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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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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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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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인스터의 학장

DUMMY

이 사람, 그 사람인가? 학장의 딸이자 실비나의 이부 자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실비나와 닮을 수는 없는데. 여자는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죠. 전 이엘 알체이라입니다. 제국 사냥꾼이고요."

내 이름을 들은 여자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그리고 몇 초 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밝아졌다.


"아, 그래요! 기꺼이 도와드리죠. 전 산이라고 부르세요.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산이라, 실비나의 자매가 그런 이름이었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가명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군.


그보다 구김 없이 웃어 보이는 얼굴이 정말 실비나와 비슷했다. 모르는 사람이 얼핏 보면 같은 인물이라고 착각할 법도 했다. 물론 실비나는 절대 이런 식으로 웃지 않지만.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다시 후드를 써서 얼굴을 가렸다. 나와 산, 그리고 레몬은 언덕길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왜 학교를 이런 산 위에 짓는 걸까요?"

"보통 학교들이 산에 있는 건 부지가 부족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레인스터는 오래된 학교인데, 왜 산 위에 지었을까? 잘 모르겠네요. 나중에 한 번 알아봐야겠어요."


"산의 정기를 받기 위해서라든가?"

산은 내 농담이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었다. 그렇지만 난 진심이었는데. 마법사들이란 미신을 좋아하는 사람들 아니었나?


"그럴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학교를 짓기 위해 산을 깎아 버리면 산의 신성한 기운이 반감되는 건 아닐까요?"


나와 그녀는 한동안 그런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산이 본론을 꺼낸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실례지만, 학장님은 무슨 일로 찾으시나요?"

"영혼석의 감정을 좀 의뢰하고 싶은데요."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학장 본인이나 다른 마법사를 만나면 다 알려질 거니까.


"영혼석이라···그, 마법 무기에서 나오는 보석 같은 돌 말이죠? 그런 문제라면 확실히 학장님을 직접 만나는 게 좋겠네요."


산은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는 후드에 커다란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건 아레인스터의 교복도 아니고, 교직원들이 입을 법한 옷도 아니었다. 이래서는 다음에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절대 못 알아보겠군.


그녀는 팔을 휘둘러 소맷자락을 펄럭거리며 걷고 있었다. 정신 사나워.

"혹시 도움을 받을 만한 다른 마법사는 없을까요?"

"음, 영혼석이라면 아마 로레나 교수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을 거예요. 워낙 바쁘신 분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여기 교수님들은 다 바쁘겠죠?"

살인 사건과 연관된 문제라고 해도 도움을 주지 않을 사람은 드물겠지만 말이다. 산이 웃으며 고개를 연신 까딱거렸다.


"아무래도 그렇죠? 어쩌면 학장님이 제일 한가한 사람일지도요."

"제일 높은 사람이 제일 바빠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중요한 순간에만 일하면 된다. 그게 그분의 좌우명이거든요."

거참 무책임한 듯 책임감 있는 좌우명이네.


한참 동안 언덕길을 걸었는데도 산은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건물을 지나치고 수많은 사람을 마주쳤다. 여학생들이 나를 동경 반 의심 반의 눈초리로 바라보곤 했다.


"밖에서 손님이 오는 일이 별로 없습니까?"

"아니에요, 아레인이 얼마나 개방적인 학교인데요. 사람들이 마법 학교에 대해 갖는 편견이랑은 다르죠."


"왜 다들 저를 이렇게 쳐다보는 거죠?"

"으음~글쎄요. 미남이라서?"

나는 황당하다는 듯 산을 바라보았다.


산은 깔깔 웃으며 걸음을 재촉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실비나와 비슷했다. 실비나의 목소리보다 좀 더 가늘고 높긴 했지만.


"농담 아니에요, 저도 미남이라서 말을 걸어 본 거니까."

농담이든 아니든 이런 말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실례지만 눈이 불편하신가요? 선글라스를 끼고 계시길래요."

"햇빛에 약해서요."

거짓말은 아니다. 물론 밤에도 끼고 다니긴 하지만.


"아마 학장님도 좋아하실걸요. 그분은 젊은 미남을 굉장히 좋아하시니까."

아레인스터의 학장에 대한 소문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메모지에 적어 외웠다.


아실카 시칼트라. 젊었을 때부터 화려한 남성 편력을 자랑하고 이혼도 셀 수 없이 많이 했다. 조사해 보니 슬하에 두고 있는 자녀 중 시칼트라라는 성을 물려준 건 단 한 명이라고 한다.


실비나는 틈만 나면 그 시칼트라라는 사람에 대한 울분을 표출했었다. 뭐라고 했더라. 뭐 잘난 것도 없는 주제에 아버지를 잘 만났다는 이유로 그 성을 꿰찼다던가. 그렇게 많이 들은 이름이라서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았던 거다.


오월의 고등 마법 무기 연구소에서 그 이름을 찾아냈을 때. 그러고 보니, 시칼트라는 학회에 참석하는 바람에 연구소에 없었다고 했었지. 신병을 확보했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아마 여기 와 있을지도 모르겠군.


"조금 불쾌한 이야기였나요? 그래도 가볍게 들어주세요. 나쁜 분은 아니랍니다."

"아닙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고."


"다른 생각?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저도 궁금한데요."

"이 학교 직원이신가요?"

"아, 저요? 아니에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학장님이랑 아는 사이라서요. 휴가를 맞아 잠깐 놀러 왔어요."


휴가를 이런 곳으로 오다니. 나름대로 분위기 있긴 하지만, 학교는 기본적으로 나와 잘 안 맞았다. 어린 학생들의 에너지가 부담스러워.


"그보다 이 인형도 잘 따라오네요. 무릎 관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궁금하네. 직접 만드신 건 아니죠?"

"지인한테 빌렸습니다."


"그러실 것 같았어요. 죄송한 이야기지만 마법사처럼은 전혀 안 보이시거든요."

이게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다. 마법사처럼 보이는 건 어떤 사람일까. 그럼 나는, 제국 사냥꾼처럼은 보이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산이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오래 걷느라 힘드셨죠? 저기 시계탑 보이세요?"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법 학교라는 이름에 어울릴 만한 시계탑이 하나 서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보통 시계탑 하면 떠오르는 고딕 양식의 좁은 첨탑 지붕이 아니라는 걸까.


안타레스의 다른 건물들이 그렇듯 시계탑의 지붕 역시 크고 넓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나무들이 잔뜩 심겨 있네.


"여기 건물들은 죄다 지붕이 크던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한 번 맞혀 보실래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아주 특별한 이유는 아니에요."


머리를 굴려 봤지만, 도저히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붕을 짓는 재료가 많이 남아서 그런 거 아닌가?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산이 웃으며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비가 많이 와서 비 피할 곳을 많이 만들려고 그런 거래요."

"진짜 그런 이유입니까?"


"그렇다던데요? 어릴 때부터 저도 그 덕 좀 봤죠."

"우산을 잘 빠뜨리고 다니시나 보네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실비나가 딱 그랬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똑같을 수 있지.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아주 헛소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여튼 저 시계탑 뒤가 학장실이에요. 조금만 더 가시면 돼요!"

가장 멋진 시계탑에 학장실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학장실은 학교 부지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었다. 이런 구석에 처박혀 살다니, 모르긴 몰라도 특이한 사람이네.


"왜 이런 멀고 불편한 곳에 계시는 겁니까?"

"여기까지 오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무슨 뜻이죠?"

"학장님은 방해받는 걸 별로 안 좋아하세요."


말이 학장실이지 사실상 독채나 다름없군. 아무것도 심지 않았지만 조그만 정원까지 딸려 있었다. 이상한 식물들이나 약초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약간 실망스러웠다. 말을 하는 꽃이라든지, 사람을 공격하는 나무라든지.


산이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한 번 눌렀다.

"학장실입니다. 누구시죠?"

"산이에요. 급한 용건이 있는 손님이 오셨는데, 학장님 안에 계세요?"


"아, 학장님 말이냐···잠시만. 가능한 한 빨리 준비시킬게."

준비시킬게? 학장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라기에는 어감이 조금 이상한데.


산이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마 십 분 정도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 정도면 빨리 만나는 거예요."

"덕분에 그런 것 같네요."


나 혼자 여기까지 찾아왔다면 한 번은 문전박대를 당했겠군. 여러모로 운이 좋은 일이었다. 막간을 이용해 산이 레몬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와, 아까도 알아차리긴 했지만 정말 잘 만들었네요. 살짝 만져봐도 되나요?"

"살짝이라면 괜찮습니다."

어딜 만지려나? 얼굴?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산은 레몬의 손목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정말 만지지는 않았지만.


"이야, 역시 여기 회로가 있네요. 자동으로 계속 따라오는 게 엄청 신기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공이 많이 들어간 인형이라고 하더군요."


"이건 공이 많이 들어간 정도가 아니에요. 이런 인형을 뭐 때문에 빌리신 걸까~"

"이야기하자면 깁니다."

"그야 길겠죠? 와, 정말 흥미로운 물건인데. 옷은 벗기면 안 되나요?"


산이 레몬에게 집중한 사이에 레몬이 나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절대 안 되겠는데.

"옷 벗기는 건 좀 곤란한데요."

"괜찮아요, 잠깐 본 걸로도 좀 공부가 됐으니까."


그때 대문이 열렸다. 산은 거침없이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현관문 손잡이를 잡더니 그대로 문을 열어젖혔다.


"학장님! 제가 잘생긴 남자 데려왔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만 기절해 나자빠질 뻔했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자 산이 까르르 웃으며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이래야 빨리 내려오시거든요."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발소리에 나와 레몬의 시선이 돌아갔다. 하지만 거기서 내려온 건 아무리 봐도 학장이 아니었다.


일단 남자였고, 다음으로 지나치게 젊은 사람이었으니까. 갈색 머리의 키 큰 미남이 나와 산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학장님은 좀 걸리셔. 한 십 분은 더 기다려야 될 거 같은데."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셔츠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셔츠와 면바지에 맨발, 굉장히 편해 보이는 차림새였다.


편안한 차림새의 미남, 미남을 좋아한다는 학장에 대한 소문을 연결하지 않을 수가 없군. 어째 기분이 찝찝한데.


남자 역시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아는지 혀를 찼다.

"난 학장의 아들입니다. 내 이름은 파리스고요. 그쪽 분은?"


아실카 시칼트라의 아들? 그럼 실비나의 남자 형제가 되나. 물론 실비나와는 전혀 닮지 않았으니, 아마 아버지가 다르겠지만.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이엘 알체이라라고 합니다. 제국 사냥꾼이고요."

내 이름을 들은 남자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이상해졌다. 아까 산의 반응과도 차원이 달랐다. 분명 오묘한 표정이지만 떨떠름한 반응은 아닌데,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아, 그래. 남자는 분명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당신이 이엘 알체이라라고요?"

"그런데요."


나는 조금 껄끄러운 기분으로 슬금슬금 손을 뺐다. 그가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럼, 당신이 그 유명한 실비나의 전 남자친구군요? 맞죠?"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산이 당황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저건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해 버리면 어쩌냐는 표정인데.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하지 못한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이미 내 표정과 태도가 충분한 대답이 되었겠지.


"와, 언제 한 번은 꼭 만나 보고 싶었어요. 누가 그 미친 애랑 몇 년을 만나는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파리스, 시끄러워. 잘생긴 남자가 왔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보여줘야지."

계단 위에서 파자마를 입은 중년의 여성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말도 안 되게 편안한 복장.


그런데도 그녀에게는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만한 아우라가 있었다.

"들은 대로 미남이긴 하네. 이엘 알체이라 씨? 내가 아레인스터의 학장 아실카 시칼트라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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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8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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