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이 지은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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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J.
작품등록일 :
2022.05.1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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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3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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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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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게임의 엔딩까지

DUMMY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우선 내게 벌어진 일들을 시간 순으로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1. 아이를 구하고 트럭에 치여 죽었다.

2. 오늘 막 클리어했던 게임의 가장 미친 빌런의 몸에 빙의했다.

3. 파센티아의 광신도들이 나를 죽이려 들었다.

4. 갑자기 의식이 끊겼다.

5. 의식이 끊긴 동안 내가 마을 사람들을 다 죽였다.


···뭐지, 이거?

뭔가, 뭔가가 이상했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내가 겪은 일을 말해준다면 정신병원 상담을 추천받을 만한 일들을 겪었음에도 내 정신은 지극히도-.


“평온해.”


생전 본 적 없는 피의 바다. 사람들의 시체. 차가운 검의 감촉.


이 모든 것들을 태어나서 처음 겪음에도 불구하고, 내 정신은 지극히 멀쩡했다. 마치 핸드폰으로 게임할 때처럼, 이 광경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나는 우선 몸을 일으켜 허리춤에 달린 검집에 검을 다시 넣었다. 그런 후에 내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참상을 관찰, 분석했다.


“모두 다 깔끔하게 목을 벴군. 표정에 두려움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봤을 때-.”


시간을 멈추고 죽였다.


가주나 마탑주도 멈춰진 시간 속에서는 갓난아이와 같아지는데 파센티아의 진정한 신도도 아닌 이들이 저항할 수는 없는 노릇. 그나마 두려움에 떨다가 죽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 듯싶다.


“왜 이 사람들을 죽였지, 리카르도?”


내가 의식을 잃었을 때 이 참사가 벌어졌으니 범인은 내가 아니다. 하지만 여러 증거들이 내가 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로 인해 도출되는 결론은 내가 의식을 잃을 때 이 몸의 원래 주인인 리카르도의 인격이 튀어나온다는 것.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대체 이 백 명도 채 안 되는 작은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켜서 얻는 게 뭐가 있냐고.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답은 들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곳에 더 있다가는 영락없는 살인범으로(이미 살인범이긴 하지만) 몰릴 것 같아 우선은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그때, 마을의 입구에서 한 여자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어쩌지? 저 여자도 죽이고 이곳을-.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일단 내 옷이나 검에 피가 묻어 있지는 않으니까 최대한 발뺌을···.


“리카르도 님. 요청하셨던 봉인구를 가져왔습니다.”


나처럼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가 무릎을 꿇더니 두 손으로 공손하게 성인 남성 주먹 크기의 구슬을 바쳤다.


“···고생했다.”


리카르도를 추종하는 신도로 추측되는 여성이 내민 구슬을 받지 않으면 의심 받을 수도 있는 상황.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기를 바라며 구슬을 집었다. 투명한 구슬 안에는 불길한 검은색 기운이 담겨 있었는데, 블랙홀처럼 축을 중심으로 서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게 대체 뭐지?

내가 이 구슬의 정체에 대해 티 안 나게 관찰하고 있을 때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아이템 정보]


이름: 시간봉인구슬

등급: 유니크

설명: 일식의 교주 콘티누 에스페라가 시간의 사도 리카르도를 위해 특수 제작한 구슬. 구슬 안에 담겨 있는 힘이 시간을 흡수, 축적한다.


이게 검은 손가락을 강림시키는 데 필요한 아티팩트. 만약 내가 이걸 부수면, 대륙에 검은 손가락이 강림하는 걸 막을 수 있는 건가? ···아니. 교주가 죽지 않는 이상 이 구슬은 언제든지 만들 수 있어.


“리카르도 님. 서두르시죠. 다음 마을을 물색해 두었습니다.”

“그래.”


일단 여성의 말에 알겠다고 했지만, 어떻게 해야 시간을 다룰 수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있잖아?


나는 여자가 들을 수 없게 은밀히 속삭였다.


“상태창.”


띠링!


[인물 정보]


이름: 리카르도

나이: 32세

특성: [시간조작(U)]

스킬: [마스터급 검술] [상급 격투술] [중급 창술]

스텟: [근력 Lv 90] [민첩 Lv 85] [체력 Lv 70] [지력 Lv 65]

예정된 멸망: ??? / 고독(孤獨)


스킬, 스텟을 빠르게 확인한 나는 특성을 눌러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특성 정보]


이름: 시간조작

등급: 유니크

설명: 지정한 대상의 시간을 조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특성의 설명대로 대상을 지정한 후에 그들의 시간을 조작했다.


“···시체들의 시간을 추출하겠다.”


- 특성 [시간조작(U)]가 당신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 시체 90구의 시간을 추출합니다.


시체들의 잘린 목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빛이 서서히 빠져나옴에 따라 시체가 조금씩 젊어지기 시작했다. 신체에 쌓여 있던 시간을 가져옴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겪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저 영롱한 황금색 광채를 보며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시간을 흡수한다면, 저들이 내 머릿속 한편에 자리를 잡고 내 시간의 흐름에 동행할 것이라는 걸.


- 추출이 완료되었습니다.


메시지 덕분에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구슬을 시간의 구체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구슬 안에 고요하게 회전하고 있던 검은 기운이 서서히 구슬 밖으로 나오더니 시간으로 촉수를 뻗었다.


- 시간봉인구슬이 시간을 흡수합니다.


혹여 깨질까 봐 조심스럽게 촉수를 뻗던 검은 기운은 시간에 닿는 순간 게걸스럽게 시간을 빨아들였다. 촉수를 타고 빨려 들어가는 시간이 마치 귀신에게 혼을 빼앗기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시간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 90명의 시간 3,500년을 흡수했습니다.


구슬 안에 담긴 검은 기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중심축을 두고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축이 조금은 황금빛으로 빛난다는 것 정도.


구슬을 품에 넣은 나는 시체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뒤처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다음 장소로 가시죠.”


피가 흥건한 마을에 옷가지만이 남아 있었다.

모든 인간의 경험은 시간의 흐름에 의한 것. 사람의 시간을 끝까지 추출하게 되면 태어났다는 경험조차도 앗아간다는 것을 원치 않게 알게 되었다.


나는 내 한 몸 살겠다고 이미 죽은 그들에게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게 만든 것에 대해 짧게 묵념했다. 그리고 여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안내해라.”

“예. 이쪽으로.”


여성은 길을 따라 마을 밖으로 나갔고 나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그녀를 따라갔다. 마을 입구를 벗어나기 직전 나는 고개를 돌려 마을을 바라봤다. 온몸이 피로 물은 파센티아의 석상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기분 더럽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다.”


나는 고개를 거칠게 털며 파센티아의 시선을 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피에 적셔진 눈빛은 마을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내 뒤를 따라다녔다.


*


나를 안내하는 여성의 이름은 모른다. 리카르도와 오랜 인연이 있는 것 같아 이름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제3자가 나타나면 그를 통해 이름을 들을 수도 있었겠으나, 안타깝게도 시간을 추출하는 동안은 우리 둘뿐이었다.


이 여성을 따라 나는 다섯 개의 마을을 더 돌았고 파센티아의 마을을 포함해서 총 3만 시간을 구슬에 축적할 수 있었다. 뒤에 안내하는 마을의 규모가 갈수록 커졌고 연령대가 더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수치였다.


“오늘 목표로 삼으셨던 마을은 전부 처리한 것 같습니다.”


여성은 비서처럼 내 옆에 착 달라붙으며 말했다.


“교단으로 돌아가시죠. 미리 공간의 신도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여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붉은색 옷을 입은 남자와 여성들이 허공을 찢으며 등장했다. 어떻게 이렇게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무렵, 여성이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루시. 제때 와줬군요.”

“당연하죠, 레이나. 시간의 사도님께서는 언제나 정해 놓으신 시간을 따라 움직이시잖아요.”


레이나.

리카르도의 비서 노릇을 수행하던 여성의 이름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나는 저들의 대화가 더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만히 있었지만, 저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던 모양이다.


“이런. 시간의 사도님을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되죠. 바로 포탈을 준비하겠습니다.”

“어디로 열어야 하는지 아시죠, 루시?”

“오늘따라 저를 너무 무시하시네요, 레이나. 스페슨 님께서 말씀해주셨어요. 제단으로 시간의 사도님을 모셔오라고.”

“훌륭하네요.”


스페슨은 공간의 사도, 저 붉은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을 이끄는 남자의 이름이다. 게임에서는 장난기가 많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 같은 빌런으로 등장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리카르도님. 곧 포탈을 열겠습니다.”


레이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더 말을 걸지 말라는 의미에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왠지 이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절과 미소를 장착한 채 상대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지만, 그 안에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리카르도인 척 연기하기 위해 여섯 개의 마을에서 시간을 빼앗은 내 심장이 지극히 평온한 것처럼.


···아. 이게 자기혐오구나.


사람은 자신을 닮은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혐오한다는데, 마치 도플갱어처럼, 그게 지금 내 상황인 모양이다.


여섯 개의 마을에 살고 있었던 700명은 거뜬히 넘는 사람들의 시간을 강탈한 주제에 나나 저들은 그게 마치 일상인 것처럼 평화롭기 그지없다.

발밑에 핏물이 출렁이고 있는데, 구슬에 봉인된 시간 속에서 희생자들이 절규하고 있는데, 저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고 있다.


나는 저들에게 살의를 느꼈다. 동시에 내게도. 도플갱어와 본체가 만나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도저히 지금의 나와 똑같이 굴고 있는 저놈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을 것 같으니.


“포탈을 열었습니다. 들어가시죠.”


나는 레이나의 안내를 애써 무시하며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시야가 순간 어그러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고, 나는 거대한 동굴의 공동 속에 서 있었다.


“작은 아이가 기지개를 켜니 태양이 부서지고,”

“작은 아이가 손을 뻗으니 바다가 메마르고,”

“그 검은 손이 대륙을 움켜쥐니 온 세상에는 오직 침묵만이 자리하리라.”


검은색, 녹색, 빨간색 옷을 입은 신도들이 오와 열을 맞춘 채 기립해 있었다. 그들은 공동의 가운데에 좁은 길을 내놓고 있었는데, 그 길의 끝에 있는 높은 계단을 올라가면 제단이 하나 나온다.


“시간의 사도시여. 부디 검은 손가락의 강림을 이루어 주소서.”


뒤에서 들려온 레이나의 말이 레이스의 출발 신호가 되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로지 앞만 보며 길을 걷고 계단을 올랐다. 그런 후에 제단에 시간봉인구슬을 올려놓았다.


- 제단이 시간봉인구슬에 반응합니다.

- 태양 속에 잠들어 있던 검은 손가락이 자신에게 바쳐진 제물에 반응합니다.


구슬 속의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와 제물을 공양하는 손의 모양을 취했다. 그리고 그 위에, 내가 추출한 사람들의 시간이 비가 거꾸로 내리는 것처럼 사라져갔다.


- 검은 손가락이 당신이 바친 제물에 만족해 합니다!

- 검은 손가락이 더 많은 시간을 원하고 있습니다!


X까. 더 줄 것도, 주고 싶은 마음도 없어.


- 검은 손가락이 시간을 더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너에게 더 줄 건 없어. 그러니 닥치고 내가 주는 것만 처먹어.”


- 검은 손가락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꺼지라니까?”

- 우리의 신에게 그렇게 말하면 쓰나.


···리카르도?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졌다. 동시에 속이 메스꺼워지는 어지러움이 동반됐다.


- 저기 널려 있잖나. 우리 신께 바칠 제물들이.

“아, 안 돼···.”

- 아, 이미 수백 명의 시간을 빼앗은 주제에 말이 많구나.


나는 검은 손가락에게 흘러가는 시간을 홀린 듯 바라보는 일식의 사제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망-.”

- 몸이나 넘겨라.


광기에 찬 신도들의 고함 속에서, 눈이 감겼다.


.

.

.


“···리카르도. 이 빌어먹을 새끼.”


두통과 함께 다시 돌아온 의식. 눈을 떴을 때 검은 손가락이 더는 칭얼거리지 않았다.


신도. 사도들은 몰라도 신도들은···.


- 검은 손가락이 많은 시간을 먹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 앞으로 조금만 있으면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광기로 물들어 있던 공동은 소름끼치리만치 고요했다. 신도들이 모두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간 탓이었다. 아무렇게나 너부러진 옷가지들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검은 손가락이 대륙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1년입니다.


게임의 엔딩까지 1년 남았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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