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갈수록 태산이다.
본 웹소설은 픽션이며 인물, 지명, 종교, 사건 등은 실제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정록청을 향하다 발아래
그림자를 보고 황급히 하늘을
보니 이런 수업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 석환~ 아무래도 수업을 먼저
들어야 할 것 같다. 이러다 그동안
모아둔 도기점수 깍이겠어~ "
“ 아~!! 큰일이네!!
하필 철상철하(徹上徹下)하다
자자한 분의 수업이라고
이혁사형께서 귀뜸 해 주셨는데
이런~ 유정 얼른 가세~ "
깜빡하고 있었다.
이건 뭐 폰이 없으니
시간이고
메모체크고 알람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가늠만으로 해야 하는 데
그나마 잊어먹지 말라고
쪼가리에 쓰던 것을 그것조차
흘려버려서 양반체면이고 뭐고
100미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교양수업이 아닌 전공수업으로
조선의 유정은 알고 현대의
유정은 모르는 그 분이 오신다며
아침부터 부산 했던 이혁상유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무섭게
얼굴에 모든 근육이 구겨졌다.
그렇게 부리나케 다리 두 개를 허공에
매달다 시피 내달렸지만 이미
학당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 이런... 지각이라니. ”
허나 들어가지 않는다면 불통은
자동이라 난 한숨을 바닥끝까지
내쉬며 문고리를 잡아 밀었다.
학당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시선을
돌리는 유생들 너머로 가느다란
눈빛을 매섭게 쏘시는 스승님의
모습에 순간 쫄았다.
다른 유생도 아니고 장의가 먼저
와 서책과 자료를 나눠주지는
못할망정 헐레벌떡 뛰어 온
형상이 가히 좋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난 곧
당황함을 감춘 뒤 옆에 있던
석환이를 붙잡으며 곧장
스승님에게 변명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았다.
“ 죄송합니다 스승님.
학당으로 들어오기 전 갑자기
석환사제가 배를 부여잡고
구르기에 급히 혈을 풀어
주느라 늦었습니다. "
“ 내가 언제? ”
“ 모양새가 좋지 않다.
그냥 네가 좀 희생해라. ”
그렇게 소곤소곤 짧게 끊은 뒤
스승님의 불통만을 면할 수
있길 바라며 답을 기다렸다.
“ 장의가 의원인가? ”
“ 아닙니다. ”
“ 그래. 의원일 리가 없지.
그렇다면 이 곳에서 글이나
주절대고 있진 않을 테니. "
“ 어릴 적 배앓이를 자주
겪던 기억에 혹여 도움이
될까 하여 시도를 한 것이
들어맞았던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의원을 부르면
되는 것이지만 통증을 멎게
하든 하지 않든 늦는 것은
매 한가지라 여겨 장의로서
도리는 다하는 것이 현명
하다 판단하였사옵니다. "
“ 그래서 늦었다? ”
“ 네 스승님. ”
어찌 보면 좀 뻔뻔해 보일 수
있으나 분명한 이유가 있음에
당당해야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먹히느냐 마느냐가
결정 되지만 장의 타이틀을 좀
써먹기로 했다. 어쨌든
동급생이나 후배를 챙기는
과대가 좀 멋있어 보이지
않을까
“ 불통은 각오한 것 일 테지? ”
‘ 쳇, 정(情)이 안 통하는
양반이군. ’
뭐 바늘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양반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최소한 다른
상유들이나 사제들 앞에서
체면이 깍이진 않을 듯하다.
사제를 아끼는 장의의 모습
으로 비춰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 위안
삼으며 스승님에게 연신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
앉았다.
“ 장의~ 석환사제가 많이
안 좋았나? ”
이혁상유의 걱정스런 말투에
살짝 찔리긴 했지만 다행히
석환이는 사제들과 함께라
들리지 않으므로 능청스레
연기를 마무리 했다.
“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였다면
바로 의원을 불렀을 테지요. "
“ 아니, 장의가 그런 능력도
있었는가? ”
성필상유는 반짝반짝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니
난 부담스러워 살짝 시선을
피한 뒤 말을 이었다.
“ 제가 배앓이를 종종 했던
터라 증상이 비슷해 보여
언제부터냐고 물은 것이
다입니다. 조반을 먹고 난 뒤라
짐작한 것이 우연찮게 들어맞은
것일 뿐 자세히는 아마도
의원에게 보이는 게 좋겠지요. "
여차하면 석환이가 의원에게
끌려갈 상황이 생길 수 있지만
난 모른 척 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 지 근처 사제들로부터
괜찮냐는 말을 듣고 있는
석환이를 보며 나름의 위치를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제천과는 달리 제법 인간관계가
형성이 잘 되어 있는 것이 차기
장의로 충분할 듯 해 조만간 나의
자유로운 날개가 펼쳐지겠다
생각하며 지루하고도 재미없는
수업을 이 악물며 들었다.
“ 홍학유가 오늘은 재근일이
아니라니 어쩔 수 없군. ”
수업을 마치고 석반을 들기 전
잠시 정록청에 갔다 홍학유의
부재를 확인한 나와 석환은
소득 없이 진사식당으로 향했다.
“ 그러게. 내 이럴 줄 알았으면
전에 다음 이야기를 미리 들어
보기라도 할 걸. "
“ 무슨 이야기? ”
“ 아? 아니야 아무것도. ”
기가 막히게 딱 끊어버려서
궁금하던 차라 예고편이라도
들려달라고 슬쩍 말을 붙이려던
것이 석환이 앞이라 그냥 생각도
거르지 않고 나왔다. 그렇게
얼버무리니 의심스런 눈치다.
이에 난 재빠르게 말을 돌렸다.
“ 아~ 자네가 잠시 나갔다 왔을 때
기방에 대해 물어본 것이 있어서
말이야. "
“ 전에 기생 연향이 말한 홍루가
말인가? ”
“ 응. ”
솔직히 연향에게 술 한 잔 얻어
먹고 싶기도 하고 간 김에 월아가
말한 인간을 연향이나 초이가
보았는지도 물어 볼 겸 겸사겸사.
월아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로 인해 괜히 불안을 안고
외출을 할 때마다 주위를 살필 수
없는 노릇이니.
“ 사내라면 호기심이 이는 것은
당연하나 아무래도 유생이 기방을
드나드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아. "
왠일로 옳은 말을 하나 싶어
칭찬을 해 주려는데
‘ 하? 그럼 그렇지. 입은 아주그냥
귀에 걸리다 못해 날라 가겠네.
쯧쯧쯧 '
능구렁이 같은 녀석의 언행불일치에
어이가 없었지만 말을 돌리려다
꺼낸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월아를
핑계댔다.
“ 그렇기는 하지만 월아의 말이
자꾸만 걸려서 말이지. 무작정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얼굴을 노려볼 수도 없는 노릇
이잖아. 연향에게 물어 자세한 걸
확인한 뒤 신상을 파악해서 먼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하는 것보다는 말이야. "
“ 궁금한 것은 아니고? ”
“ 무엇을 말인가? ”
“ 아니~ 성인군자도 자네 앞에선
울고 가는 마당에 이리 먼저 기방
출입을 한다 해서 말이야. "
“ 하~ 답답한 소리. 내가 지금
놀러가는 걸로 보여? 기방이야말로
정보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지. 어디까지나~ "
“ 암암. 유비무환이라는 말을 실천
하기 위함이지. 그러다 한잔 할 수도
있는 것이고. "
“ 그렇지. 한잔 할 수도...
아니~ 말이 왜 또 그리 새~!! ”
“ 본심이 나온 것을 무슨~ ”
“ 아 진짜~!! ”
술 한 잔이라는 말에 얼굴색까지
변한 것도 모른 체 나는 놀려대는
석환이를 잡느라 아주그냥 화가
난 톰이 되었다. 제리는 그냥
제리가 아니었나보다. 확실히
머리까지 비상한 얄미운 녀석.
그렇게 한참을 티격태격하다
석반을 들고 나서는 동재로
돌아왔다. 이때 성필상유와
이혁상유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서는 말했다.
“ 장의 이번에 혜정옹주마마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전하께서
특별히 성균관 대성전에서
대사례(大射禮)를 여신다 하네. "
“ 아니, 무슨 생일파티를 즈그 집...
아.. 탄신일을 궁에서 보내지
않으시고 굳이 이 곳에서 한단
말입니까? 보통은 과거나 중요한
행사 있을 때에만 하는 것을. "
“ 옹주마마의 탄신일이 곧 중요한
행사가 아니겠는가. 이번 대사례는
아무래도 부마감을 찾기 위한
구실인 것 같으이. 어때 이혁 상유
이 참에 팔자 한번 고쳐보지
않겠나? "
“ 성필상유 거 무슨 농을 그리
심하게 하는 가. ”
“ 아니 뭘 그리 소심하게 나오나.
옹주마마께서도 참석하시는
마당에 사내대장부의 기개를
한껏 드러 낸다면 여심은 쏠리게
마련이지 암. "
성필상유답다. 나는 혀를 차며
그들의 대화를 한귀로 흘려
버렸다. 어차피 내게는 해당
사항 없는 것들 육예(六藝)도
겨우겨우 따라가는 마당에 활을
쏘기는 커녕 들어서 자세
잡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흉내만 내어 튀지 않는 걸로
“ 아니~ 장의가 있지 않나~ ”
갑자기 이혁상유가 나를 잡아
당겨 어깨를 걸치려다 작은 키에
어색하게 팔로 쓰윽 내려가
자연스럽게 잡더니 말을
이어갔다.
‘ 아니 갑자기 난 왜에~ ’
“ 장의가 못하는 게 없지 않나.
성필상유 거기다 외양까지 이리
갖췄으니 따 논 당상이 아니겠어? "
난 당황스러워 미처 말을 못하고
있자니 불쑥 석환이 나섰다.
“ 아무리 장의가 뛰어나긴 하나,
옹주마마라 하여도 선을 넘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의? "
석환은 내가 정인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에 약간 화가
난 것인지 쏘아붙이듯 물어와
분위기가 어색해져 난 급히 그들
사이에서 말을 이어 수습했다.
“ 아.. 하하.. 두 분께 미처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원래 남정네들
사이에는 절대 내어 놓으면
안 되는 것이 있는 데 그것들 중에
으뜸이 정인이지요. "
“ 아니? 장의께 정인이 있었던가? ”
“ 네. 그것이 ”
“ 그러합니다 사형들.
문판서대감의 큰따님이신 문소아
낭자께서 장의의 정인 되십니다.
아무래도 장의께서 누가 채가기라도
하실까 여태 말을 아. 끼. 신
듯합니다. "
이번에도 석환이 낚아채듯
대답한 뒤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듯한데 이름 석자 말곤 아무 것도
모르는 정인에 대해 설명을 하고
싶어도 할수 없어 우물쭈물하다
우선은 나중에 혼나기로 하고 그대로
두었다. 곤란한 표정은 당연히 짓고.
“ 너 왜 말을 하지 않았어? ”
상유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내게
따지듯 묻는 석환에게 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뭐라고
말을 하든 다 핑계거리이지 않은가.
『 넌 어차피 모른 거잖아? 』
어떻게 이 와중에 타이밍 좋게
나타나셨다. 재미있는 안주거리라도
물은 것 마냥 싱글거리는 게 아주
밉상이다. 하지만 난 당장 답을
찾아야 한다. 석환이가 화를 내면
얼마나 가는 녀석인지 몰라 오래
가면 내겐 피곤한 일이 뿐이다.
난 화를 푸는 능력이 없기에 그래서
떠났지만. 아씨~ 그때 일이 왜
생각이 나는 건지 짜증이 밀려와
얼른 얼굴을 흔든 뒤 말했다.
“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랑하고 싶지 않아서야. "
“ 뭐?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
“ 소아낭자에게 반듯하고 올곧은
모습으로 비춰지고 싶은 욕심이
컸어. 가벼운 사내로 보이는 게
얼마나 추한지 몰라? 그리고 아끼는
것은 함부로 내 보이는 게 아니야.
어떻게 귀한 이를 쉽게 내보여 다른
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도록 놔둬?
특히나 저 입이 한 없이 가벼운
성필상유의 귀에 들었으니 내일이면
온 성균관이 들썩하겠구만. 내 소아
낭자 면을 어찌 보라고 하아... "
“ 단지 그런 이유에서 그런 것이야? ”
“ 당연하지 않나. 하나밖에 없는
보물을 뺏길 수도 있으니 불안해서
어찌 잠을 들어. 안 그래도 요새
잠을 설치는 마당에. 휴우 "
“ 걱정 말아. 소아가 그리 가벼운
아이는 아니니 오히려 서운하면
모를까. "
뭐 곤란해지긴 하였으나 대충은
나의 정인의 성격을 알았으니
거기에 맞춰서 플랜을 짜야겠다.
지금으로선 홍학유를 찾기보다
저번에 홍학유와 합을 맞췄던
서리를 찾아가 엽전이라도 쥐어
주며 연서를 전해 달라하여
소아에게 답장이라도 받아
석환에게 확인시켜 줘야
한동안은 조용할 듯
“ 그건 그렇고 대사례라
이거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
“ 너라면 무예도 금방 익혔는데
그깟 활이 무슨 대수라고. "
“ 그게 아니지. 만약 옹주마마께서
내 실력을 보시고 반하시기라도
하면 크으... "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네~! 꼭 분명히 해. 옹주마마께서
오해하시지 않게 말이야. "
곧장 발끈하는 석환이를 보며 난
겉으로는 걱정 말라며 달랬고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어차피
못 하는 거 성필상유의 촉새 같은
입으로 소문이 날 테니. 그날 활
못 쏘는 건 다 정인과 석환이
때문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 가벼우면 다행이지만 여태껏
구경한 바로는 점수가 낮으면 벌이
내려지던데 감수할 수 있어? 』
월아가 장난기 싸악 빠진 표정으로
진심 걱정하는 투의 말에 난 순간
딜레마에 빠졌다.
‘ 이런 어쩌라는 거야~!! ’
생각지도 못한 갈림길에 난 오늘
밤잠도 다 잤다며 속으로 우울하게
울부짖었다. 정말 좀 쉬었다가나
싶더니 또 산이 보인다.
- 작가의말
오늘은 진짜 시원하게도 불어오는 바람 덕에 일이
힘들지 않은 날이었네요. 글 쓰는 것도 이리 힘들지
않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밤을 늘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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