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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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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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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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손님으로 들어와 연행되어 나간다는 것

DUMMY

데바는 중앙 지구의 빌딩 숲에 있었다. 중앙 지구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 상대적으로 낮은 건물들이 있는 구역에서 빌딩 숲이 있는 구역으로 가려면 육교를 하나 건너야 했다.


그 육교는 사월 최고의 건축 디자이너가 만든 작품으로, 마치 신화에나 나올 것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육교를 천국의 다리라고 불렀다. 그 다리를 건너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뜻이겠지. 확실히, 저 빌딩 숲에 있는 회사에 들어가는 건 거의 모든 이들의 꿈이었다.


"오, 돈 좀 썼나 봐."

이엘처럼, 스스로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남들과는 다른 꿈을 꿀 수밖에 없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그는 데바가 입주해 있는 빌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건물 입구에는 무려 마법으로 출입자를 식별하는 게이트가 서 있었다. 이엘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가 게이트를 통과해 로비로 걸어가는 동안,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로 방문하셨을까요?"

로비의 직원은 그를 살짝 경계했다. 못 보던 얼굴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였으니까.


"데바에 볼일이 있는데요. 이 건물 6층에 입주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엘은 품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분명 이렇게 뻔뻔하게 신분증을 꺼내는 걸 좋아하지 않던 시절도 있었는데.


"안전사냥부 소속 제국 사냥꾼 이엘 알체이라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신분증 하나만 내밀면 많은 게 해결된다는 건 너무 편했다. 이번에도 출입 관리 직원은 그의 신분증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출입증을 끊어 주었다.

이제 레이먼드 디베나를 찾기만 하면 된다.


이엘은 7층까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층계참에서는 가끔 담배 냄새가 났다. 이렇게 좋은 회사들이 모인 건물에도 몰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데바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사무실은 거의 비어 있었다.


"아, 점심시간이군요."

"네, 네! 혹시 무슨 일로 방문하셨을까요? 사전에 약속을 하고 오셨을까요?"

텅 빈 사무실에서 홀로 그를 맞이하는 직원의 가슴에는 명찰이 달려 있었다. 라로나 에일드. 이엘은 그 이름을 한 번 보고 잊어버렸다.


이름보다 기억에 남을 만한 건, 피곤함이 잔뜩 내려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아마도 부족한 잠을 채우느라 식사를 하러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레이먼드 디베나 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약속은 안 했지만."

"아, 대표님. 대표님이요. 아마 점심시간이 끝나면 오실 거예요. 오늘은 출근하셨으니까. 그런데 혹시 신작 계약하시는 작가님이신가요?"


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살면서 그를 작가로 착각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빈말로도 그다지 지적인 인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다. 이엘은 자료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데바의 직원 중에 돌연사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 아직도 상황은 비슷한 걸까? 살짝 떠보기로 했다.


"잠이 부족하신 것처럼 보이는데, 괜찮으신가요?"

"아, 네에. 조금 졸리긴 하죠. 이번 달에는 정말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빠서······."


그제야 사무실 구석에 놓여 있는 접이식 침대 두 개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그의 스승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잠을 자게 해 주는 일터는 거지 같은 곳이야. 사실 잠을 자게 해 주는 게 아니라 집에 안 보내 주는 거거든, 그게.'


"데바에 입사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저는 막내예요. 얼마 안 됐어요. 작년 얼음꽃의 달에 들어왔으니까, 아직 일 년도 못 채웠죠."


작년 얼음꽃의 달에 누군가 죽었다. 회사 휴게실에 쓰러져서. 저 멀리 휴게실이라는 글자가 붙은 문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섬뜩했다.


"원래 출판사는 다 이렇게 바쁜가요?"

"으음, 저도 잘 모르겠어요. 데바가 제 첫 회사거든요. 사람들 말로는 데바가 버티기 힘든 회사인 건 맞대요. 아, 이런 말한 거 들키면 혼나는데. 졸려서 정신이 없네요. 요즘 이것저것 깜빡깜빡하기도 하거든요. 비밀로 해 주세요."


업계에서 평판이 그리 좋지 않은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군. 이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점심시간은 아직 삼십 분이 넘게 남아 있었다.


"깜빡깜빡하다니,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거나 그런 건가요? 건망증?"

직원의 표정은 미묘했다. 묘하게 눈에 초점이 맞지 않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 술을 많이 마시면 필름이 끊기기도 하잖아요. 그런 느낌 아세요?"

"알죠."

"가끔 그런 상태가 돼요. 나는 휴게실까지 온 기억이 없는데, 정신을 차려 보면 휴게실에 있다거나."


그러고는 대화가 끊겼다. 직원은 거의 눈을 뜨고 자는 것 같은 상태였다. 불면증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엘은 진심으로 그녀를 동정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 내 몸은 여기 있어도 의식이 다른 곳에 있는 느낌이 뭔지, 그 역시 충분히 이해했다.

"차라도 한잔하시겠어요? 사다 드릴 수 있는데."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커피 한 잔 타 드릴게요."


직원은 잠이 덜 깬 듯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탕비실로 향하는 그 걸음이 워낙 불안정해 보여, 이엘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지금까지는 평범했다. 아니, 이걸 평범하다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평범하다는 건, 루시 글렌의 유서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지을 만한 사건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적어도 사람으로 죽고 싶습니다.

루시 글렌은 유서의 첫 줄을 그렇게 썼다.


단순히 과로가 힘들었다면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유서에는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은 문장들이 있었다.


직원은 탕비실에서 이엘에게 커피를 한 잔 타 주었다. 그는 불면증 때문에 커피를 마시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얼음이 든 종이컵을 받았다.


"그···에일드 씨는 안 드시나요?"

명찰은 참 좋은 물건이다.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우지 않아도 되니까. 직원은 멈칫하며 살짝 이엘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커피를 마셔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아, 직원용이 따로 있어요. 아침에 출근해서 한 잔, 점심시간에 한 잔을 마시게 되어 있거든요."

"직원용 커피가 따로 있다고요? 얼마나 대단한 거길래. 저도 궁금한데요."


직원들만 따로 마시는 커피가 있다고? 게다가 하루에 의무적으로 두 잔이나 마시도록 되어 있다니.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물론 이엘은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꽤 보편적인 건지, 아니면 남들의 상식으로도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일인지 알지 못했다.


"손님들한테는 절대 내드리지 말라고 해서요. 그래서 맛보시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해도 되는 건가? 이엘은 근본적인 의문을 가졌다. 이 직원은 이상할 정도로 많은 걸 술술 털어놓았다. 그가 아직 자신의 신원조차 밝히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나사 빠진 사람 같은데.


그는 들고 있던 커피를 쭉 마셨다. 얼마 만에 마시는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맛은 나쁘지 않은데, 오늘 잠은 다 잤군. 그 직원이 자기 몫의 커피를 막 다 탔을 때,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앗, 다들 들어오셨나 보다. 잠시만요."

직원은 커피가 든 종이컵을 내려놓고 탕비실을 떴다. 이엘은 그 틈을 타 찬장을 열어 직원용 커피 봉투를 훔쳤다. 두 개 정도면 되겠지. 주머니에 대충 챙겨 넣고, 커피가 든 종이컵을 입에 물고 사무실로 나갔다.


"그, 점심시간에 손님이 오셨는데요."

"손님?"

"네. 대표님을 만나러 오셨다던데······."


그는 식사하고 돌아온 무리에서 레이먼드 디베나의 얼굴을 찾았다. 키가 좀 큰 편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평범한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레이먼드 디베나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엘은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다시 직감했다.


"에일드 씨, 사무실에 아무나 들여보내 주면 안 된다고 저번에도······."

이 남자는 악당이다. 분명히 악한 짓을 저질렀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다, 그렇게 말이다.


이엘이 물고 있던 종이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무나가 아니라서 유감이네요, 레이먼드 디베나 씨."

그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주위에서 서성거리던 직원들을 모두 쫓아 버렸다.그러고는 이엘을 제 방으로 안내했다.


"손님한테 커피 한 잔도 안 주나?"

"뭐 하는 놈이냐?"

시작이 불손하다. 이엘은 주머니에서 아까 챙긴 커피 봉지 하나를 꺼냈다. 그걸 알아봤는지 레이먼드 디베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직원 복지가 특별한 회사던데. 하루에 두 잔이나 특별한 커피를 마시게 하다니. 나도 한 번 맛볼 수 있을까?"

"그, 그, 그걸 내려놔. 당장 여기다 두고 나가면 일이 복잡해지지는 않을 거다."


레이먼드 디베나의 방에는 세면대가 하나 있었다. 이엘은 거기로 걸어가, 아마도 양치하는 용도로 비치해 뒀을 컵에 물을 가득 받았다. 그리고 커피 봉지를 거기에 부었다.


"마셔 봐."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니면, 내가 마실까?"


양치 컵에 수돗물로 대충 탄 커피. 이엘이 그 컵을 책상에 거세게 내려놓았다. 레이먼드 디베나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려 했지만 이미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회사 말이야. 여기서 6년 동안 직원이 일곱 명이나 죽었던데. 그에 대해서 뭐 아는 거 있나?"

"내가 그걸 알아야 하나?"


이엘이 커피가 든 컵을 들어 세면대 앞의 거울로 집어 던졌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거울이 깨지고 커피가 세면대며 바닥으로 흘렀다.


"로레나였나, 뭐였나. 그 직원이 상당히 수상한 이야기를 하더라고."

라로나.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잠을 자는 것도 아닌데 기억이 뚝뚝 끊긴다고 말이야."


이엘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낮에도 몇 번씩 의식이 깜빡거리는 기분. 분명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책상에 앉아 있다든가.


"약을 먹이는 모양이지, 직원들에게?"

이상할 정도로 피곤한 직원들, 심지어 그들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과로사나 사고사로 죽어 나간다.


레이먼드 디베나의 얼굴은 이제 하얗다 못해 새파랬다. 그는 제 책상에 있는 비상벨을 누르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엘이 주먹으로 그 벨을 내려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벨은 단번에 고장이 난 듯 작동하지 않았다.


"의식이 끊긴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까지는 묻지 않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으니까.

자살한 루시 글렌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한 걸 빼앗긴 기분이 든다고.


이엘은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꼈다.

"새 장갑이야, 이거."

"대체 뭐 하는 놈이냐? 나한테 바라는 게 뭐지?"


"하나. 나는 제국 사냥꾼이야. 둘. 너한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밖으로 나가는 문 앞은 이엘이 가로막고 있다. 레이먼드 디베나는 소리조차 지르지 않았다. 그건 아마 소리쳐 봐야 바깥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겠지. 한낱 출판사의 사무실 따위에, 뭘 위해서 그 정도로 철저하게 방음 처리를 했을까.


"제, 제국 사냥꾼이라고? 나 같은 민간인을 이유 없이 죽이겠다고! 그럴 수는 없어. 함부로 그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셋. 나는 너를 죽인다고 한 적이 없어, 레이먼드 디베나. 무기 같은 건 가져오지도 않았고."


이엘은 레이먼드 디베나에게 다가가, 그 중년 남자의 배를 걷어찼다. 그는 벽에 처박혀 신음했다.


"너무 악당 같은 말이긴 한데,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어."

이어, 이엘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한 대 후려갈겼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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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정보 교환 22.10.01 27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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