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죽지 못하는 남자
죽지 못하는 남자
영혼까지 얼어 버릴 것 같은 혹한의 바람이 부는 스웨덴 북부 지역, 한 무리의 용병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용병들은 막 전투가 끝난 듯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그들이 내뱉는 숨결은 금세 얼어 진눈깨비처럼 흩날렸다.
그들 중 유독 어려 보이는 소년은 추위를 참기 어려웠는지 몸을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한 사내가 소년에게 말했다.
“램블랑,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이라고.”
얼굴에 털이 수북한 사내가 자신이 마시던 브랜디를 소년에게 건넸다.
램블랑이라 불린 소년은 술병을 건네받자마자 매우 독한 알콜향에 얼굴을 찌푸렸다. 술을 많이 접해보지 못했던 소년은 냄새만으로도 취기를 느꼈지만 이내 무언가를 다짐한 듯 브랜디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이, 천천히 마시라고, 축배는 급할 것이 없다고 허허.”
털북숭이 사내가 소년을 걱정하는 것인지, 자기 몫의 술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는 것인지는 모호했지만 소년의 정신은 멀쩡했다.
오히려 소년은 브랜디의 뜨거운 기운이 목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자 그가 기억조차 할 수 없던 갓난아기 시절 어머니의 포근한 품속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앞으로 그에게 큰 도움이 될 친구와의 첫 만남은 강렬했다.
“다 마셨으면 다시 주라고, 잠깐 떨어졌다고 몸이 더 달라고 난리를 치네. 허허···”
털북숭이 사내는 멍하게 있던 소년의 술병을 급하게 뺏어서는 그가 마셨던 것의 배 이상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곧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떠들었다.
“승리 후 마시는 술!! 승리해야만 마실 수 있는 술!! 그것에서 진정한 술맛을 느낄 수 있지.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아니 살아남아 술을 부어 넣기 위해, 더 승리를 염원하게 만들지!!”
그는 더욱 신이 나서 떠들었다.
“특히나 지랄맞게 추운 북방에서의 술은 더더욱 말이야!!”
털북숭이 사내는 연신 술을 찬양하면서 마시기를 반복했다.
그의 코가 추위 때문이 아니라 취기 때문에 빨개질 무렵 소년이 말했다.
“저 전투조에 남겠습니다.”
소년은 결연한 표정으로 나름의 결단을 표현했지만 주위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물론 말 많은 털북숭이 사내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래 여기까지 왔으면 끝을 봐야지. 그래도 우리 전투조의 생존율은 부대 내에서 최고로 높다고!”
털북숭이 사내는 소년에게 위로와 축하가 섞인 말을 하며 시선을 한 곳에 고정했다.
‘물론 저 녀석 때문이지만···.’
털보의 시선이 고정된 곳엔 긴 흑발을 늘어트린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는 진한 흑발만큼이나 어두운 망토와 후드를 걸치고 있었기에 유난히 흰 얼굴이 돋보였다.
반면 그의 망토는 검게 보였지만 햇빛에 반사될 때는 검붉은 빛을 띠었다. 검붉은 피로 망토가 찌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피는 흑발의 사내의 것만은 아닌 듯했다. 이미 그가 걸어온, 선홍빛으로 변해버린 대지를 보건대 그것은 최소 수십 명의 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흑발의 사내는 무심하게 검을 닦고 있었다. 그의 검에도 역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검신이 머금은 햇살에 투영되며 붉게 빛났다.
소년, 램블랑은 무심코 그 붉은 빛깔이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첫 전투에서 구역질은 잊어버리고 말이다.
흑발의 남자는 전장에서 피의 전사이자 적들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사신으로 불렸다. 또한 별명처럼 모두가 꺼리는 죽음의 최전방에서 피를 뿌렸다.
그가 싸울 때의 모습은 마치 살인에 굶주린 악마와도 같았다. 또한 피를 갈망하는 맹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표현을 사용할 만큼 잔혹하게도 강했다. 십 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죽음의 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그 명백한 증거였다.
패전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아군이 전멸하다시피 한 전투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는 결코 도망친 적이 없었다. 수십 명의 적에게 둘러싸여도 결코 투지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수적으로 유리한 적들이 홀로 남아 맹렬히 저항하는 그를 피하는 경우가 더 많을 정도였다.
흑발의 남자는 적군은 물론 아군에게도 악명이 높았다. 아무리 아군이라고 해도 그가 적들을 도륙하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받은 동료들은 그에게 감사함을 느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전사에 대한 경외심과 살인귀에 대한 공포가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종전에 전투에서도 흑발의 남자는 무아의 지경에서 검을 휘둘렀다.
그는 방패를 주로 사용하는 최전방의 돌격부대에 속했지만 남들과 다르게 두 개의 검을 사용했다. 방어를 배제한 극단적 공격을 했기 때문이다.
흑발의 남자는 오직 적을 죽이는 것만이 삶의 이유인듯했다.
*
'살아야 해요. 부디.'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말로 인해 흑발의 남자는 잠시 집중력을 잃었다.
순간 살기를 품은 창이 그의 심장을 노렸다. 그는 가까스로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후 창 주인의 머리를 양 검을 교차해 몸에서 분리시켰다.
그러나 전장에서의 방심은 치명적이었다. 가슴은 피했으나 어깨 부분에 깊게 베인 상처로 인해 꽤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온몸은 이미 피로 물들어져 있었다. 물론 그 피의 대부분은 적들의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피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놀라운 점은 피가 곧 멈췄고 찢어진 상처가 서서히 아물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상처를 보더니 혼잣말했다.
'아쉽군.'
무엇이 아쉽다는 것일까?
그는 거의 다 아문 상처를 잠시 쳐다본 후 다시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치명적인 죽음의 검무를 췄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전사를 보유해도 병력 차이가 열배가 넘는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용병 부대는 전멸 직전의 상태였다.
흑발의 남자도 점점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혼자 남는다면 이 저주받은 몸도 영원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지겹고 지겨웠던 십 년간의 전투.
아니 그의 분노를 삭이기 위한 살육.
혹은 죽기 위해 싸웠던 그 전투가 오늘에서야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도···.
부웅----
웅장하고도 낮은 고동 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그 소리는 압도적인 병력에 의해 포위되어 괴멸 직전까지 간 용병들에게는 기적을, 그리고 흑발의 남자에게는 절망을 안겨줄 소리였다.
세 번의 울림. 적 부대의 퇴각 명령이었다.
후방 본진으로 기습한 스웨덴의 정규군이 성과를 거둔 듯했다.
고동 소리와 함께 일사불란하게 빠져가는 적들을 본 용병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나 흑발의 남자는 기쁘지 않았다. 후퇴하는 적을 추격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미 많은 피를 흘린 그는 그럴 힘이 없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었기에 언젠간 다시 만날 그녀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 흑발의 남자는 삶에 미련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의 이유이자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존재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을 수가 없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그녀의 마지막 부탁이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죽고 싶었지만 스스로 죽을 수 없었고 단지 죽기 위한 환경으로 자신을 이끌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 부탁은 역설적으로 그를 싸우게 했고 절망적 운명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게 만들었다.
죽음을 원하는 마음과 생존에 대한 본능 그리고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복잡하게 얽혀있던 흑발의 남자는 그렇게 늘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걸으며 살아갔다.
***
전투를 마치고 누운 흑발의 남자는 오늘도 꿈을 꾸었다.
늘 비슷한 꿈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꿈.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그녀를 볼 때면 꿈인 줄 안다.
그리고 그것은 그를 더욱 슬프게 했다.
그녀의 맑은 눈, 부드러운 음성, 달콤한 숨결까지도···.
모두 진짜가 아니었다.
아무리 꿈에서 그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도 그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고 그저 한낱 신기루였기 때문이다.
잠에서 깬 남자의 눈가는 자신도 모르게 젖어있었다.
그는 그의 눈가처럼 젖어버린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자신은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고···, 저주받은 삶은 탄생과 동시에 소멸했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꽤나 오래도록 꿈을 꾸고 눈을 뜨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남자는 늦은 새벽쯤 슬픔의 폭풍우 겨우 지나 잠에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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