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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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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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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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황제의 아들 53 수레바퀴 자국이 새겨진 길

DUMMY

6.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아이니히 라 케니하크는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기색으로 반문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등장한 벗이 과히 반갑다고만은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그러한 것일까. 어조가 자연스럽게 시비조가 되었다.


보름 후면 명실상부하게 제국에서 최고라 일컬어지는 두 가문의 혼례가 있을 예정이었다. 메이샤드 공작가와는 물론이요, 황실 방계이기도 한 아르헨돌프 공작가와도 친분이 있는 아이니히는 당연히 베케이노 영지에서 치러질 성혼식의 하객으로 초청받았다. 비단 케니하크 가문뿐만 아니라 제국에서 내노라고 하는 가문들과 식민지령을 이끌어가는 구 커런스와 구 코네세타의 왕족들과 고위 귀족들의 상당수 역시 초대되었으니, 재상가의 장남인 블란델 또한 그 하객으로 참석하리라는 것은 굳이 예상하고 말 것도 없을 일이었다. 벌써부터 보름 후에 있을 결혼식은 가히 국혼을 방불케 하리 만큼 성대할 것이라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나돌고 있는 실정 아닌가.


게다가 아직 미혼인 현 황제인 듀피겔드 Ⅱ세, 슈레디안까지 그 혼례에 참석할 것이라 공언하였다 하니, 그의 신하된 도리로 아이니히가 식장에 불참하는 것은 언어도단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블란델과 식장에서 조우하리라 내심 각오 아닌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해도 뜻하지 않게 앞당겨진 조우가, 그것도 해결될 조짐이 보이기는커녕 점점 더 확대되기만 하는 사건 때문에 잔뜩 신경이 곤두서있는 아이니히에게는 과히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어쩌긴. 어차피 죽일 거면 그 녀석 나한테 달라는 거지.」


빗물에 젖은 옷을 벗어던지며 블란델은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아이니히는 인상을 찌푸리며 수건을 집어 들어 절반은 나신이 되어버린 블란델에게 건넸다.


블란델이 자리에 있었기에 더 잘 알고 있는 일이겠으나, 기실 아이니히는 아이언사이드 폭동 사건의 감찰군 대장으로서 당해 사건의 해결에 대해서는 아직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긴 무슨 처분을 내리고 싶어도 주둔군 일부에서는 사건의 주동자라 몰아치고 있고, 또 나머지 영민들과 그들 쪽으로 돌아선 병사들 쪽에서는 사건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문제의 인물, 아펠레르 크론케이터를 아직 정식으로 대면조차 하지 못했으니, 아이니히가 아무리 영민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합당한 처분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마치 마무리된 사건처럼 아펠레르의 사형을 운운하는 블란델의 언행은 확실히 지나치게 앞서 나간 발언이라 할 만 했다. 아이니히는 자신이 맡은 사건의 해결에 대해 지려 없이 마구 말하는 블란델의 경망스러움에 언짢아진 심기를 여과시키지 않고 퉁명스레 내뱉었다.


「시답잖은 소리는 집어치워. 나는 아직 그 어떠한 처분도 내리지 않았다.」


블란델은 수건으로 빗물로 젖은 상체를 닦아내고 물기를 품은 채 조금 더 짙어진 아마 빛 머리칼을 탈탈 털었다.


「우리 사이에 숨길 게 뭐있다고 이리 냉랭하게 말을 내치는 거냐. 그리고 네 수중에 들어온 녀석 한 명 정도야 모처럼의 재회 기념인데 선물을 주는 셈 쳐도 되잖아? 정식 군부 소속도 아니고, 친위대 사관 출신이라며.」


아이니히는 우리 사이가 대체 무슨 사이이며, 내가 왜 너와의 재회를 축하하는 선물을 내줘야 하느냐는 반문이 튀어나가려는 것을 간발의 차이로 혀끝에서 내리눌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알고지낸 친구 사이라 해도 허용할 수 있는 한계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는 법이라 생각하고 있는 그였기에 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좋게 말해 규칙이나 관습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자유롭고 분방한 성격이고, 나쁘게 말한다면 주색을 좋아하는 팔난봉 블란델이었다. 그나마 쥐꼬리 만한 염치는 있는 모양인지 블란델은 적어도 자기 부하의 아내는 건드리지 않았지만, 장소와 성별을 가리지 않는 막돼먹은 바람기로 따지자면 영민 폭동으로 유명을 달리한 아이언사이드 전임 사령관 테오도르 라 하르윈이나 지금 그의 눈앞에서 빙싯거리고 있는 블란델 라 뮤켄이나 하등 다를 게 없다는 것이 그의 냉철한 분석 결과였다. 사실 블란델이 못 말리는 파락호든 바다 건너 코네세타까지 악명이 자자한 바람둥이든 그런 것은 아이니히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유년기를 함께 보낸 친우라 하여도 이미 청소년기를 다 뛰어넘은 어른의 사생활에 간섭할 만큼 오지랖이 넓은 그도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무시하고 지내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여도, 블란델이 본인의 침실에 끌어 들이고 싶어 하는 그 공격 범위에 자신이 포섭되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만드는 한, 아이니히가 아닌 그 누구라도 태연한 척 무심을 가장할 수는 없을 터였다. 아마도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아이니히에게 블란델이 반가운 벗이 아니라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은 불청객이 되어버린 것은. 지금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의 손길에서 명백하게 성적인 기운을 느껴버린 시점 바로 그 이후부터 말이다.




「손은 치우시지. 건드리지 않아도 귀는 아무 이상 없어.」




아이니히는 어느 사이엔가 쓱 다가와 자신의 얼굴선을 타고 내리는 블란델의 손을 매섭게 내쳤다. 그래봤자 블란델의 얼굴에 떠오른 능글맞은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느긋해 보이는 표정 탓일까. 순간적으로 기분이 팍 상했다. 블란델의 수작질에 맞장구를 쳐줄 의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으니 그의 손길을 내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라 할 터였다. 그러나 아이니히는 자신이 어째서 지금 이 순간 난봉꾼에게 농락당한 숫처녀처럼 비참한 심정에 사로잡히고 만 것인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서글플 정도로 그 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탓인지, 대수롭지 않게 이어진 블란델의 발언에 일순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이런 내가 잠시 세레즈를 비우는 사이, 내 예쁜 케니가 손버릇 나쁜 사내에게 된통 당하고 마음이 삭막해진 처녀처럼 완고하게 변해버렸잖아. 그런 얼굴로 날 보지 마, 케니. 난 그 녀석하고는 아직 눈도 안 마주쳤어. 그냥 버리기는 아까울 것 같아서 달라고 한 거지. 오해하지는 말아줘. 나한테는 너밖에 없다고.」




어린 시절을 공유한 벗에, 그것도 자기보다 연하의 동성에게 놀리기 쉬운 하수로 얕보이는 것만큼 혈기 왕성한 시기의 청년에게 견디기 어려운 일은 흔치 않았다. 하물며 무엇 하나 뒤질 것이 없다고 생각해온 상대에게 창부처럼 조롱받는 것이라야.




「헛소리할 기력이 있으면 당장 콜드베폰으로 돌아가. 보다시피 난 바빠. 널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이다.」




잠시라도 이 녀석에게 기대를 품었던 내가 제 정신이 아니었던 거지. 아이니히는 스스로의 판단에 확신을 더하듯 입매에 힘을 실었다.




아펠레르의 상관이라는 현 아이언사이드 주류군 산하 친위대 양성소의 훈련대장 한스 포이에르와 성인식을 치를 때까지 그를 후견해왔다는 제브릴 사제와 그 외 몇몇 영민 대표들을 상대로 한 접견 도중에 블란델이 들어섰을 때만 해도, 아이니히는 그가 떠나기 전과는 확연하게 변해서 돌아왔다고 확신했다. 시종일관 공손한 어조였지만 아펠레르를 당장 풀어서 보내주지 않는 한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표명했던 그들을, 블란델이 감찰군 대장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며 사건의 진행과정을 언뜻 들은 바로는 다분히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고인 듯 하고 그 선동 혐의에 대해서도 확실한 근거가 없으니 심사숙고해서 양측 모두에게 공정하게 처리하도록 적극 노력하겠다는 점잖은 말로 돌려보냈을 때만 해도 아이니히는 정말 그리 생각했었다. 조정에서 임시로 파견한 중개자로 왔다는 블란델의 허무맹랑한 발언조차 믿고 싶을 만큼, 그는 침착하고 당당했다. 코네세타에서 고생하면서 제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라며 귀하디귀한 외동아들을 가차 없이 사지로 들이민 재상님의 분별 있는 선택이 드디어 효과를 낸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막상 둘이 되어 말이 통하는 상대인 감찰군 대장과 조성에서 파견된 임시 중개인 사이의 막후교섭의 첫 마디가 밑도 끝도 없이 ‘죽일 바에야 차라리 그 놈을 내게 줘’ 이니 새롭게 받아들인 신뢰의 싹이 움틀 대지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 농담하는 거 아니야, 아이니히.」


「나는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나? 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당장 나가.」




아이니히는 더 두고 볼 것도 없다고 마음을 굳히고 싸늘하게 내뱉었다.




「개인적으로도 안면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하르윈은 부하의 충성심을 자극하는 부류의 인간은 결코 아니었다. 죽은 자에 대한 예우는 아니겠으나 그는 그다지 동료애를 이끌어내는 사람도 아니었지.」




블란델은 못 들은 척 서류를 뒤적이고 있는 아이니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너도 알고 있다시피, 군부에서는 제 손을 더럽히기 싫은 일은 친위대 훈련소 생도들고 사관들에게 떠넘기는 관례가 있지. 어차피 정식으로 편제된 군도 아니고, 조건과 운, 실력의 삼박자가 맞아 황성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어차피 암살용 살수로 자라나는 아이들이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푸는 데 제격이라 할 만한 일들이지.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말이야. 군을 대신해서 온갖 지저분한 일을 도맡아 와서 그런지, 그들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상상 이상이다. 너도 군 수뇌부 참모진에 있으니 그 정도야 알고 있겠지. 그런데 봐라, 이곳 아이언사이드를. 난 오늘에야 왔고, 그렇기에 내 인상은 단편적인 것일 수밖에 없겠지만 이곳 영민들과 친위대 사이의 친화력은 놀라울 정도더군.」


「그 친화력의 매개체가 된 것이 크론케이터라고 말할 참이라면 더는 안 듣겠다.」




아닌 척 해도 결국은 다 듣고 있었다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발언이었다. 블란델은 피식 웃었다.




아이니히의 완고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아이언사이드 폭동의 세부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려진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변경 사령관의 갑작스런 죽음이 전사나 자연사가 아니라는 것은 북부 지구를 총괄하고 있는 레놀 라 슐라이어의 귀에게까지 들어가 있는 실정이었다. 그 해결을 위해 아이언사이드 영지로 대대적인 감찰군이 급파되었으니 사건의 지휘를 맡은 아이니히로서는 흐트러진 군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응당 눈에 보이는 범인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블란델은 단지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저토록 민중의 지지와 애정을 받고 있는 청년을 헛되이 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별로. 난 그저 갈 길이 안 보인다 싶으면 백성들이 바라는 바를 생각해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라는 것뿐이다. 우리 아버지들과 돌아가신 상황 폐하께서 그러하셨듯이 말이야.」




블란델은 어깨를 으쓱이며 유보하듯 말했지만, 내심은 아이니히의 결벽성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 영리하고 공정한 녀석이니만큼 이 정도만 말해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발언을 새겨들으리라. 아펠레르라는 청년이 하르윈을 직접 죽인 게 아니라는 것과, 그만 모르는 척을 한다면 아이언사이드에서 그 누구보다도 민중의 깊은 존경을 받고 있는 저 청년을 빼돌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네가··· 그를 한 번, 만나보겠나.」




조금 길다 싶은 침묵이 지나가고 자리가 지루해지기 시작한 블란델이 돌아서려던 찰나, 아이니히의 입에서 마침내 항복을 뜻하는 발언이 흘러 나왔다.




「현명한 선택을 한 거다, 아이니히 라 케니하크.」




블란델은 여전히 서류에 눈길을 주고 있는 아이니히를 다정하게 바라보고는 돌아섰다. 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작가의말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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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2부의 종장이자 3부의 서장] 쏟아지는 빛 22.09.29 48 1 20쪽
105 [2부 완결] 황제의 아들 104 사나운 새벽 22.09.27 48 0 21쪽
104 [2부] 황제의 아들 103 사나운 새벽 22.09.26 40 1 10쪽
103 [2부] 황제의 아들 102 사나운 새벽 22.09.24 36 0 9쪽
102 [2부] 황제의 아들 101 사나운 새벽 22.09.23 52 0 10쪽
101 [2부] 황제의 아들 100 사나운 새벽 22.09.22 56 0 13쪽
100 [2부] 황제의 아들 99 사나운 새벽 22.09.21 44 0 7쪽
99 [2부] 황제의 아들 98 사나운 새벽 22.09.19 45 0 14쪽
98 [2부] 황제의 아들 97 사나운 새벽 22.09.18 47 0 12쪽
97 [2부] 황제의 아들 96 사나운 새벽 22.09.17 52 0 14쪽
96 [2부] 황제의 아들 95 사나운 새벽 22.09.15 48 0 9쪽
95 [2부] 황제의 아들 94 사나운 새벽 22.09.12 56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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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2부] 황제의 아들 92 사나운 새벽 22.09.07 49 0 4쪽
92 [2부] 황제의 아들 91 사나운 새벽 22.09.06 57 0 10쪽
91 [2부] 황제의 아들 90 사나운 새벽 22.09.04 62 0 4쪽
90 [2부] 황제의 아들 89 사나운 새벽 22.09.02 45 0 6쪽
89 [2부] 황제의 아들 88 사나운 새벽 22.09.01 64 0 11쪽
88 [2부] 황제의 아들 87 사나운 새벽 22.08.31 54 1 10쪽
87 [2부] 황제의 아들 86 사나운 새벽 22.08.30 60 0 8쪽
86 [2부] 황제의 아들 85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8.23 59 0 10쪽
85 [2부] 황제의 아들 84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8.17 51 0 9쪽
84 [2부] 황제의 아들 83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8.11 61 0 7쪽
83 [2부] 황제의 아들 82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8.09 87 0 11쪽
82 [2부] 황제의 아들 81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8.08 63 0 16쪽
81 [2부] 황제의 아들 80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8.05 76 0 16쪽
80 [2부] 황제의 아들 79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8.01 53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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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부] 황제의 아들 77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것들 22.07.22 77 0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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