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해야 하는 일(2)
송태산 회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애 탁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뭐가 어쩌고 어째? 쓸데없는 짓?”
“네. 쓸데없는 짓입니다. 강독재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요?”
송태산이 잔을 손에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물론 잔이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송태산이 우명학을 봤다. 하지만 우명학은 그저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려 술을 홀짝거리고 먹을 뿐이었다.
우명학이 도움이 안 된다고 파악한 송태산이 다시 유민조를 노려봤다.
“감히 선거 기획자 따위가 뭘 안다고 나서?”
“그러게요. 선거 기획자 따위도 아는 걸 왜 모르실까?”
“뭐가 어쩌고 어째?”
송태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네도 그만 해.”
보다 못한 우명학이 한마디 했다.
그러자 유민조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하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히려 강독재를 더 자극한 꼴이 된 겁니다. 유치한 짓을 했어요. 너무 유치해서 웃음도 안 나오는 짓을 한 겁니다.”
그러면서 유민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거자금 지원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가가 있는 빌리는 것에 불과하죠. 빚을 받고 싶으면 제대로 지원하세요. 뒤에서 헛짓거리하지 말고.”
유민조는 말을 마치고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송태산은 물론 정상수의 얼굴도 굳어졌다.
“도대체 저자는 뭡니까?”
정상수 회장이 우명학에게 물었다.
“선거에 마에스트로. 저 사람이 나선 선거는 진 적이 없다는 프로죠.”
“프로는 무슨 프로. 그냥 싸가지없는 녀석이구만.”
송태산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저 친구 나에게도 저럽니다. 소리도 지르고요. 그러니 회장님이 이해하십시오.”
우명학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송태산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그런데 송 회장님이 강독재에게 감정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놈이 나한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감히 나한테.”
“심부름이요?”
“영리병원을 미끼로 말이죠. 덕분에 내 재산이 망가졌어요. 젠장.”
송태산은 정말 모든 것을 갖고 싶어 했다. 하나의 손해도 없이.
그 모습에는 우명학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래도 저 친구의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송태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럼 우리가 틀렸다는 겁니까?”
“실수를 하셨죠.”
“실수요? 어떤 실수를 했다는 겁니까?”
“강독재를 건드린 거요.”
“그러면 우린 그냥 앉아서 당하라는 겁니까? 이제 공공연하게 우리 기업들을 목표로 삼을 게 분명합니다.”
송태산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정상수가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겠죠. 하지만 얻어낼 수 있는 건 얻어내야죠. 그런데 그 기회를 걷어찬 것처럼 보입니다.”
“흥. 상관없습니다. 당선되시면 되지 않습니까?”
송태산이 우명학을 보며 말했다.
“그렇죠. 그러면 되는데······ 이게 손발이 맞아야 하거든요.”
“손발이요?”
“네. 여론을 제 쪽으로 모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나서면 저에게 여론이 모이지 않아요.”
송태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좋게 말해 여론을 모으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자신이 움직이는 데 방해된다는 것이다.
“강독재가 기업을 목표로 삼고 움직이면 여론은 누구 편일 것 같습니까?”
우명학이 송태산을 보며 물었다.
송태산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론은 언제나 기업들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의 여론은 더더욱 기업의 편이 아니었다.
“거기에 기업이 정면으로 맞서면 여론은 누구 편을 들 것 같습니까?”
“음······”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겠죠. 어차피 이제는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 겁니다.”
“뭔가 방법이 있는 겁니까?”
송태산이 물었다.
그러자 우명학이 메모 하나를 슬쩍 건넸다.
“방금 나간 그 싸가지없는 친구가 주고 간 겁니다. 이 방법뿐이라고.”
송태산은 메모를 펼쳐 읽었다.
***
생각보다 많은 기업인들이 모였다.
도일성 회장을 중심으로 서른 명 정도 되는 기업인들이 청와대 대회의실을 채우고 있었다.
문제는 기업 규모가 큰 10위권 기업은 도일성 회장의 일성 그룹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하위권을 맴도는 기업들이었다.
물론 그 기업들도 국내 100위권 안에는 들어가는 기업들이긴 하다.
그렇다고 해도 10위권 기업들에 비하면 매우 작은 규모의 기업들이었다.
국민들의 소득 격차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기업들도 소득 격차가 존재했다.
어쨌든 이 자리에 일성 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10위권이 없다는 것은 결국 나와 반대편에 서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도일성 회장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보니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준 사람들은 반겨야 할 순간이다.
“반갑습니다. 강독재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나로 향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긴 한 모양이다.
“저는 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와 계신 분들은 최소한 저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는 것 정도로 해석하겠습니다.”
여지를 준다.
무조건 동의하라고 강요하면 오히려 안 좋을 수 있다.
이 자리가 그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일 수 있다고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내심 기대했던 분들이 보이지 않지만 상관없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 이렇게 건전한 생각을 가진 기업인 분들이 모인 게 저로서는 무척 고무되는군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어색하게 도일성 회장이 먼저 나서서 대답했다.
그제야 나머지 기업인들이 대답하기 시작했다.
“별말씀을요.”
“당연히 정부 방침을 따라야죠.”
“모두 국가를 위한 일 아닙니까.”
여러 가지 인시가 오가고 나서 다시 조용해졌다.
“우선 저는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솔직한 이야기를 말이죠.”
나는 우선 기업인들에게 기회를 줬다.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그러나 먼저 나서서 이야기할 기업인은 없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기업들이 요구하는 게 없는 겁니까? 정말로?”
나는 다시 물었다.
표정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다는 얼굴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럴 때는 역시 물꼬를 트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슬쩍 도일성 회장을 바라봤다. 역시 그가 중요하다.
그에게 요구한 것이 이런 역할이리도 했다.
“노조 문제가 좀······”
도일성 회장이 마지못해 이야기를 꺼냈다.
역시 기업의 첫 이야기는 노조였다.
도일성 회장의 말에 기업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조요?”
“네. 노조 때문에 회사 업무의 피해가 큽니다. 걸핏하면 파업이니, 동맹휴업이니 일을 하지 않는 바람에 회사의 손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노조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없습니다.”
“노조를 어떻게 하길 원하는 겁니까?”
“노조 활동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건 어떨까요?”
도일성이 나를 보며 말했다.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나는 웃고 말았다.
기업인들의 인식 수준은 이 정도에 불과한 것일까?
예전 해외 기업이 국내 기업을 인수한 후 노동자들과 대화하고 싶은데 노조가 없어서 낭패를 봤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노조가 회사와는 대립지점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물론 강성이라고 하는 노조도 있고, 귀족이라고 불리는 노조도 있다.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몰되어 대의는 내팽개친 자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노조는 필요하다.
노조도 결국은 하나의 조직이다. 기업인들이 전경련을 만든 것처럼. 출발의 의도야 어떻든지 간에.
“그렇다고 쉽게 해고할 수도 없습니다. 회사로서는 정말 골칫거리입니다.”
볼멘 소리였다.
그리고 그런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맞습니다. 노조 때문에 회사의 피해가 이만저만한 게 아닙니다.”
기업인들이 모두 울상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노조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면 노조를 법으로 불허하기를 원하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먼저 나서서 대답하지 않았다. 나 역시 대답을 기다리진 않았다.
기업인들도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요구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조가 없으면 국제 사회에서 문제가 될 텐데 괜찮겠습니까?”
“네?”
몇몇 기업인들이 깜짝 놀라 물었다.
“노동 환경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무척 높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부당한 노동 착취를 일삼는 기업에 대한 퇴출 운동이라던가, 열악한 환경에 놓인 기업에 대한 불매 운동은 심심치않게 일어나고 있죠. 그런 부담을 스스로 떠안으시겠다는 건가요?”
나는 다시 물었다. 이번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노조가 없으면······ 노조를 국가가 대변하게 될 겁니다. 그건 괜찮습니까?”
그리고 결정타였다.
국가가 노조를 대신한다는 말에 기업인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냥 희망이었습니다. 아직 노조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변명하는 소리들이 이어졌다.
더 이상 이들을 기다릴 순 없다.
“좋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걸 기다려봤자 답이 안 나올 거 같으니 제가 먼저 말하죠.”
그제야 안도한 표정으로 모두들 나를 봤다.
알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게 아니라 해도 될지가 고민이었다는 것.
그래도 그런 고민이라도 한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희망이 될 거다.
“저는 기업과 전쟁을 할 생각입니다.”
“전쟁이요?”
“네. 전쟁입니다.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거든요.”
도일성 회장도 침을 꿀꺽 삼킬 정도였다.
호되게 당할수록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못한다.
아마 여기 온 기업인들은 도일성 회장의 일화를 모두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제가 기업에 요구하는 건 간단합니다. 법대로 하라는 거죠.”
나는 기업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들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몇몇은 고작 그거야?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법대로 하는 게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도일성 회장은 오히려 무표정했다.
“여러분들에게 제가 옛날얘기를 하나 해 드리죠. 아이러니하게 가장 젊은 제가 옛날 얘기를 하게 되네요.”
“하하하!”
기업인들 몇이 웃었다.
“엔론이라고 하는 대기업이 있었습니다.”
엔론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기업인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그들은 알고 있었다.
“엄청난 에너지 기업이었죠. 그런데 분식회계로 수치를 조작했습니다. 사람들을 속였죠. 천문학적 손해배상을 해야 했고, 엔론은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나는 간단하게 말을 마치고 모두를 봤다.
엔론에 대한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다. 아무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그들이 알까?
얼굴을 보면 아는 눈치다.
“지금까지의 불법은 잊겠습니다. 최소한 여기 계신 분들에 대해서 만큼은요.”
내 선언에 몇몇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다들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다가 구세주라도 만난 표정들이었다.
“대신 앞으로는 불법이 없어야 합니다.”
“다, 당연합니다.”
“그럼요.”
다들 서둘러 대답했다.
“불법 하도급도, 불법 고용도, 불법 승계도······ 무엇이든 불법은 안 됩니다. 돈을 벌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정당하게 벌라는 겁니다.”
“······”
“횡령이나 배임도, 탈세도, 비자금 조성도, 뇌물도 안 된다는 겁니다.”
“······”
“법만 잘 지키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하지만 법을 어기면······ 엔론을 생각하세요.”
내 말에 몇몇 기업인들은 딸꾹질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기업들이 이제껏 누리던 것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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