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자 시작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급하게 뛰고 있다. 그들이 뛰고 있는 뒤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무수히 많은 적들이 그들을 쫓고 있었다. 이들은 도망치고 있었고 계속되는 전투와 도망으로 인해 피로가 많이 누적되어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곧 적들에게 따라잡힐 것이다.
그때 단검을 든 사내가 갑자기 뒤로 돌아 서며 소리쳤다.
“먼저가!!!”
단검을 든 사내는 돌아서더니 저 멀리서 몰려오는 적들을 향해 섰다. 사내의 갑작스런 행동에 동료들 모두가 당황해 하던 가운데 무투가 차림을 한 인물이 상황을 파악하고는 사내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너 여기 남으면 죽어!”
사내는 무투가에게 멱살이 잡혔지만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누군가 남아 시간을 끌어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 사내는 자신의 생각이 변함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강한 의지가 깃든 표정으로 무투가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럼? 여기서 다같이 죽자는 거야? 내가 시간을 끌테니 너희들 먼저가!”
자신이 남아 시간을 끌겠다는 사내의 말에 동료들 모두가 막아서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서 빨리 오브를 파괴하러 간 원정대를 따라 잡아야 한다. 적은 습격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했고 미끼 작전은 실패했다. 시간이 없었다. 한명이라도 살아 돌아가서 이번 작전이 실패했음을 알려야 했다. 그래야 오브를 파괴하러 간 동료들이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알잖아? 내 스킬이 은신과 가속에 특화 되어 있다는 거, 나 혼자라면 싸우다가 도망칠 수 있어! 잠깐 시간을 끄려는 것 뿐이야”
사내는 쉬운 일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모두들 그것이 불가능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적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잠깐의 긴장이 흐르고 무투가는 사내의 눈을 바라보면서 고집을 꺽을 수 없음을 느꼈고 손의 힘을 풀었다.
“개XX, 너 이따가 보면 한 방 크게 칠테니까 각오해라”
“얼마든지”
사내는 살짝 웃으며 무투가의 말에 대답했다.
일행 중 리더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사내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
묵직하면서 많은 감정을 내포한 한마디였다.
“음 이거는 밥 정도로는 안되겠고 지난번에 사시겠다고 한 밥까지 포함해서 나중에 글로리 주점에서 한 턱 내셔야 합니다.”
사내는 긴장을 풀고자 평상시처럼 장난을 쳤다.
“짜식, 밥이 뭐고 식사가 뭐냐 원한다면 너 죽을 때까지 내가 평생 술이며 밥이며 다 사마”
중년의 남성의 눈가에 눈가가 촉촉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꼭 살아와야 한다. 꼭”
남성은 쏟아지는 감정을 참으며 말을 아꼈다.
“돌아가면 저 돼지 되겠네요 빨리 가세요”
사내는 남성의 모습에 감정이 올라옴을 느꼈다. 순간 자신의 눈물이 보일까봐 서둘러 고개를 돌려 적들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등 뒤에서 리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아서 보자”
짧은 한 마디였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한 마디였다.
그들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고 아쉬움과 사내를 남긴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사내는 살짝 동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동료들
그리고 다가오고 있는 적들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동료였던 것들
과거 사람이었을 적의 모습들이 얼핏 얼핏 남아 있는 언데드 무리가 사내의 앞에 나타났다.
비아트릭체, 아놀드, 버튼 등등
어느날 갑자기 대규모로 등장한 몬스터들로부터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들고 일어 났고 처음에는 승승장구하였다. 승리가 점점 확신이 되어가던 중 리치킹과 데스나이트 등장으로 전황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리치킹이 죽음의 오브를 이용해 시전한 주술이 성공하여 세계는 저주를 받아 버렸다. 잔혹한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죽은 아군이 언데드가 되어 부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아군이 죽으면 죽을수록 적은 늘어만 갔다. 오늘 수백의 아군이 죽으면 내일 수백의 적이 되어 돌아왔다. 가장 큰 비극은 생사를 같이 넘나들었던 동료를, 전투 후 같이 술잔을 기울였던 친구를, 서로 사랑했던 연인을
베어야만 했던 것이었다.
적의 공격에 당한 자는 일정시간이 지나면 언데드로 변해버렸고 사제들의 축복은 변하는 시간을 늦출 뿐 언데드화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오브를 파괴하기 위한 미끼 작전을 펼쳤고 작전은 실패했다. 리치킹이 미끼를 물지 않은 것이다. 처음에는 수천에 가까웠던 동료들도 어느새 자신을 포함해 몇 명만이 남아 있었다.
지금 사내의 눈앞에는 과거 같이 싸웠던 동료들이 시체가 되어 사내를 죽이려고 다가오고 있었다.
먼저 간 동료들 중 한 명이라도 꼭 살아서 오브를 파괴하러 간 원정대와 합류해야 한다. 그곳에 가서 이곳에 리치킹이 없었음을 알려줘야 한다.
그때였다.
사내는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였다.
아놀드가 쏜 활이었다.
활을 잘 쏘던 아놀드는 사내에게 단검을 던졌을 때 목표를 잘 맞추는 법을 알려줬었다. 사내는 아놀드가 자신에게 가르쳐줬던 것을 떠올리면 단검을 던졌다. 단검은 아놀드의 머리에 정확히 명중하였다.
적을 한방에 맞춘만큼 기분이 좋아야 했지만 씁쓸하였다.
사내가 아놀드의 머리를 맞힌 것에 생긴 복잡한 감정에 잠시 멈칫하는 사이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사내를 공격하였다. 허리를 둔기로 가격 당한 사내는 주춤하며 자신을 공격한 것을 바라보았다. 프라이팬이 다음 공격을 위해 날아오고 있었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사내는 몸을 움직여 프라이팬을 피했다.
사내는 속도만큼은 자신이 있었고 훈련되지 않은 자의 공격을 피하는 것은 쉬웠다.
공격을 피하고 사내가 습관적으로 반격을 하려던 찰나 사내는 자신을 공격한 언데드의 얼굴을 보았다.
버튼
비전투원이자 요리사였던 버튼은 식량과 보급을 담당했었다. 전투가 끝나고 먹은 버튼의 음식 맛은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보다도 더 맛있었다. 버튼은 프라이팬을 든 기괴한 몰골로 사내를 공격하고 있었다.
버튼의 공격을 피하는 중에 갑자기 속도가 느려진다. 사제였던 비아트릭체의 저주가 걸린 것이다. 그리고 다시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다. 사내는 화살을 가까스로 피하였다. 아놀드의 화살이었다. 머리를 맞힌 정도로 이미 죽은 언데드를 무력화 시킬 수는 없었다. 사내는 그렇게 과거의 동료들과 싸움을 계속하며 시간을 끌었다.
시간이 꽤 흐르고...
사내는 은신스킬을 써서 도망치고 있었다.
이정도 시간을 끌었으면 동료들이 무사히 원정대에게 도착했으리라. 사내는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보았다. 싸우면서 도망치다 보니 자신이 리치킹의 성 앞까지 와 있었다. 어차피 한번 죽음을 각오했던 목숨 여기까지 온김에 리치킹의 얼굴이라도 봐야 겠다는 생각으로 성안으로 들어갔다.
어딘가 이상했다. 리치킹의 성안은 비어있다시피 했다.
리치킹의 옥좌에 도착하자 탁하고 검붉은 기운을 내뿜고 있는 죽음의 오브가 놓여있었다.
‘저것만 부수면 더 이상의 언데드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사내가 오브를 부수려고 다가가려는데 말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은신스킬을 써서 몸을 숨겼다.
잠시 달빛이 성안으로 들어오고 이야기하는 두 명을 볼 수 있었다.
발디니와 그림
영웅들 중 둘이 오브의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을 포함한 6영웅이 오브까지 도달할 시간을 벌기 위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리치킹의 본대를 유인했었다. 사내가 반가운 얼굴에 은신 스킬을 풀고 그들 앞에 나서려고 할 때였다.
“누구냐!!”
그림이 어딘가로 단검을 던졌고 단검은 기둥에 날아가 박혔다. 기둥 뒤편에 있던 인물들이 나왔다. 그 얼굴들을 사내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먼저 갔던 숀, 베어드, 찰스였다. 사내는 자신의 일행이 무사히 도착했고 작전이 성공해 현재 이들이 이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숀, 베어드, 찰스는 부상을 입은 듯했고 특히 베어드는 숀과 찰스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누구하나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세 명은 발디니를 보자 기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발디니는 강력한 성력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가 강력한 성력으로 축복을 걸어주면 절대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여서 전투에 나가기전 발디니의 축복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항상 그에게 찾아가곤 했었다.
발디니는 그 축복 능력으로 인해 유명하지만 사제인 만큼 성력을 이용한 치유가 가능했다. 여전히 말소리가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세사람은 발디니에게 치유해줄 것을 부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발디니는 세사람에게 다가갔고 베어드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까부터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던 사내는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게 되었다. 발디니의 치료를 받던 베어드가 괴로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모두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베어드가 언데드가 되버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숀과 찰스가 당황하는데 그림이 찰스를 향해 단검을 날렸다.
단검은 그대로 찰스의 머리에 명중했고 상황을 파악한 숀이 발디니를 향해 검을 날렸다.
“어째서...”
잠깐의 싸움이 이어지고 부상당한 숀은 언데드가 되버린 동료와 영웅 둘을 상대하지 못했다. 그렇게 숀, 베어드, 찰스가 모두 스켈레톤이 되어버리고 그림의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발디니의 축복은 받은 사람은 절대 죽지 않는다라고 했던가 정말이지 정확한 표현이야”
순간 사내는 모든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분명 언데드화를 조심하고 있던 원정대에 왜 갑자기 언데드의 무리가 등장했는지... 원정대 일원들의 언데드화가 그렇게 빨랐는지...
모두 발디니의 축복 때문이었다.
그런 축복을 모두가 앞다투어 받고자 했던 것이다.
배신으로 인한 분노가 사내에게 끓어 올랐고 사내는 발디니와 그림에게 돌진하였다. 갑작스런 사내의 등장에 발디니와 그림 모두 당황한 듯하였고 사내는 그림과 발디니에게 단검을 날렸다.
“어째서 우릴 배신한거냐 발디니!!!”
사내는 발디니를 향해 소리쳤고 어떤 해명도 필요 없다는 그의 모습에 분노가 차올랐다. 생사를 함께 한 동료였다. 영웅들을 믿었다. 이런 결말은 원하지 않았다. 어느새 사내의 안에 분노가 가득하였고 이미 도망치기는 불가능하였다. 사내는 자신이 발디니와 그림의 상대가 안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발디니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내는 순식간에 방금 막 태어난 스켈레톤을 부수었고 기세에 놀란 발디니는 자세를 잡기 위해 뒤로 피하였다. 그때였다. 사내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내는 침착하였다. 자신이 발디니와 그림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사내는 제단의 오브를 향했고 놀란 그림이 던진 단도를 그대로 맞았다. 적의 공격을 맞으며 돌진하는 사내의 기세에 그림을 주춤하였고 사내는 그림을 밀치고 오브를 손에 들었다.
발디니와 그림 모두 놀란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봐 오브 내려놔”
그림이 놀라 소리치고 발디니가 다음 동작을 위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배신자에 빅 엿을 날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사내는 오브를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오브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순간 사내는 천장을 정면으로 보았다. 말이 나오지 않았고 자신의 뒷모습이 보였다. 발뒤꿈치, 엉덩이, 등 절대로 보일 수 없는 부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고 사내는 발디니가 자신의 몸을 양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이 다가왔고 눈이 스르르 감기었다.
[최종미션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달성율을 확인합니다. 달성율 8%]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셨습니다.]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눈 앞에 보인다.
[YES/NO]
사내는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발디니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이곳 게이트랜드의 모두를 배신하고 기만한 원정대의 영웅들에게 벌을 주고 싶었다. 눈 앞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다
사내는 YES를 눌렀다,
순간 참아왔던 분노가 터지듯 사내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사내의 온몸에 연결되어 있던 전극이 강제로 떨어져 나왔다. 분노에 가득찬 사내는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주세페 발디니!!!!”
Comment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