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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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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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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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택시 기사

DUMMY

"상대방의 동의 없이 임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약 손님은 차에 탄 지 약 삼십 분이 지났을 때쯤 불쑥 그런 말을 했다. 택시가 사월 시내를 반 바퀴 정도 돈 시점이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푸른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 이 더운 날씨에도 검은 베일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여자는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홱 고개를 돌리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창틀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턱을 괸 채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인데요. 그게 의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택시 기사, 이엘은 굳이 캐묻는 대신 속도를 살짝 늦췄다. 차는 미끄러지듯 한적한 구역으로 접어들었다. 슬슬 머리를 자를 때가 된 건지 앞머리가 선글라스에 걸려 거슬렸다. 그가 앞머리를 후 불자 손님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차에 탄 이후로 한 번도 웃지 않았던 손님이었다.


"머리 자를 때가 되신 모양이에요."

"항상 이발이며 면도며 하는 것들이 귀찮아서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말끔하신 모습인걸요."

"몇 번 정도 수염을 길러 볼까 생각하다 포기했죠. 수염이 맵시 없게 나는 타입이더군요."


여자는 긴장감을 조금 내려놓은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다물고, 한참을 손톱이며 머리칼, 목걸이 등을 만지작거렸다. 눈썰미가 그리 좋지 않은 그가 보기에도 그녀는 귀하신 분 같았다.


하긴, 그렇지 않다면 천하의 이엘 알체이라를 오라 가라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인맥을 썼든, 돈을 썼든, 둘 다 썼든 여자는 이엘과의 접견 날짜를 당겼다. 그래 놓고도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걸 보니 결심이 서지 않은 모양이었다.


"인내심이 없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없습니다만, 제 호기심이 인내심을 이기지 못하네요.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뭐, 당장 말하기 어려운 거라면 어쩔 수 없죠. 밤은 깁니다."


밤은 길다.

불가능한 게 없는 이 도시, 사월에서 그 사실을 이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차에 타고도 용건을 말하지 못해 빙빙 도는 손님은 발에 채도록 흔했다. 그러다가 결국 의뢰하지 않겠다며 그냥 내려 버리는 사람도 많았다. 이엘은 그런 이들 하나하나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았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죽인다는 게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제가 성함을 모르네요."

"이엘 알체이라입니다. 손님께서 편하신 대로 부르시죠."

"예쁜 이름이네요, 사냥꾼 이름이라고 하면 아무도 안 믿겠는걸요."

"택시 기사 이름으로는 어울립니까?"


여자는 또 작은 소리로 웃었다. 아무래도 평소에 웃을 일이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엘 알체이라, 그는 제국 사냥꾼이면서 동시에 택시 기사였다. 밤에만 운행하는 그의 택시를 타고자 하는 손님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르는 쥐들처럼 줄을 섰다.


그는 매일 밤 사월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지만 아무나 그를 찾아내는 행운을 잡지는 못했다.


"제국 사냥꾼을 실제로 만나보는 건 처음인데, 다른 사람들과 똑같네요."

"어떤 점이 말입니까?"

"생김새라든가, 말투라든가, 뭐 그런 것들이요."

"남들과 다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편견투성이인 사람이라 그런가 봐요."

"보통 사람들이 다 그렇죠. 그 정도면 양호한 편입니다."


일반 시민들에게 제국 사냥꾼이란 그저 사람을 죽이고도 벌을 받지 않는 사람. 그 정도로 인식되어 있으리라. 여론이 험악해질 때면 길에서 돌을 맞기도 한다고 들었다.


물론 그 이엘 알체이라에게 돌을 던질 만한 간 큰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을 터였다.

"실례지만, 혹시 결혼은 하셨나요?"

여자는 짐짓 태연한 척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의뢰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제국 사냥꾼의 일이란,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 어지간한 악인이 아니고서야 사람을 죽여 달라는 의뢰를 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손님은 망설이는 채로 똑같은 야경을 몇 번이고 구경하고 있었다.


"결혼은 안 했습니다. 결혼을 할 수도 있었을 나이겠지만요."

"그렇군요."


보통 택시 기사와 보통 승객이 나눌 법한 평범한 대화였다. 하지만 이 택시에 타는 승객 중에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제국 사냥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이 여자가 왜 이 택시에 탔을까. 이엘은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를 죽이기 위해서.

그녀가 입을 연 건 한참 동안 달리던 택시가 다시 도시의 중심부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북부인이시죠?"

"그렇습니다."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 '북부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것만으로도 이엘은 그녀에게 조금 더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제국 사냥꾼에게는 면책 특권이 있다고 들었어요."

"아시는 대로입니다."

"그 면책 특권은 혹시 대상이 북부인일 경우에만 효과가 있는 건가요?"

"면책 특권은 대상이 제국 신민이라면 그 누구든 동일하게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리 평범한 의뢰는 아닌가 보군.

제국 사냥꾼에게 들어오는 의뢰는 대부분이 북부인을 대상으로 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부인을 인간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북부인에게 비하면 수가 적은 다른 종족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엘. 이엘이라고 했었죠. 아마 제 남편은 죽게 될 거예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여자의 가면이 벗겨졌다. 딴청을 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여자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검은 베일로도 눈물 흘리는 모습을 가릴 수는 없었다.

"전···이제 어떻게 하면···우리를 도와주세요."


이엘이 운전석 왼쪽 천장에 달린 자그마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우는 손님을 위한 티슈와 물병이 여자의 눈앞에 튀어나왔다. 여자가 훌쩍거리며 눈가를 닦자 티슈에 검은 마스카라가 묻어 나왔다.


"고맙습니다. 이제야 조금 진정이······."

"천천히 말씀하시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밤은 기니까요."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요."


손님은 큰 소리로 코를 풀고 티슈를 손에 든 채 조금 민망해했다. 이엘이 조그맣게 손짓하자 여자가 들고 있던 티슈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한 건가요?"

"예전에 스승님께 잔기술을 조금 배웠을 뿐입니다."

사실은 소마법이었지만, 이엘은 절대 손님들에게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았다.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중얼중얼 늘어놓는 건 딱 질색이었다.


"제 남편은 솔리예요, 이엘 씨. 솔리에 대해 알고 계세요?"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여자는 베일을 벗어 옆자리에 가만히 두었다. 생각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한두 명 정도 만나본 적은 있습니다만 잘 알지는 못합니다."

솔리는 남부인 중 특정 부족을 칭하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엘은 사월에 자리를 잡은 이후로 제국 남부에 내려갈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제가 솔리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학교에서 배운 내용 정도뿐이죠."

솔리들은 북부인들과 거의 비슷한 외모를 하고 있었으나 키는 그들보다 월등하게 컸다. 신체 능력 또한 훌륭해서, 어지간한 북부인은 솔리와 몸싸움에서 이길 방법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완력은 물론이고 순발력, 유연성 등 모든 면에서 북부인은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그건 사실인 것 같아요."


솔리와 북부인을 구별하는 방법은 바로 눈을 보는 것이었다. 솔리들의 눈은 북부인들의 눈에서 흰자가 있을 위치를 검은 공막이 채우고 있었다.

북부인의 눈과는 척 보기에도 달라서, 그 눈으로 솔리를 무조건 구분할 수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솔리를 직접 본 적이 있으시다고요?"

"사월에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니까요."

"아아, 네. 그럴 만도 하겠네요. 사실 저는 여기 사람이 아니라서······."


이엘은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월에서 북부인과 솔리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여기가 아무리 많은 종족을 받아들이는 도시라 하더라도, 북부인과 솔리 부부라면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셨군요."

"네. 남편을 만난 이후로 사월에 온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그, 이엘 씨가 만나 본 솔리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만나 보았다고 해도 될지 잘 모르겠군요. 잠깐 마주친 것뿐이라서요."


잠깐 마주쳤지만, 그 솔리가 유별나게 강했다는 건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 번 싸워 보고 싶은 사람이었지.


"제 남편은 처음 보기에는 다소 무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아주 상냥하고 세심한 사람이에요. 길가에 떨어진 아기 새를 나무 위로 올려 주는 모습을 보고, 제가 첫눈에 반했죠."


"좋은 분이시네요."

"그렇죠? 저는 그 사람을 구하고 싶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여자는 지나치게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이엘은 그 흩어진 퍼즐 조각 같은 이야기들을 맞춰 보려 몇 번이나 시도했다.

하지만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어 결국 본인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실례지만 맨 처음 하시려던 이야기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엘은 여자가 꺼냈던 첫 마디를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임신하는 법.


"아, 의뢰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물어보셨죠? 놀랍게도 관계가 있답니다. 제가 임신을 할 수 있다면 의뢰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설명을 들었는데, 설명을 듣기 전보다 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요."

"완전히 딴소리였나. 미안해요, 이상한 말을 해서. 요즘 머릿속이 그 생각으로 가득 차 있거든요."


무슨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다고?

이엘은 이럴 때마다 자신이 선글라스를 쓰고 다닌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도무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여자는 어두운 표정으로 사월의 밤거리를 내다보았다.

"대도시는 화려하지만 무심하네요."

"저도 항상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죠. 동의해 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엘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여자가 의뢰하려는 대상이 북부인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제국 사냥꾼의 면책 특권에 관해 물어봤으니까.

여자의 남편이 솔리라고 했으니, 아마 높은 확률로 솔리겠지. 그 이엘에게도 솔리를 죽여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다른 분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 텐데. 이제 제 남편도 많이 늙었군요."

늙은 솔리라. 그는 솔리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솔리는 공막의 색이 검고, 북부인이나 다른 부족에 비해서도 키가 크고 완력이 세고, 그리고······.

수명이 짧다.

솔리들은 스무 살이 넘으면 급속도로 늙기 시작해 아무리 늦어도 서른에는 자연사한다.


"아무래도 두 분을 도와 드리기 위해서는, 두 분을 위협하는 존재가 뭔지 제가 알아야 할 것 같군요."

여자는 다시 티슈를 뽑아 눈가를 찍어 눌렀다. 하지만 그 눈가는 아까와 달리 말라 있었다.


"이엘. 우리는 솔리들을 죽여야 해요. 할 수 있나요?"

"해야만 한다면 얼마든지요."

"곧 남편의 고향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남편을 죽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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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4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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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8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7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39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3 4 12쪽
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120 귀농한 사냥꾼의 삶 22.09.27 38 4 12쪽
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5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3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0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4 4 12쪽
115 결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 것 +1 22.09.20 48 4 12쪽
114 꼬리 잡기 +1 22.09.18 55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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