
“뭐가요. 내가 얼마나 고민해서 쓴 건데.”
“과거로 가서 임종훈 죽이기...부터 해서 항목에 임종훈 이 세글자가 안 들어간 게 하나도 없잖습니까.”
“에이, 그거 두 줄 그어놓은 거 안 보이세요? 그거 말고, 밑에.”
“밑에?”
임종훈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한 채 종이를 다시 가져갔다.
“밑에 밑에 밑에...”
드디어 내가 쓴 것을 발견했는지 종이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흠...”
“어때요. 됩니까?”
“음...”
임종훈은 어느새 진지해진 표정으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아뇨.”
임종훈은 종이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 종이를 가져간 뒤 직접 읽었다.
“세상에 임종훈이 내게 말했던 비밀(사람들마다 ... )을 공개한 뒤 설득시키기.”
“본인이 말하면서도 뭔가 하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들긴 드는데요. 그래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데 해야 될 것 같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임종훈은 두 손을 깍지낀 채 검지로 손등을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하였다.
“일단 물어보겠습니다. 성진 씨. 어째서 우리 회사가 이상한 일을 하는데도 멀쩡한 지 아십니까?”
“사장님이 일을 잘해서요?”
“... 그거 말고요. 왜 범법의 경계를 드나드는 우리를 어디 국가기관에서 건들지 않냐 이 말입니다.”
“안 건드리는 게 아니라, 정체를 숨기니 못 건드리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니가 안 걸리려고 온갖 똥꼬쇼 하는 거잖아.
“경찰에 계셨어서 아실 거 아닙니까. 국정원이든 어디든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이라는 걸요.”
“그건 맞는데, 그러면 우리가 지금 여기 있을 게 아니라 어디 깊숙한 지하실에 있지 않을까요.”
“물론, 지금은 우리의 정체를 진짜로 모르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지금 멀쩡한 이유는 바로 국가에 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보통 범죄자는 국가에 해가 되는 사람 아닙니까?”
손 깍지를 푼 임종훈이 이번엔 팔짱을 꼈다.
“일종의 자경단인 셈이죠. 자경단의 행동이 자경단의 행동으로 인해 생긴 범죄보다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또 그것이 사람들 눈에 닿지 않는다면 국가의 입장에선 잡아넣는 것보단 냅두는 게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정체를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있는 거고, 알고 있더라도 굳이 해가 되지 않으니 잡지 않는 상태다?”
“그럴 거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성진 씨도 어렴풋이 느낀 적 있지 않습니까? 왜인지 가끔 뒤가 서늘하고...”
이때 강유인이 껴들었다.
“그건 그냥 호들갑이잖아요. 괜히 아무도 안 따라오는데 슬쩍 뒤돌아보는거.”
“아니야.”
“하긴... 그때 그 금발머리.”
“아. 그렇네. 우리 이미 걸렸을 겁니다.”
프로듀스 천마 때 본 여자, 일반인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게 내 마법에 걸리지도 않았고, 정장이었다.
경기장에 있는 사람이 정장을 입었다?
관계자거나 어디 어쩌구저쩌구 기관에 속해 있는 사람인 게 분명하다.
“아무튼, 우리가 지금은 걸리적거리지 않는 상황이기에 무사한 겁니다.”
“저희가 무슨 퇴근하고 대충 던져놓은 옷가지인 것처럼 말하시네요.”
“실제로도 그런 취급이 맞으니까요. 조봉식 씨가 속한 해방단체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에게 해가 된다면 온갖 이유를 다 대서라도 우리 회사를 가루로 만들겠죠.”
나는 임종훈의 말을 들은 뒤 질문했다.
“해가 되지 않으면 되잖습니까.”
“성진 씨 말대로 설득을 한다고 하면 저희가 어디 인터넷에 글만 띡 올리고 그러진 않을 겁니다. 제가 아는 인맥이든 뭐든 다 동원하고, 사람들이 충분히 신뢰할 만한 근거를 만든 뒤 설득을 시작할 겁니다.”
“그래서요.”
“그럼 믿는 사람도 있을 거고, 그러지 않을 사람도 있겠죠. ‘주인공화’를 없던 일로 만들어도 누군가에게만 그게 해당될 것이니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안전하다! 그러니 당신들만 동의를 표한다면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
“네. 해가 되지 않네요.”
임종훈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정말로 확신하고 계십니까?”
“네.”
“아뇨. 아뇨. 그랬으면 지금 설득을 하자고 말하고 있을 게 아니라 해결방법이 정말로 맞는지 실험을 하고 계셨겠죠. 상대가 개인이든 단체든, 약하든 강하든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김성진. 당신이니까.”
“...”
뼈를 때리다 못해 부러트리네.
사실 정확한 해결방법은 찾지 못한 상태였다. 도저히 생각해봐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그래서 우선 사람들을 설득한 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하면 어떨까 말하는 중이었는데,
‘허점을 너무 잘 노리네.’
“제가 좀 급했네요. 먼저 확실한 방법을 찾아놨어야 했는데.”
“그것도 그렇고, 무턱대고 사람들 앞에 나가면 안 됩니다. 티끌만큼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아예 그 원인을 뿌리뽑으려고 하는 게 인간이란 동물 아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확실한 방법을 들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 큰 단체에선 저흴 아예 해체시키고 입막음을 하려고 했겠죠.”
“예... 일단은 그래도, 해결 방법을 조금 더 찾아보겠습니다.”
“예 뭐. 그리고, 제가 한 번 기회는 만들어보겠습니다.”
뭔 기회?
내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자, 임종훈이 질문도 하기 전에 말했다.
“설득할 기회요. 물론 해결 방법은 그전에 찾아놓으셔야 합니다.”
“어떻게요?”
“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성진 씨는 해결 방법. 이거 하나만 보시면 됩니다.”
“못 찾으면요?”
“못 하는 거죠.”
빡빡하네.
띵-동.
“우선 밥이나 먹죠.”
***
어차피 임종훈도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 분위기라 밥만 먹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뭐, 내가 해결법을 찾으면 그걸 발표할 기회는 준다고 하였으니, 도움은 됐다.
‘사실 도와준다는 것만 해도 고마울 따름이지.’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는데도 타인을 도와주는 데 있어 스스럼없이 행동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말은 하진 않지만 임종훈은 상당히 보기 드문 사람이다.
나는 사무실을 나오며 천수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직접 도와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고, 천수그룹에 ‘주인공화’와 관련된 전문가들이 수두룩 빽빽할 터이니 그 사람들에게 한 번 ‘주인공화’와 관련해서 물어볼 생각이었다.
왜 그 뭐냐. 저번에 천마패의 성분을 분석하러 간 연구소 있잖은가. 비슷한 데가 천수그룹 소유로 꽤 있을 거다.
뚜르르르-. 띡-.
“여보세요. 예. 성진 씨. 무슨 일이세요? 영원몽 치료는 이틀 뒤였나 그쯤 아니셨습니까?”
“아뇨. 오늘은 다른 일 때문에요. 잠시 통화 되십니까?”
“아... 지금 회의 중이라서요. 이따가 한 1시 반 쯤에 저희 회사로 오실 수 있으십니까?”
“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네.”
뚝-.
그런데 지금 점심시간 아닌가?
“참 너무 열심히 사네. 밥도 안 먹고.”
아닌가. 밥도 안 먹으면서 일하니 저렇게 버는 건가.
나는 잠시 쓸데없는 생각에 잠겼다.
천수호가 하던 회의가 점심을 정하는 회의라는 것을 모른 채로 말이다.
아니 사내식당에서 처먹지. 뭔 점심을 정하고 지랄이야.
-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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