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지름길.
“그건 어려워.”
“그런 겐가······.”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번거롭긴 하겠지만 소차원 이동을 이용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얼마 전 있었던 9급 던전에서 내가 빠져나온 방법도 바로 이 소차원 이동을 통해서였다.
방법은 간단했다.
소차원 이동을 통해, 소차원 공간으로 이동한다. 진입할 때는 전투 중이거나 누가 있는 곳만 아니면 어디서든 가능했다.
그렇게 이동한 소차원 공간에서 나온다. 사람이 없을만한 던전 밖의 임의 지역에 문을 열고.
소차원 공간.
처음에는 단순히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에만 기뻐했었다.
‘나만의 공간도 좋지만 사실 이 이동법이 미쳤어. 이건 뭐 개사기 이동 스킬을 공짜로 얻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여러 가지 제약사항도 있었다.
먼저, 소차원 공간에서 나올 때는 반드시 방문했던 곳이어야만 도착지 설정이 가능했다. 그것도 머리에 선명히 떠오를 정도로 비교적 최근에 방문한 곳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은, 도착지로 좌표 설정이 불가능했다.
‘그게 아니면 아까처럼 칠성이랑 그 쌩쇼를 하면서 여기로 올 이유가 없었지.’
그냥 소차원 이동을 통해 도착지를 원산도로 설정해 바로 왔으면 되니까.
그리고 정확한 거리까지는 모르겠지만, 이동 반경에도 제약이 있었다.
예를 들면 9급 던전을 빠져나올 때, 원래는 도착지를 관평동에 있는 원룸 방안으로 설정하고 싶었는데, 그 정도 거리까지는 이동이 되지 않았다.
대전의 서쪽 완전 외곽 방향의 계룡산과 대전의 북쪽에 위치한 관평동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보면,
‘도시에서 도시 단위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 하다는 소리지.’
마지막으로 이 소차원 이동은 무제한으로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번 사용하면, 최소 하루의 쿨타임이 존재했다.
때문에 소차원 이동을 바로 연달아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개사기 이동 스킬이지만 최소한의 선은 지킨 달까?’
어떻게 보면 이 차원관리자들이 보상으로 준 모든 것들이 다 그러했다.
최소한의 룰이 있었다.
아무튼 나는 할배 냥이의 부탁을 단 번에 거절했다.
물론 일단 이곳에 온 이상 돌아가는 길은 쉽다.
‘돌아갈 땐 그냥 소차원 공간으로 이동했다가 출구를 대천항 쯤에 열고 나가면 돼.’
그리고 그 길에 이 고양이들을 데려가면 분명 이들을 구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내가 왜?’
내가 무슨 동물 애호가도 아니고.
고양이들의 사정이 딱한 건 알겠지만 이들과 나는 오늘 처음 보는 사이다.
고블린 로드야 나와 뿔을 통해 일종의 계약 관계를 맺었으니 예외였지만, 이 고양이들은 다르다. 이들은 나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는 존재였다.
만약 내가 이 고양이들을 소차원 공간으로 데려갔다 치자.
‘세상에 동물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나만 있는 건 아니야.’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란 직업이 버젓이 있고, 권능을 그쪽으로 발현하거나 아니면 아예 직업 자체가 동물과 관련된 헌터들도 존재했다. 드루이드나 비스트 마스터 같은 직업들.
그들 일부가 우연히 이 고양이들과 얘기라도 하게 된다면?
‘소차원 공간이라는 곳을 드나드는 기묘한 능력을 가진 헌터가 있다는 이야기가 세상에 순식간에 퍼져나가겠지.’
그게 나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다.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아무튼 거절을 하는 내 마음도 썩 좋지는 않았다.
나도 인생이 힘들 때면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길 기다린 적이 있었으니까.
나는 감정을 애써 털어내고 처음 목표로 했던, 던전의 입구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에 집중했다.
“아까 물어본 ‘수중지옥’ 던전 말이야. 그거 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
“당연히 알고 있다네.”
‘수중지옥’ 던전은 사전조사를 했을 때 수중 동굴의 형태였다.
그러다보니 바다 밑을 통해 들어가는 입구가 여러 개 존재했는데, 예전 헌터협회에서 원산도를 버리고 철수할 때, 모든 입구를 다 파괴했다고 한다.
그래서 던전 자체의 위치를 안다고 해도, 당장 들어갈 입구를 찾는 게 문제.
다행히 이 섬에서만 20년 넘게 살아온 짬밥이 있는 할배 냥이 눈앞에 있다.
“혹시 그러면, 바다 밑으로 들어가는 방법 말고, 육지에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
애당초 바다 밑쪽을 통한 입구를 고양이에게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무슨 고양이들이 잠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할배 냥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모르는 걸 수도 있고, 알아도 그걸 내게 가르쳐 줘도 되는지를 고민하고 있겠지.’
나는 할배 냥이에게 고양이들도 좋고 나도 좋은 나름의 타협안을 제시했다.
“육지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가르쳐주면, 너희가 한동안 먹을 수 있는 먹이를 제공해줄게. 어때?”
“지금 자네는 아무런 식량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네만?”
“혹시 아공간이라고 알아? 거기에 잔뜩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알겠네, 날 따라오게나.”
거래 성립이다.
* * *
나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길을 걸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길을 틀게나. 아니, 그쪽이 아니라 조금 더 오른쪽으로. 옳거니. 이제는 위로 죽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네.”
품에 안긴 늙은 고양이가 방향을 계속 가르쳐줬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도 아니고 내 뒤를 백 마리가 넘는 고양이들이 졸졸 따라왔다.
‘많이 줄었는데도 이 정도라고?’
여기저기서 소식을 들었는지 계속 고양이들이 한 마리 두 마리 합류해왔는데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예전 섬 안의 고양이 숫자가 정점을 찍었을 때는,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지금 보니 무료 급식소 열린다는 소식 듣고 모여드는 사람들 보는 것 같네. 나도 진짜 많이 이용했었는데.’
고양이들 대부분은 오랜 시간 굶주려 왔는지 배도 홀쭉했고, 마른 게 딱 봐도 영양실조 상태였다.
저들의 눈에, 오래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옅은 기대감이 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20여분 정도를 더 걸었을까? 슬슬 언어 변환 알약의 효능이 떨어질 때가 되어 한 알을 더 복용해야 하나 싶을 때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늙은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고양이는 구석진 곳으로 가더니 아래쪽을 발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곳이네.”
바닥에는 과연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지반이 붕괴하면서 사람 한 명 정도 내려갈 만한 틈이 생긴 것 같았다.
틈새를 통해 손전등을 비추어보니 10미터 정도 아래에 물이 고여 있는 지대가 보였다.
“생각보다 깊네.”
아마 저기를 통해 계속 내려가면 던전이 있는 수중 동굴로 이어지는 구조 같았다.
고양이가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절대 찾지 못했을 길이었다.
“고마워. 덕분에 쉽게 찾았어.”
“아닐세, 인간. 거래의 조건이었지 않나?”
어쩐지 ‘거래’라는 단어에 좀 더 악센트가 들어간 느낌.
‘내가 먹튀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되나 보네.’
사실 고양이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나 역시 처음 보는 이방인일 뿐이다.
‘내가 나쁜 놈인지 좋은 놈인지 어떻게 알겠어?’
나는 초차원 상점에서 고양이 사료를 대량으로 구매한 후, 고양이들 앞에 소환했다.
고양이들은 갑자기 나타난 사료 포대들에 깜짝 놀라 이리저리 흩어졌으나, 이내 그게 먹이라는 것을 알고는 다시 우르르 모여들었다.
촥촥
굶주린 고양이들이 사료포대를 발톱으로 찢어발기고는 오랜만에 포식을 하기 바빴다.
아그작 아그작
곳곳에서 정신없이 사료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넌, 안 먹어?”
“이미 갈 때가 다 된 몸이, 먹이를 욕심내서 뭐하겠나. 젊은 녀석들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네.”
‘이거 뭐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야 뭐야?’
“그럴수록 더 챙겨먹어야지. 잠깐 기다려봐.”
나는 초차원 상점에서 따로 고품질의 고양이용 생선통조림을 사서 늙은 고양이에게 주었다.
캔 껍질을 따는 나를 보며 늙은 고양이가 한마디 했다.
“자네는 조금 특이한 인간 같군.”
“내가?”
“사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줄 수 있냐는 부탁을 했을 때 거절하는 자네의 표정에는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아 보였다네.”
“숨기는 것?”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도 거절을 하는 느낌이랄까?”
‘호오, 요것 봐라.’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고양이 눈치가 장난이 아니었다. 역시 짬밥은 무시 못 한다.
“그런데?”
“그래서 나는 자네가 굉장히 냉정하거나, 계산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네. 그런데 지금의 자네 모습은···,”
야옹-!
갑자기 고양이의 말이 다시 울음소리로 들려왔다. 약의 효능이 결국 다 떨어진 모양.
나는 뚜껑을 제거한 생선 통조림을 늙은 고양이 앞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거나 먹어. 나는 누구보다 계산적인 사람이 맞으니까.”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는 늙은 고양이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하지만 이내 주둥이를 통조림에 파묻고 게걸스럽게 먹이를 먹기 시작했다.
‘하이고, 이렇게 잘 먹으면서 남들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고 하셨어? 니가 20년 짬밥이면 나는 거의 70년 짬밥이다.’
감히 고양이 주제에 사람을 판단해? 나는 피식 웃음을 짓고는 고양이 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네.’
* * *
밧줄을 타고 천천히 내려간다.
위쪽에 있는 바위 밑동에 밧줄을 단단히 묶어놔서 떨어질 염려는 없었다.
첨벙
이윽고 발이 바닥에 닿았다.
순식간에 정강이 부분까지 잠기는 물 높이.
바닥은 비스듬히 비탈져 있었는데 바닷물에 잠긴 아랫부분은 수중동굴로 통하는 길 같았다.
“이번에는 이걸 써볼까?”
나는 초차원 상점 창을 호출했다.
【종족 변경 권한 – 50억.】
예전 초차원 상점에 처음 가게 되었을 때 봤던 상품이 나타났다. 화면을 터치하자 관련 상품이 다시 출력되었다.
【종족 변경 권한(체험판) – 일정 시간 동안에 다른 종족으로 변할 수 있게 해주는 상품입니다. 사용자가 원할시 원래 종족으로 즉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단, 이 경우에 남은 변경 시간은 그대로 사라집니다.】
【주의사항 – 체험판의 최소 구매 단위는 하루입니다. 그 이하의 시간 단위로는 구매하실 수 없습니다. 체험판은 총 10일치 까지만 구매 가능합니다. 또한, 크기 차이가 심하게 나는 종으로의 변경은 불가능합니다.】
【종족 변경 권한(체험판) – 유지 시간 및 변하고자 하는 종족의 종류에 따라 다른 가격이 부과됩니다.】
내가 알기로 물속에서 활동하는 데 있어 이 종족보다 효율이 나은 종족은 없었다.
물속의 스페셜리스트.
“시간은 일단 하루만. 어인족으로.”
【종족 변경 권한(체험판) – 24시간, 어인족 – 24,000,000원.】
이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10일 안에 이곳을 공략해야했다.
타임어택이 시작되었다.
- 작가의말
좋아요, 선작, 추천은 쭈구리 작가에게 무엇보다 큰 힘이 됩니다. ㅠ.ㅠ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님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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