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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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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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불꽃놀이가 끝난 뒤

DUMMY

연구소의 조명은 전부 꺼져 있었다. 창문은 수없이 뚫려 있었지만, 그 창 너머로 보이는 건 끝없는 어둠이었다.


"왠지 느낌이 안 좋은데요."

"같은 생각이야."


아무리 야심한 시각이라 한들, 이건 이상하다. 다른 건물도 아니고 연구소인데. 로체가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린 이엘은 근처의 가로등 역시 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뒷좌석의 차창을 두드리자 레몬이 창을 살짝 열었다.


"레몬."

"듣고 있음."

"차를 지킬 수 있겠어? 가능하면 이 조사관도 같이."


운전석에 앉아 있는 로체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에 남아 있는 건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안에 뭐가 있을지 몰라요. 여기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지."

"레몬, 거기 내 검을 좀 줘."


창문은 더 아래로 내려왔다. 레몬이 창밖으로 검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검을 받아 드는 이엘의 손을 꽉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줄 게 있음."


레몬은 손을 놓고는 제 외투에서 단추 하나를 뜯어냈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내가 이엘의 말을 들을 수 있다. 유사시에는 돌입하겠음."

"필요 없는데."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고 말한 것은 이엘 본인임."

"그래, 그래."


그는 마지못해 단추를 받아 가슴 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불길한 기분을 끌어안고 연구소 출입구로 향했다. 건물이 점점 크게 보일수록 불길함 역시 점점 더해졌다. 마침내 출입구 앞에 다다랐을 때, 불쾌한 냄새가 이엘의 코를 찔렀다.


"레몬. 들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이건 한 방향으로만 통신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잣말했다.


"뭔가가 탄 것 같은데, 여기서."

피 냄새는 아니었다. 역한 기름 냄새, 그리고 유기물이 타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출입문은 깨져 있어. 이건 마치 누군가가 차로 들이받은 듯한 모양이군."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차는 앞 유리와 보닛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지. 사고라도 난 것처럼 말이다. 문은 완전히 망가져 있어서 굳이 여닫을 필요도 없었다. 이엘은 커다란 유리 구멍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로비의 형광등이 죽어가듯 깜빡이고 있었다.


"루스."

작은 빛의 구가 그의 앞에 나타나 길을 비추었다.


출입문이 부서진 건 확실히 교통사고 때문인 모양이었다. 입간판이며 데스크가 완전히 찌그러진 채였다. 아까 그 차가 연구소의 정문을 박살 냈다고 생각하면 앞뒤가 맞았다.

"로비. 시신은 보이지 않는데, 살아 있는 사람도 없다."


이엘은 주변을 둘러보며 계단을 찾았다. 적어도 로비에서는 그리 큰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진짜는 분명 위에 있겠지.


"2층. 역시 복도 형광등이 맛이 갔어. 입구에서부터 나던 냄새가 더 심해졌다."

좋지 않은데. 이엘은 이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침을 삼켰다. 목이 바짝바짝 타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사체를 태우는 냄새 같아."


흐릿하게 깜빡이는 조명 아래로 복도의 정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복도는 깨끗했다. 양쪽으로 연구실 문이 나 있을 뿐이었다. 이엘은 가장 가까운 문 앞으로 다가가 가만히 귀를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군.


문손잡이를 돌려 밀면서 동시에 문을 걷어찼다.

"첫 번째 연구실이야. 모든 게 완전히 개박살이 났군. 비싼 장비처럼 보이는 게 있는데, 목이 부러졌어."


테이블은 두 동강이 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시신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방을 둘러봤지만 전부 비슷한 광경이었다. 장비는 망가져 있었고, 시신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2층의 마지막 연구실 문 앞이었다. 이엘이 문을 열려고 했을 때 뒤에서 강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몸을 돌려, 제게 뛰어드는 남자의 얼굴을 그대로 걷어찼다. 남자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반대쪽 벽에 처박혔다.


"누군가 있다."

그 말은 마치 신호탄 같았다. 거기서부터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엘은 두 번째로 달려드는 이의 가슴 언저리를 주먹으로 세게 쳤다. 상대는 잠시 휘청하더니 이내 다시 팔을 뻗었다. 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이엘은 몸을 숙여 팔을 피했다. 다시 머리를 들며 배를 찼다. 이번에는 아팠던 듯, 상대가 주춤거렸다. 틈을 주지 않고 검 손잡이로 목울대를 세게 치자 결국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몇 명을 쓰러뜨렸을까, 복도에는 반쯤 시체가 된 사람들이 굴러다녔다. 대여섯 명 정도 될까.


"제국 사냥꾼 제복을 입고 있어. 그렇긴 한데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이엘이 맨 처음으로 벽에 처박아 버린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코뼈가 부러진 듯 피를 흘리고 있었다. 머리를 세게 부딪치긴 했지만, 의식은 있는 듯 눈을 뜬 채였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지?"

"모든 게 곧 부러질 것이다. 너도 그렇게 된다."

"뭐라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내 그는 내장이라도 토해낼 것처럼 기침했다.

"커, 헉, 쿨럭."

"이봐, 정신 차리라고."


이엘은 그의 어깨를 잡고 두어 번 흔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입에서 피거품을 뱉으며 의식을 잃었다. 완전히 생기를 빼앗긴 눈동자는 마치 죽은 생선의 것처럼 보였다. 이엘은 그를 내팽개치고 쓰러져 있는 다른 이에게 달려갔다. 그쪽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독약을 먹는 것 같다. 이야기를 들어 볼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

복도를 굴러다니는 건 이제 시체들이었다. 그 시체들의 품을 샅샅이 뒤졌지만, 단서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단검 따위 작은 무기들만 있을 뿐. 이엘은 일단 그 무기들을 챙겼다.


앞으로 뭐가 더 나올지 모르니까.


남은 건 마지막 연구실 하나였다. 악취가 문을 뚫고 나오는 방.

"이제 마지막 방에 들어가려고. 안에서 시체 타는 냄새가 나."


주변에서 더 이상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빠끔 열린 문 안으로 재앙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엘이 문을 걷어차자 문이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후끈한 공기가 확 끼쳐 오며 선글라스에 김이 서렸다. 이엘은 거칠게 소맷자락으로 대충 닦아냈다.


"정말이야. 시체가 타고 있어."


타는 건 시신뿐이 아니다. 아마 이전에는 서류였을 법한 잿더미. 타고 남은 책상과 장비들. 시신은 방의 절반가량을 채울 정도로 바글바글했다. 언뜻 보아도 열 명은 넘어 보였다. 그들은 특수한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시신과 함께 그 섬유가 타는 냄새는 그야말로 끔찍했다.


"지옥의 냄새가 이런 게 아닐까 싶어, 레몬."

이엘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불길은 크지 않았다. 벽이나 바닥은 불에 타지 않는 소재인 듯싶었다. 종이와 나무처럼 잘 타는 것들은 이미 다 타 버렸다.


방 안을 전부 살펴보았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건 한 명도 없었다. 죽은 이들은 정황상 연구원들이었으리라. 그중 한 명의 주머니에서 타다 남은 신분증이 나왔으니 말이다.


왜 이런 중요한 걸 나무로 만드는 걸까.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물에 젖으면 금방 상하고 불에 타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데. 이래서야, 죽은 사람의 신원을 파악할 수조차 없다.


남은 불씨를 발로 밟아 끄던 이엘의 눈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들어왔다. 그는 잿더미 속에서 그 반짝이던 물체를 손에 쥐었다.

영혼석인가.


보석처럼 보이는 그 돌은, 적어도 이엘이 알고 있는 영혼석과 꽤 흡사했다. 일단은 외투 안주머니에 보관하기로 했다.


"2층에서 영혼석처럼 보이는 돌을 찾았다. 진짜인지는 로체 조사관이 확인해야 알 수 있겠어. 3층으로 가야겠다."


3층도, 4층도 상황은 똑같았다. 다른 연구실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한 상태. 복도 끝에 있는 마지막 연구실에 시신이 몰려 있었다. 누군가 습격을 해 오기에, 제압하고 상황을 물으면 자결하는 것까지 마찬가지였다.


이래서야 싸우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겠어.


영혼석처럼 보이는 돌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만이 달랐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마법사들은 언제나 적이 많았다. 하지만 여기 있던 마법사들은 고위 마법사도, 용병도 아닌 연구원들이다. 연구원들이 원한 살 만한 일을 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중앙마법부에서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그는 몰랐으니까,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레몬. 곧 이 연구소의 최고층인 5층으로 간다. 거기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무슨 단서가 있었으면 좋겠어."


이엘은 텅 빈 복도를 지나 5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불 꺼진 계단을 보니 뜬금없게도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예전에 스승 부부와 살았던 건물은 계단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었다. 귀찮다는 이유로 아무도 그걸 고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리오가 걸어 다닐 때가 되어서야 마지못해 이엘이 전등을 고쳤었다. 이런 상황에, 도대체 왜 그 시절이 떠오르는 걸까.


5층은 아래층과 구조부터가 달랐다. 복도에 문이 세 개밖에 없는 걸 보니, 연구실 하나하나의 크기가 큰 모양이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문은 소장실이겠지.


통유리 벽을 통해 연구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양쪽 연구실은 아래층과 달리 깨끗한 상태였다.


"여기는, 음. 시신이 없어. 책장과 캐비넷은 모두 비어 있지만."

남은 건 소장실뿐인가. 저 너머에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있다는 건 예감하고 있었다. 이엘은 부디 그에게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노크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와, 이 시간에 손님이라니! 우리 잔치가 벌써 소문이 다 났나 봐요, 타라."

"그야 불꽃놀이가 화려하기는 했지.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걸."


커다랗다 못해 거대한 책상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의자에 거의 드러눕듯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제국 사냥꾼 제복 차림이었다.


"어머, 어머. 혹시 이엘 알체이라? 설마 내가 아는 그 사람인가요? 정말로?"

해맑다 못해 천진난만하게까지 보이는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놀람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문가에 서 있는 이엘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약에 취해 있거나, 미쳐 버린 모양이었다.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에요.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사월 밖에서 이엘 알체이라를 만나게 될 줄이야."


여자는 붉은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미인이었다. 상당히 눈에 띄는 모습이었는데, 적어도 이엘의 기억 속에는 없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거 아시나요, 이엘 알체이라 씨? 중앙마법부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법 무기를 빼앗으려 해요. 가당키나 한가요? 제국 사냥꾼에게서 마법 무기를 빼앗다니."


이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방 안을 둘러보자 멀쩡한 캐비넷이 하나 보였다. 그건 활짝 열려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듣고 싶은데."

그는 캐비넷 안에서 두꺼운 서류철을 하나 꺼냈다. 척 보기에도 중요한 보고서처럼 보였다. 모든 게 불타 버린 곳에서 이거 하나만이 멀쩡하다니.


그가 서류철에 쓰여 있는 제목을 입속에서 한 번 읽어 보았다.

'고등 마법 무기 복제 계획에 관한 제안서.'


고등, 마법, 무기, 복제, 계획이라. 이 다섯 단어 중 그 어느 것 하나 불길하지 않은 게 없군. 한 장 넘기자 거기에는 입안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루토 시칼트라.

루토 시칼트라.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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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결착 22.12.01 25 2 12쪽
139 세 번째 만남 +1 22.11.29 40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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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실종 22.11.25 26 1 12쪽
136 유일한 목격자 22.11.24 32 1 12쪽
135 왕의 귀환 22.11.23 33 1 12쪽
134 빈틈 +1 22.11.20 71 2 12쪽
133 꽃의 공주 22.11.19 30 2 12쪽
132 신의 부산물 22.11.18 35 2 13쪽
131 진짜 이야기 +1 22.11.17 55 2 13쪽
130 책의 무덤 +1 22.11.16 33 3 12쪽
129 복수 22.10.08 42 3 13쪽
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4 3 13쪽
127 이 싸움이 끝나면 22.10.06 31 3 13쪽
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8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7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39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3 4 12쪽
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120 귀농한 사냥꾼의 삶 22.09.27 38 4 12쪽
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5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3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0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4 4 12쪽
115 결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 것 +1 22.09.20 48 4 12쪽
114 꼬리 잡기 +1 22.09.18 55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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