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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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이
작품등록일 :
2022.05.1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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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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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11화> 그는 그림자에게 밥을 줬다고 했다

DUMMY

공일은 그 사람이 해주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는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헌데 다른 그림자였다. 공일에게 그림자는, 칼을 든 모습,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 얼굴을 뜯어먹던 모습 뿐이었는데, 그는 그림자에게 밥을 줬다고 했다. 그림자에게 이름도 붙여줬다고 했다. 그림자니까 그림이.

칼을 든 그림자에게 공일은 이름을 붙여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몸에 올라타 얼굴을 물어 뜯던 그림자에게 이름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사령이라고 했다.

사령은 그림자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했다. 그림자에게 밥을 주었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데, 도움을 요청했다니. 공일은 제가 보았던 것이 그림자일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림자를 기억하긴 했지만, 당연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미친 놈’이 칼을 들고 사람들을 쫓다가, 두 사람을 죽인.

그렇다면 그것이 칼을 든 그림자가 두 그림자를 죽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말일까? 그 두 가지가 다른 의미일 수도 있을까? 공일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자신의 몸에 올라탄 그것을 생각했다. 사람의 무게라고 하기에 조금은 가볍고, 얼굴을 물어 뜯었지만 치아의 촉감은 없었던. 내 팔을 짓누르고 자신의 얼굴을 향해 입을 벌렸지만 어떤 숨결도 느낄 수 없었던. 그저 그림자가 입을 댄 자리가 부풀고 이빨 자국이 났을 뿐이었다. 그림자의 이빨? 아닌가? 이빨이라고 믿는 것도 내 생각 뿐인가? 공일은 다시 또 목이 말라 물을 찾았다. 사령이 생수 병을 들어 건네줬다.

이제는 생수 병조차 내 손으로 찾을 수 없구나. 금고 안에 무수히 쏟아졌던 돈 뭉치는 바로 이 암흑의 댓가였구나. 공일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그날의 일과 연관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사령의 말대로라면 그림자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어떻게 어떤 이유로 연관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상관없는지도 몰랐다. 나는 아홉자리 돈을 얻었고 얼굴을 잃었다. 나는 돈뭉치를 얻고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사령의 말대로라면 얼굴을 잃게 한 것도 그림자, 두 눈을 잃게 만들었던 것도 그렇다면 그림자? 공일은 들고있던 생수 병을 와그작 구겨버렸다.


“나도 그림자가 어떻게 밥을 먹는지, 어떻게 내 말을 알아 듣는지, 왜 계속 도와달라고만 하는 건지 알지 못해요. 그냥 계속 듣고만 있어요. 어쨌든 밥을 먹는 것 같으니까 밥을 주고, 나를 향해 도와달라고 하니까 계속 듣고만 있어요.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니까···”


나는 이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이 사람에게 모든 걸 말해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이 사람만큼 내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이 사람이 유일하지 않을까?

공일은 사령의 얼굴을 찬찬히 기억했다. 짧은 커트 머리, 클리닝 이름이 새겨진 초록색 베스트. 인위적으로 만든 미소도 없이, 담담한 표정. 단정한 말투, 나를 찬찬히 뜯어 보던 눈빛. 공일은 볼 수 없지만, 사령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 좀 전에 보았던 사령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던 사령의 얼굴을.

공일은 긴 숨을 내 쉬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숨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고르지 않고 박동에 따라 출렁거리는 소리. 공일은 사령에게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이야기들을 하나씩 해주었다. 그날 칼을 든 그림자를 만났던 때부터, 트럭 아래에 숨었을 때 가졌던 두려움까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어디에도 그 사건에 관해 말하지 않고 본 적 없는 것 같은 이 세계에 관해 말했다. 그 두려움 앞에 선 느낌에 관해 공일은 상세히 말해주었다. 자신도 모르는 돈이 쏟아져 들어왔을 때에는 좋았는데, 어쩌면 그것이 공짜로 들어온 것이 아닌 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공일의 입술은 바짝바짝 말라갔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생각났다. 암흑과 대화라도 하는 것처럼, 더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수 있었다.


“나는··· 벌을 받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네?”

“왜 영화나 소설 같은 거 보면, 그런 거 있잖아요? 나도 모르게 저지른 어떤 죄가, 다른 시간, 다른 공간 속에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되돌아오는 그런 거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된 게··· 나도 모르게 내가 저지른 어떤 죄가 아닐까··· 그런 생각요. 이유없이 생기는 일은 없는 거라잖아요? 그 이유를 모를 뿐인지, 나에게 그 이유를 헤아릴 능력이 없을 뿐이지, 모든 것들이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는 거라는 이야기요. 그래서 나한테 이런 일이···”

“아뇨.”


가만히 듣기만 하던 사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호하고, 분명한 목소리였다.


“네?”

“그거··· 벌 받는 거, 아니라고요.”

“······”

“그쪽한테 일어난 그 일들, 그거 벌 받는 건 결코 아니라고요. 어떤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그것에 대한 댓가가, 얼굴이 망가지거나, 혹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 건 결코 아닐 거라고요. 그럴 리 없다고요.”


침묵에도 의미가 있다는 걸 공일은 알 것 같았다. 말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사령의 마음이 읽혀지는 것 같았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해 놓고, 사령은 한 동안 침묵했다. 공일도 아무 말 하지 못했으니 듣고 있을 리는 없었다. 듣고 있다면, 오히려 사령은 자신의 기억 속, 마음 속 어떤 말들을 듣고 있을 것이었다. 차마 누군가에게 하지 못한 말, 오직 자신만 알고 있는 어떤 말이 그에게도 있었던 거라고, 공일은 생각했다.

최근 들어 그 어떤 누구와 했던 대화보다, 더 깊고 깊은 말을 주고 받은 느낌이었다. 소통이 말이 아닌 것처럼, 앞을 보지 못하는 것도 벌 같은 게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공일은 어렴풋이 사령의 말을 이해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사령은 휴대폰을 손에 쥐어 준 채 돌아갔다. 음성으로 전화를 걸 수도 있으니, 언제든 그 분의 이름을 불러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라고 했다. 화면을 읽어주는 설정으로 변경도 해 놓을테니, 전처럼 화면을 터치하면 휴대폰이 화면을 읽어줄 거라고 했다. 신경을 쓰지 않아 몰랐고 관심을 갖지 않아 몰랐을 뿐, 휴대폰이 처음부터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읽어주는 것’인 사람도 있다고 했다. 절대 불변의 진리라고 믿는 이 세계는, 누군가에겐 완벽히 다른 세계일 수도 있는 거라고, 사령은 말했다.

그리고 그는 혹시 다른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 매일 밤 도움을 요청하는 그림이에 관해 변화가 생기면 자신도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지만 아직은 둘뿐이니,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사령은 말했다. 우린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아야하는 둘인 것 같다고.

사령이 나가고 난 후, 공일은 그와 주고 받은 말들을 곰곰이 생각했다. 정말 이 모든 일이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에 관한 일이라면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가 말한 그 그림자가 정말 사람의 일부가 아니라 그림자로 존재하는 실체라면,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인 건 분명했다. 그게 어떤 도움이든 말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쉽게 인정할 수 없을 일들까지 서로 알고 있는 사이로서 주고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공일은 손으로 금고를 더듬어 비밀번호를 눌렀다. 다행히 터치 형식이 아닌 버튼 형식이어서 네 줄로 나란한 세 개의 버튼은 손으로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몇 번의 실수를 반복하다가 문을 열었을 때, 낯선 냄새가 콧속으로 훅 스며 들었다. 한 번도 그 냄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냄새는 종이와 종이가 들러붙어 만드는 냄새일 것이었다. 특수한 종이 위에 특별한 잉크가 새겨져 만든 냄새일 것이다. 그것들이 서로 몸을 맞대고 쌓여 시간의 힘으로 얻게 된 냄새일 것이다. 돈 냄새는 하나가 아니었다. 어떤 특별한 것들의 지속적이고 지난한 냄새들의 총합이었다.

공일은 돈 뭉치를 꺼내 풀었다. 그리고 돈을 하나하나 세기 시작했다. 눈이 보일 때에는 단번에 여러 뭉치를 셌지만, 지금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한 뭉치만 세겠다고 돈을 풀었는데, 촤르륵 펼쳐진 돈이 어디에 어떻게 미끄러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얇게 펼쳐진 돈의 종이는 바닥에 달라 붙으니 손으로 단박에 가려낼 수 없었다. 여러 번 더듬고 움켜 쥐며 흩어진 지폐를 끌어 모았지만, 처음부터 이게 전부였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돈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미처 손바닥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납작한 어딘가에, 지폐 여러 장이 숨어있을 것 같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나를 놀리듯 내 등 뒤 어딘가에서. 그림자처럼?


공일은 화들짝 놀라 돈을 팽개치고 벽으로 달려갔다. 거리를 가늠하지 못해 벽에 머리를 부딪혔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스위치를 찾았다. 황급히 스위치들을 모두 눌러 켰다. 화장실 스위치까지 모두 다 한꺼번에.

그제야 공일은 식은 땀을 흘리며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그게 정말 그림자라면, 그림자라는 실체라면, 그림자를 물리칠 방법은 그거 하나뿐인 것만 같았다. (1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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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50화-마지막회> 재해 선언 22.07.31 8 0 13쪽
49 49화>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22.07.28 6 0 10쪽
48 48화> 또 다른 진화 22.07.26 7 0 10쪽
47 47화> 거짓말의 그림자 22.07.23 8 0 11쪽
46 46화> 람베오사우루스 22.07.21 9 0 9쪽
45 45화> 실체들 22.07.19 10 0 10쪽
44 44화> 영원을 만났다 22.07.16 10 0 10쪽
43 43화> 횃불처럼 타오르는 그림자 22.07.14 11 0 11쪽
42 42화> 시체의 강 22.07.12 10 0 9쪽
41 41화> 넌 안 죽었어, 무사해 22.07.09 14 1 9쪽
40 40화> 먹이기, 그림자 22.07.07 11 0 10쪽
39 39화> 영원의 손 22.07.05 12 0 10쪽
38 38화> 토탈 블랙 아웃 22.07.02 13 0 9쪽
37 37화> 관련자들 22.06.30 12 0 10쪽
36 36화> 그림자와 인간의 길 22.06.28 26 0 10쪽
35 35화> 생존의 칼 22.06.25 13 0 10쪽
34 34회> 그림자 세계의 왕 22.06.23 1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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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1화> 겁에 질린 세계 22.06.18 10 0 10쪽
30 30화> 실체인 내가 실체인 그곳으로 22.06.16 10 0 10쪽
29 29화> 붉은 번개 22.06.16 19 1 9쪽
28 28화> 받아들여야하는 끝 22.06.14 10 0 9쪽
27 27화> 오는 세상은 천국에서 누려다오 22.06.14 9 0 9쪽
26 26화> 위령제 22.06.14 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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