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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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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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고결하고 정의로운 제국 사냥꾼

DUMMY

"누가 이 모든 상황에 관해 설명을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여자는 이엘이 들고 있는 서류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약에 취한 사람처럼 그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간악한 서류. 우리는 그걸 남김없이 읽어 봤어요. 중앙마법부가 우리 목줄을 틀어쥐려 한다는 것도. 건방진 녀석들.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해."

제정신이 아니군. 여자는 확실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이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모두가 우리를 미워한다고요! 한때는 모두에게 우리가 필요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죠?"

"그래서 연구소를 쓸어 버렸다는 건가?"

"그래요. 이 녀석들을 짓밟아 버리고 싶었으니까. 감히 우리에게 반기를 들다니. 절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걸 보여 줘야 해요."


고등 마법 무기 복제 계획이라. 과연, 고등 마법 무기를 보급하려는 시도가 어느 정도 진행된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우리?"


"아이니를 따르는 고결하고 정의로운 제국 사냥꾼."

이엘은 살면서 제국 사냥꾼을 그렇게 수식하는 말을 처음 들어 보았다. 고결? 정의롭다고? 그가 혀를 찼다.


"그래? 그럼 고결하고 정의로운 나는 왜 공격했지? 밖에 싸움꾼들이 좀 있던데."

"침입자를 처리하라고 했거든요. 일이 끝나기 전에 누군가 방해하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여자는 이엘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묻는 대로 술술 털어놓았다. '우리'라는 말로 그와 자신을 묶어 놓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나.

"소장은 어디로 갔지?"


가만히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자가 몸을 들썩였다. 그가 마치 해골처럼 앙상한 손가락으로 책상 아래를 가리켰다. 그 아래에는 연구원 제복을 입은 시체가 거꾸러져 있었다. 뒤에서 칼로 난자당한 듯, 등은 상처투성이였다.

얼굴을 살펴본 건 아니었지만 정황상 그게 소장이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미쳤군."

"제정신으로 살 수 없는 시대라구요, 이엘 알체이라 씨!"

"그래서 소장을 죽였나?"

"그래요, 내가 죽였죠. 칼로 스물두 번을 찔러서."


이엘은 문득 한 달도 더 전에 만났던 감시관을 떠올렸다. 그에게는 상당히 불쾌한 경험이었다. 누구든 남에게 시험당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건. 왜 감시관이 존재하는지 알 것 같군.


"제국 사냥꾼을 무시하는 것 같다는 이유로?"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이로 입술을 뜯었다. 어릴 때 있던 버릇이었는데, 지금도 불안하거나 초조한 기분이 들 때면 가끔 그 버릇이 나오고는 했다.


"무시당하는 것 같은 게 아니에요. 우리는 무시당하고 있다니까요!"

"무시당하면 안 되나?"


"당연히 안 되죠. 내가 무슨 일을 했는데! 제국을 위해서. 다른 모든 이들을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도 소장은 비웃더군요. 누가 당신보고 제국 사냥꾼이 되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말했지."


"그래서?"

"내가 칼을 드니까 겁을 먹던데요. 잘난 마법사 아니었나? 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거지? 내가 말했죠. 다시 나를 무시해 보라고. 너를 난도질해서 네 가족이 사는 곳에 보낼 거라고."


이엘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용서를 빌더군요. 하지만 나는 용서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칼로 열두 번을 찔렀어요!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니까요. 그 영감탱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서 신분증을 봤어요. 주소를 외웠지, 그 마누라와 자식들, 손자며 손녀까지 똑같은 꼴로 만들어 줄 거니까. 들어 볼래요? 딸이 어디 사냐면, 샬라의 아침물결 지구, 별세계길의······."


여자의 머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엘이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바싹 마른 남자였다. 몸에 지방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사람이 무기를 들 수나 있을까.


"말이라도 끝까지 들어 주지 그랬어, 유노가 저승에서 슬퍼할 텐데."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으니까."


아래층에서는 아직도 시신들이 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이제 입을 열고 싶어도 열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그 총을 빼앗겨도 아무 불만도 없나 봐."

"무기를 빼앗기기 싫다고 사람들을 죽이나?"


남자가 짐짓 과장된 태도로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의 옆에는 낫처럼 보이는 도구가 놓여 있었다. 이엘은 한 번 보자마자 그게 마법 무기라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남자가 그걸 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단순히 무기를 빼앗기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야. 이래서 사월 촌놈은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지긋지긋한 궤변이었다. 남자의 입에서 그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이 연구소에 한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배후가 누구냐?"

"그런 건 왜 묻는 거냐, 사월 촌놈아."


"아무리 연구소라고 해도 마법사들이 이렇게 많은데, 너희 둘이 여기를 다 쓸어 버렸을 리 없지. 너희가 그 정도 실력이었으면 방금 저 여자 목이 저렇게 날아갔을까?"

"하, 처음에는 그냥 한 말이었는데 이거 진짜 사월 촌놈이네."


남자가 책상 아래로 내려섰다. 그는 키가 상당히 작았다. 그냥 남들보다 조금 작은 정도가 아니라, 병증으로 키가 제대로 자라지 못 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자기 낫을 집어 들었다.


"네가 타라를 죽인 건 타라가 약해서가 아니야. 죽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를 죽이는 건 더럽게 쉬운 일이에요. 상대가 마법사든, 제국 사냥꾼이든, 누구든 간에. 특히 너 같은 녀석이 누군가를 죽이는 건 모기 한 마리 잡는 것만큼 쉽다고, 이 멍청아."

"내가 그걸 모르겠나?"


"아니, 누구보다 잘 알겠지. 사람 죽일 일을 필사적으로 피해 다니는 이엘 알체이라 씨. 안 그래요?"


이엘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남자가 하는 말이 딱히 틀린 건 아니었다. 그는 아무 의뢰나 받지 않았다. 한 명이라도 덜 죽이기 위해서.


그에게 내심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역시 모르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 이쉐 알첸브라임과 똑같은 역할을 맡기고 싶었을 테니까. 그가 나쁜 녀석들에게 총을 뻥뻥 쏴대고, 거들먹거리며 자기 힘을 자랑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힘이 있는데 왜 쓰지 않을까? 그건 두려워서지. 이엘 알체이라는 그 강한 힘을 담을 그릇이 아닌 거야. 그렇지 않나?"

"강한 힘을 담을 그릇이라. 어리석은 소리군."


남자의 말 역시 들을 가치가 없는 내용이었다. 결국 내 편을 들어 줄 악인을 찾는 사람의 논리일 뿐이다.


"내가 가진 힘이 바로 나다."

이엘은 그를 여자와 똑같이 만들어 줄 생각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그때 남자가 갑자기 자기 목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그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케헥. 컥. 쿨럭······."


남자는 내장을 토할 기세로 기침했다. 금방이라도 목구멍으로 이상한 존재를 뱉어낼 것만 같았다. 이엘은 남자가 기대 있는 책상을 거세게 걷어찼다. 책상이 뒤로 넘어지며 남자의 몸 역시 바닥으로 넘어졌다.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던 남자가 순간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었다.


"모든 게 곧 부러질 것이다. 너도 곧 그렇게 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젠장."


이엘은 대충 던져두었던 서류철을 챙겼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소장의 사체를 뒤집어 얼굴을 확인했다. 찬찬히 뜯어보다가, 어차피 그가 연구소장의 얼굴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두 사람의 품을 뒤지자 제국 사냥꾼 신분증이 나왔다. 사월로 돌아가면 안전사냥부 청사에 들러야겠군. 그가 여기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자의 마법 무기를 가져가기로 했다. 주인 잃은 무기가 더 위험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니까. 차로 돌아가려는데, 레몬의 단추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추는 소장실 문 앞에 떨어져 있었다.


차에서는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인형이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다행히도 둘 다 아무 문제 없어 보였다.


"이엘, 무사히 돌아왔다. 나와 로체는 보고를 원함."

"그 단추에 대고 다 말해 줬잖아. 못 들었어?"

"물론 들었다. 하지만 약 30분 전부터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음."


대충 그가 소장실에 돌입한 시점이었다. 단추를 떨어뜨렸으니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군. 이엘은 조수석에 낫을 적당히 던져 놓았다. 뒷좌석에 몸을 싣고 서류철을 펼쳐 들었다.


"소장실 캐비넷에 이런 서류가 있더군요. 고등 마법 무기 복제 계획에 관한 제안서, 루토 시칼트라."

"소장실 캐비넷이 열려 있었다고?"

"모든 게 다 열려 있었습니다. 인간들의 내장까지."


로체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이엘이 아랑곳하지 않고 서류를 펄럭였다. 꽤 두꺼웠다. 다른 모든 서류가 불타거나 사라졌는데 이것만이 멀쩡했다.


"조사관님, 시칼트라라는 성이 누구 성이죠?"

"시칼트라? 아레인스터의 학장 이름이 아실카 시칼트라 아닌가?"


아, 과연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는다니까. 남부에 있는 제국 최대의 마법 학교, 아레인스터의 학장이 시칼트라라는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 학장한테 딸이 몇 명 있었을 터였다.


한 명이 이 제안서에 이름을 올린 루토 시칼트라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딸 중 한 명은 사생아라는 이유로 학장이 제 성을 물려주지 않는 바람에······. 학장의 밀회 상대의 성을 따 카잔치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는 거다.


그 사람이 바로, 이엘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실비나 카잔치카였다.


"무슨 내용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오히려 제안서의 내용은 굉장히 단순한 편이었다. 너무 단순해서 문제라고 해야 할까.

"고등 마법 무기의 위력을 소수의 소유자만이 독점하는 건 불공평하다. 복제해서 황제의 직속군이나 범죄 수사관들에게 보급해야 한다. 뭐 이런 내용이죠."


그 뒤로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마법 수식들이 너무 많아 읽는 걸 포기했다. 사월로 돌아가면 전문가에게 맡겨야 할 정도였다.


"치안관리부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개소리지."

"의외네요. 괜찮은 의견이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로체가 선글라스 건너편에 있는 이엘의 눈을 노려보았다.

"그보다, 연구소는 어떻던가?"


"제국 사냥꾼 두 명이 연구소에 테러를 가했습니다. 장비는 죄다 망가져 있고, 서류는 사라졌거나 불에 탔습니다. 연구원들은 거의 다 살해당한 것 같고요. 소장실에 연구소장으로 추정되는 시체가 있더군요."


로체가 모자를 벗었다. 세 번째 눈으로 연구소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엘은 레몬에게 단추를 돌려주었다. 레몬은 여전히 두 번째 단추가 터진 우스꽝스러운 차림이었다.

"범인은 잡았는지 궁금함."

"한 명은 자결했고, 한 명은 즉결처분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로체는 끙, 하고 등을 바짝 세웠다. 즉결처분이라는 말에 반응했으리라. 그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어 이엘이 한숨을 쉬자 레몬 역시 따라 했다.


연구소 안의 일당은 대부분이 약을 먹고 자결했다. 이엘이 직접 목을 친 건 여자 한 명뿐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소장을 죽였다고 증언했고, 그 기록은 레몬의 단추에 분명히 남아 있을 터였다.


"누군가를 붙잡아 증언을 들으려고만 하면 약을 먹고 목숨을 끊더군요. 도주해서 더 위험한 일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국 사냥꾼들이 고등 마법 무기 연구소를 테러했다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군."


차창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로체가 다시 모자를 썼다.

"오해하지 말고 들었으면 좋겠는데, 범인을 붙잡지 않고 죽인 이유가 있나?"

"제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여자는 소장의 가족을 해치기 위해 주소를 외우고 있었다. 만약 현장에서 도망쳤다면 분명히 더 많은 피해자가 나왔을 것이다. 이엘은 그런 일을 막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자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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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4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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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8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7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39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3 4 12쪽
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120 귀농한 사냥꾼의 삶 22.09.27 38 4 12쪽
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5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3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0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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