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먼지가 걷히기 시작했다.
"한번 막았을 뿐인데 이제 더 이상 무적을 쓰지 못하겠어."
충격은 대단했다.
한 번 더 같은 공격을 한다면 이번에는 막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다행히 할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 때문에 살았네. 고마워."
"아니에요. 이제 피하셔야죠. 지금 먼지 때문에 앞이 안 보일 때 서둘러 도망가세요. 저놈들은 제가 막을게요."
다행히 할아버지는 내 품에 있던 탓에 피해를 입지 않은 듯 보였다.
방패를 들고 돌아서려고 할 때 할아버지가 나를 잡았다.
"아니야. 이제 됐어. 난 이제 끝이니까. 어여 도망가."
"무슨 소리세요. 빨리 도망가세요. 같이 살 수 있어요."
"아니야. 이제는 틀렸어. 자네라도 꼭 살아."
할아버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갑자기 쓰러지더니 가루가 되어 먼지와 뒤섞였다.
"할아버지. 어디 가셨어요? 장난치지 마시고 나오세요. 할아버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할아버지.
"도대체 왜."
암시장은 내 목소리로 뒤덮였다.
현실에서도 겪어 보지 못했던 고통이 느껴졌다.
이렇게 아팠구나. 왜 몰랐을까? 현실에서는 죽음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몰랐을 수밖에.
"뭐야? 노인네만 죽은 거 맞지? 다행이다. 너도 죽은 줄 알았잖아."
"그만 떠들어."
"뭐라고? 아직도 떠들 힘은 남았나 보네. 그러니까 뭐하러 힘을 낭비해. 그냥 혼자 편하게 죽게 놔두지."
서 있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일어서야 했다.
"와우. 정말 너 미쳤구나. 그 공격을 받고 살아있는 것도 기적인데 움직일 수까지 있다고? 분명 탱커라 관리자가 현무일텐데. 그래도 우리 길드에 관심 있으면 내가 추천해줄테니 들어와."
천천히 은발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내가 죽이지 않았어도 죽을 운명......."
"현의 침묵."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먹이 남자의 얼굴에 닿았다.
쾅.
남자는 뒤로 날아가 건물에 부딪혔다.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너도 똑같이 당해봐."
나는 오늘 은발의 남자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은발의 남자가 벽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래. 알겠어.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정말 죽여줄게. 어차피 너도 날 죽일 생각이잖아. 누가 죽든 우리 둘 다 사라질 테니. 내가 죽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파지직.
"라이트닝 에로우."
슉.
방패를 들 새도 없이 화살이 가슴을 관통했다. 심장이 점점 느리게 뛰기 시작했다.
"헉. 이 정도로 내가 쓰러...."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고개는 자꾸만 바닥을 향해 숙여졌다.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파란색 구두가 보였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지 그랬어? 나를 죽이지 못해서 어떡하나? 난 그래도 너를 죽이고 죽어서 속이 편한데."
"아니. 나도 편해. 너도 죽으니까."
***
눈을 떠보니 암시장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둠밖에 없었다.
이곳은 처음에 현무를 만났던 곳과 비슷했다.
"정말 죽은 거구나."
일어났을 때 고통은 없었다. 죽었으니까 당연한 건가?
"왜 또 왔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무 님이죠. 이제 전 진짜 죽었어요. 그래서 다시 왔나 봐요."
"관리자의 권한으로 아무도 못 들어오게 막아놨는데 도대체 어떻게 온 거야?"
"죽었으니까 다시 왔겠죠. 이제 전 어디로 가요?"
현무의 모습이 드러났다.
"네가 왜 죽어. 죽으면 바로 사라지는데."
"그럼 제가 죽지 않았다는 말씀이세요?"
"내 앞에 서 있는 이상 적어도 죽지는 않은 거지."
이상한데. 분명 강력한 마법을 맞고는 쓰러졌는데.
"저 파란 양복을 입은 사람과 싸우고 있었어요. 블루드래곤이라고 했는데 은발의 남자가 쓴 마법에 쓰러졌는데요."
"그러니까 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싸우는 거야?"
"그야. 사신이라고 불리는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으니까요. 아니. 죽였죠."
현무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블루드래곤이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냐?"
"네."
"그 할아버지는 그 마법 때문에 죽은 게 아니야. 네가 더 잘알잖아. 공격은 네가 막았어. 아니야?"
"그렇긴 한데. 그럼 왜 죽은 거죠?"
현무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커다란 몸이 드러났다.
"현실에서 죽었으니까. 말했잖아. 코마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오는 세계가 여기라고."
"현실에서 죽었다고요? 말이 안 돼요.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여기서 아무리 강해도 현실에서 죽으면 소용이 없어. 그 할아버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거지."
삶은 연결되어있었다. 이곳에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밖에서 버티지 못한다면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 빠르게 마지막 던전으로 향해야 살아날 수 있겠네요?"
"그래. 안타깝게도 안락사를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안락사요?"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안락사를 하는 경우도 많아."
뉴스에서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곳이 존재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랬군요. 밖이 더 잔인하네요."
"아니. 모두가 최선의 선택을 하는 거야. 그래서 누구도 원망하면 안 돼. 그저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어. 희망을 잃지 말고."
게임이 아니었구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캐릭터를 삭제하고 다시 키울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어.
"그런데 너무 해요. 왜 사신들을 죽이려고 하는 거죠?"
"그들이 짊어져야 할 벌이니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다니요. 그것도 강한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잖아요."
현무는 미소 지었다.
"레벨이 높거나 스킬이 많다고 강한 건 아니야. 그렇게 사람들이 사는 곳은 단순하지 않아."
"그럼요?"
"마음이 가장 중요해. 네가 어떤 세계를 꿈꾸고 이곳을 여행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마음이라. 게임에서는 고레벨과 좋은 아이템만 있으면 랭커가 될 수 있었는데.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럼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다시 가야지. 가서 널 나에게 보낸 놈들에게 꿀밤을 한 대씩 날려줘. 이건 명령이야. 감히 나를 귀찮게 한 죄는 톡톡히 치러야지."
갑자기 책이 한 권 나타나더니 읽어 볼 새도 없이 몸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발밑에 불빛이 생기기 시작했다.
"전 이제 가는 거죠?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을까요?"
"아니. 진짜 보지 말자."
몸이 다 사라졌을 때쯤 현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청룡한데 한 소리 해야 겠군."
***
눈을 떴을 때 파란 구두가 보였다.
"뭐야? 살아있었네. 그럼 그렇지. 내가 이렇게 운이 좋다니까. 뛰어난 탱커라 안 죽을 줄 알고 있었다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몸 상태는 완벽했다. 이번에도 현무가 도와줬겠지. 다음에 만나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일어나 은발의 남자 앞에 섰다.
"오. 이제는 마음이 조금 바뀌었지? 너 정말 죽을 뻔했다고. 오래 살고 싶으면 우리한테 와. 넌 최고의 탱커니까 우리가 받아줄게."
"그러니까 네가 오해하는 게 하나 있어. 난 탱커가 아니라 힐러야. 그리고 오늘은 흑화 좀 하려고."
"뭐라는 거야.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네. 네 레벨을 보고 말해."
들고 있던 방패를 벗었다.
"현의 전령."
오른손에 새로운 힘이 가득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현무가 너한테 전해 달랬어."
톡.
오른손을 들어 꿀밤을 때리자 은발의 남자는 쓰러졌다.
플랑코에게도 다가갔다.
"이건 네 거."
톡.
플랑코도 그 자리에서 바로 쓰러졌다.
스킬을 두번 사용하고 나니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하. 끝났구나. 그런데 인제 어쩌지? 일어나면 또다시 덤벼들 텐데."
그때 파란 양복을 입은 한 여자가 나타났다.
파란 머리의 여자는 블루 드래곤이 확실했다.
"또 나타났군. 끝도 없이 나타나는구나. 그래 해보자."
방패를 들어 여자에게 향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여자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전 블루드래곤의 앤. 당신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관리자의 명을 받아 이들을 데리러 온 것뿐입니다. 이 둘을 내어주시죠."
"그래. 데려가도 돼. 나도 이 둘이 깨어날까 봐 걱정이 많았거든."
"그럼 이만. 텔레포트."
여자는 두 명의 남자와 함께 사라졌다.
와~~~~~~~.
암시장에 있던 사신들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검은 방패를 들고 주인에게 다가가서 돌려주었다.
"말도 없이 사용해서 죄송해요. 돌려드릴게요."
"아닙니다. 이렇게 구해주셨는데 저희가 고맙죠. 그냥 쓰셔도 됩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돈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받아 주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해서."
검은 방패는 그냥 받기로 했다. 마음이 전해졌으니까.
암시장을 떠나기 전 하지와 함께 할아버지가 사라졌던 곳으로 갔다.
먼지밖에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숙여 묵념을 했다.
'죄송해요. 제가 조금만 강했어도 지켜드릴 수 있었을 텐데. 부디 편한 곳으로 가시길. 매일 기도할게요.'
***
하지와 내가 마을로 돌아왔을 때 리나와 미선이가 자신들이 산 물건들을 자랑하기 위해 뛰어오고 있었다.
"이봐. 어디 갔다 온 거야? 한참을 찾았잖아. 그래도 무기랑 방어구 좀 샀나 보네. 어디서 샀어?"
"암시장."
하지는 나를 위해 대신 대답해주었다.
"뭐야? 하지도 산 거야? 너 무기랑 방어구 못살까 봐 우리가 대신 사 왔는데."
"맞아요. 사신들에게 물건을 파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리나는 단검과 방어구를 꺼내 보여주었다.
"고마워."
하지는 우리 앞에서 방어구를 착용하고 단검을 들고는 휘둘러 보였다.
"좋아. 정말 고마워."
"그건 그렇고. 우리의 힐러는 왜 이리 힘이 없을까? 이제 또 던전을 돌아야 하는데 말이야.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정신 좀 차리고 잘 따라와."
"오늘은 조금 쉬자. 너무 피곤해."
미선이가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하지만 막아섰다.
신경쓰지 않고 주위에 있는 여관에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아빠와 엄마. 막자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줄까? 언제 가는 나도 갑자기 사라지겠지.'
불안함이 밀려들자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똑똑똑
방문이 열리자 미선이와 하지, 리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지한테 이야기는 다 들었어.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그래야 더 신나게 놀릴 수 있었을 텐데."
"뭐라고? 장난할 기분 아니니까 나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데 우리는 장난할 기분인 것 같아서 너한테 장난치는 것 같아?"
순간 멍해졌다.
"막기님.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아직 살아있으니까요. 그리고 살아서 돌아갈 거잖아요."
"맞아. 너 같은 센 힐러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힐을 못쓰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하지도 웃으며 말했다.
"같이 가자."
너무 시끄러워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들 들었지. 이제 미선이가 탱커야. 말 바꾸기 없다."
"내가 언제 그랬어? 난 메인힐러. 넌 서브힐러."
"아니지. 내가 메인 힐러고 네가 탱커야."
내일 갑자기 죽을 수도 있었지만 우선은 눈 앞에 친구들부터 지키기로 했다.
왜냐하면 나는 힐러니까. 그것도 최강의 힐러니까.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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