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론18. 음흉한 음모, 드디어 시작되다
(주)태성 윤지은 주임과 강호준 과장이 청주 H반도체 FAB동과 R동간의 무전기 중계기 통화권 문제의 해결방안을 전화로 의논하고 있을 때 이재성 사장은 주거래 은행인 중기은행의 박대봉 부장을 만나고 있었다.
"어이구 이사장님, 바쁘신데 오라고해서 미안합니다."
돈줄을 쥐고 있는 은행의 부장 인지라 중소기업체 사장쯤은 우습게 보는 것 같다.
원래 본데 없이 자란 탓인지 아니면 교육을 받고 일부러 그러는 건지, 10살이나 나이가 많은 이사장에게 화를 내지 못할 정도만 존대를 한다.
"안녕하셨습니까, 박부장님! 김과장님도 안녕하세요?"
중기은행 안쪽 구석의 "기업체" 라는 팻말 아래에 낮은 칸막이로 나란히 앉아있는 박부장과 옆의 과장에게 동시에 인사하며 박부장 창구에 의자를 끌어다 앉는 이사장은 불안한 안색을 감추지 못한다.
용무가 있어서 찾아 올 때도 그렇지만, 이렇게 불려 올 때는 당연히 좋은 일은 아닐 테니까, 무슨 얘기를 듣게 될지 항상 조마조마하다.
"무슨 일로.."
이사장은 자금에 쪼들려 지난달에 신용보증기금의 중소기업 지원 융자금 6천 만원을 대출받기는 했지만, 신용보증기금 재단에서 (주)태성의 회사 재무제표와 관련자료를 심사해서 지급보증을 서 주고, 은행은 그 돈으로 대출만 해준 것이기 때문에 굽실거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려고 애쓴다.
"바쁘실 테니까 용건을 바로 말씀 드리지요."
박대봉 부장은 서울 어딘가 괜찮은 지점에서 근무하다가 금년 초에 전출되어 왔다.
두터운 진한 갈색 피부와 살집 있는 외모만 봐서는 주색잡기 좋아할 것 같은 전형적인 인상의 소유자다.
"예, 말씀 하시지요."
이사장은 몸을 약간 앞으로 당겨 낮추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한다.
"이사장님은 직원 퇴직금을 어디, 다른 은행에 적립하고 있습니까?"
뜬금없는 직원 퇴직 적립금 얘기를 듣자말자, 이재성 사장은 금새 부른 이유를 감을 잡고, 머리 속에서 궁한 답변을 생각해 낸다.
(주)태성의 주거래 은행으로, 사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매출로 수금되는 돈이나 회사에서 지출로 나가는 자금을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고있는데 추호도 숨기거나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아니요, 생각만 하고 아직은 여유가 안돼서.. 따로 적립은 못하고 있습니다."
"직원들 급여가 연봉제로 책정되어 있는 거 맞으시죠? 그러면 장부상 매달 퇴직금이 지급된 걸로 처리가 될 텐데, 어디든 비축되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이 사업 초기에는 적립을 하다가도 경영상황이 악화되면 중간에 파기하고 운영자금으로 돌려쓰는 게 현실이다. 이사장도 마찬가지다.
"예, 잘 알고는 있는데 지금은 제대로 비축을 못하고 있습니다."
기업체가 비축하든 말든 은행에서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만, 법적으로는 퇴직금을 유보하고 있어야 하니까, 이왕이면 당연히 자기 은행에 적립해달라는 얘기다.
"물론 불경기에 사업하시느라고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사정을 알아 주는 척 너스레를 떤다. 이사장은 머리 속에서 직원 10명의 퇴직금 몫을 기억해 내는데, 월 급여총액 2,400만원의 13분지 1로 계산 하면 약 185만원이 나온다.
"예, 그래서 뭐 마음만 있지, 막상 적립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라도 조금씩 부어 나가야 되겠지요.."
융자금을 대출받고 있는 입장이라 회사가 너무 비전도 없이 어려운 것처럼 보일 수는 없고 하여 아쉬운 소리로 둘러댄다.
"그러시면, 퇴직연금 적금을 드시지요! 내용은 잘 아실 거고, 이번에 우리 지점에 전에 없던 부지점장 님이 오셨는데, 실적을 못 올리면 1년후가 보장이 안됩니다. 이사장님께서 좀 도와 주시지요. 상부상조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박대봉 부장은 능수능란하게 약자인 이재성 사장의 항복을 받아내고 , 법적으로 퇴직연금제도는 강제성이 아니고 회사원들이 선택하는 것이므로 형식적이지만 직원 개개인의 동의서를 작성해서 제출해 달라는 당부로 면담을 마무리한다.
갑자기 불려와서 예정에 없던 200만원 돈을 매달, 그러잖아도 빠듯한 자금에서 떼어내 적금 들게 생겼다.
이재성 사장은 어깨가 축 늘어져 은행 문을 나가고, 박대봉 부장은 비웃는 듯한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다.
박부장은 화장실 가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 한적한 곳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예, 사장님 박대봉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박대봉 부장은 서울 용산역 근처의 중기은행 지점에 수년간 근무하고 있었다. 용산 전자랜드에는 전자제품과 부품을 판매하는 도매, 소매업체가 많이 입주해 있다.
중기은행의 고객은 상당한 숫자였고, 업체 운영이 어려워 대출을 부탁하는 업체도 많아서, 박부장은 몇 푼 안 되는 자금을 대출해 주는 대가로, 불쌍한 업체로부터 금품과 향응을 대접받으며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용산역에는 10만평이 넘는 국제업무지구가 계획 중에 있어서 유통, 운송분야의 대형업체가 들어설 전망이었다. 중기은행에서는 장래를 내다보고 용산지점에 정예화된 인원을 파견하고 대폭 물갈이 하는 바람에 박대봉은 A시의 공단 내에 있는 현재의 지점으로 좌천되어 온 셈이다.
"그래요? 박부장 수고했소. 정부장 시켜 인사 한번 하리다."
놀랍게도, 박대봉의 전화를 받는 사람은 (주)우주통신의 정선규 사장이었다.
정선규 사장과 점심 약속이 된 (주)태성의 박신배 이사는 아침에도 문을 여는 유흥가 뒷골목에서 뼈다귀 해장국으로 쓰린 속을 달래고 만족한 듯 요지로 이빨을 쑤신다.
무진전기(주) 본사가 있는 구로의 대림역에서 정선규 사장의 (주)우주통신이 있는 강북 초입의 용산역 까지는 불과 10Km 남짓한 거리라서 승용차로 30분이면 갈 수 있다.
이제 11시 조금 지났으니까 12시 약속시간까지는 여유가 있다. 박이사는 근처 유료 주차장에 밤새 세워둔, 회사가 제공해준 차 안에서 느긋하게 몸을 풀며 정사장을 만나서 나눌 얘기를 생각해 본다.
어제 오후부터 주차해서 주차비만 4만원 돈이 넘을 텐데, 지출결의서만 써 올리면 회사에서 나오니까 그까짓 것 염려할 필요도 없고, 어제 밤에 룸살롱 "여비서"에서 혼자 마신 술값도 무진전기 김태경전무 접대비로 올리면 되니까, 간만에 아가씨 벌거벗은 알몸 더듬고 탐하면서 그 동안 쌓였던 업무상 스트레스 해소한 비용으로 치부하면 그만인 것이다.
8년 전에 회전 초밥 집 운영한답시고 놀아나다가 본처와 별거중인 박이사는, 업소에서 만난 근본도 모르는 여자와 동거하고 있어 행동이 자유롭다.
"여~ 박이사, 신수가 훤하네."
약속 장소인 도가니탕 집에 먼저 가서 자리잡고 앉아있는 박이사 앞으로 (주)우주통신 정선규 사장이 69세의 노익장 같지않은 훤출한 체격과 부티나는 풍모로 걸어오며 손을 내민다.
"하이구, 정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박이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 굽혀 양손을 내밀고 정사장의 손을 붙잡아 흔들며 사족을 비튼다.
"그래, 이사장은 잘 계시고?"
거의 1년 만에 마주앉은 박이사의 행세를, 후덕해 보이면서도 예리한 눈으로 훑어보며 정선규 사장은 지나가는 인사 말처럼 이재성사장 안부를 묻는다.
"예, 그럼요. 정사장님 덕분에 우리 사장은 잘 있습니다."
숙취 했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겨 나올까 봐 신경을 쓰며 박이사가 몸을 낮추어 조아리며 굽실거린다.
그러나, 정선규 사장은 어제 밤에 박이사가 대림동에서 술 먹고, 회사 출근도 안하고 나온 줄을 이미 다 알고 있다.
지난 밤에 무진전기(주) 김태경 전무로부터 전화를 받고, 박이사가 논현동 아파트 관련 (주)우주통신의 두 가닥 방식을 알게 되었다는 언질을 받았다.
김태경전무 얘기를 전해들은 정선규사장은 "이제는 때가 되었다" 싶어, 밤 늦게 중기은행 박대봉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부장, 내일 (주)태성 이재성 사장을 만나 주면 고맙겠소."
이미 오래 전에 서로 모의가 되어있는 박부장에게 지시 같은 부탁을 했었다.
아침에는 아들 정현종 부장을 시켜 (주)태성의 박신배 이사가 제 시간에 출근을 했는지 여부를 획인해보고 나서, 박이사에게 만나자는 문자를 보냈던 것이다.
(주)태성의 과거 창립시절에 이재성사장이 맨발로 뛰어다니며 거래처로 확보한, 건축설계회사나 소방설계회사에서 수주 받아 (주)태성에서 CAD로 설계한 수십 군데 건축 현장을, 일일이 방문해서 관련되는 건설회사나 전기, 통신, 소방 공사업체 관계자들을 만나볼 생각은 안하고 아둔한 잔머리를 굴려, 발이 넓은 무진전기(주) 김태경 전무에게 중요한 건축 현장을 송두리째 전달해서 바치고는 김전무에게 빌붙어 술대접이나 하면서 영업하느라고, (주)태성의 모든 건축현장 설계내역이 (주)우주통신 정선규사장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줄도 모르는 박신배 이사는 정선규 사장에게서 무언가 얻어내 볼 희망으로 애완견 같은 몸짓을 하며 꼬리를 흔들고 앉아있다
박이사가 상상도 못할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로!
"골치 아픈 영업은 우리 유능한 박이사한테 맡겨두고, 태성 이사장은 회사에서 편하게 쉬는 모양이네. 이사장 얼굴 안 본지도 꽤 오래 된 것 같아!"
정선규 사장이 식탁 위의 물수건으로 얼굴과 반소매 셔츠만 입은 팔뚝을 닦으며 슬쩍 반응을 떠본다.
"하이고, 제가 뭐 유능하기는요.. 다~ 정사장님께서 도와주시니까, 겨우 봉급 값이나 하고 있는 거지요. 헤헤~"
주제파악이 안 되는 박이사는 자기의 영업 능력을 정사장이 인정해주는 줄 착각하고 입이 헤벌쭉해져서 황송한 웃음을 짓는다.
"박이사가 태성 온지가 벌써 5년이 돼가던가?"
정선규 사장이 준비해온 각본대로 대화를 이끌어 나간다.
박신배이사 머리 속에는 지난 5년동안의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만 선택되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예, 사장님. 벌써 5년이나 지났네요. 이사장하고 같이 와서 첫인사 드리고, 여기서 도가니탕 정~말 맛있게 먹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정사장이 자기를 만난 세월까지 기억해주니 황공하기 그지없어 "정사장님" 대신 "사장님"이 그냥 바로 튀어 나온다.
"그럼! 이 집 도가니탕은 진국이라 좀 비싸도, 귀한 손님 모실 때는 꼭 오는데.. 박이사랑 함께 와서 먹은 게 네댓 번은 되지?"
"하이고, 무슨 말씀을요! 열 번도 더 넘을 겁니다 사장님! 헤헤~"
정사장에게 그 동안은 귀한 손님으로 대접 받아온 자기라는 것을 새삼 강조하려고 만난 횟수를 뻥튀기하며 너스레를 떤다.
단골인 정사장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미리 주문되어 있는 진국 도가니탕을 주인장이 알아서 금새 날라다 차려주며 함빡 웃음으로 예의를 갖춘다.
"박이사, 오랜 만이니까 낮 술 한잔 어때?"
"하이고, 예~ 주시기만 하시면야 새벽인들 어떻습니까? 좋아하시는 이슬에 이파리 서넛 닢 띄워 드시지요!"
"하~ 하.. 역시 우리 박이사는 말하는 멋을 안다니까!"
정선규 사장이 일부러 파안대소를 하자 박신배 이사는 자기의 뛰어난 영업적 유머감각을 칭찬하는 줄 알고 벌써부터 긴장의 끈을 풀기 시작한다.
오기 전에 뼈다귀 해장국물로 허기진 뱃속을 달래기는 했지만, 잦은 술타령에 위염과 십이지장 궤양으로 반쯤 헐어있는 내장에서 속 쓰린 트림이 올라올 뻔 하던 차에, 쌀뜨물 같은 뜨끈한 진국을 후루룩 흘려 넣고 쫄깃하면서도 야들야들한 무릎뼈 물렁한 힘줄을 씹어 삼키니, 가짜 양주로 찌들었던 뱃속이 든든해진다.
콧등으로 흘러내리는 방울 땀을 훔쳐가며 열심히 먹어대는 박이사에게 술잔을 서너 배 돌린 정사장이 슬슬 본론으로 들어간다.
"우리 박이사는 음식도 참 맛있게 먹어, 응? .. 영업하러 뛰어 다니려면 아무리 도가니탕이 관절염에 좋다지만 보약도 좀 지어먹고 해야 할건데, 그래 이사장이 봉급은 후하게 주겠지?"
"봉급 말씀입니까? 어구~ 말씀도 마십시요 사장님! 강과장보다 제가 더 적게 받습니다. 사장님이나 알아주시지, 우리 이사장은 제가 고생하는 줄도 모릅니다. 음,흠..."
아직 술이 덜 깬 건지 철이 덜 든 건지, 박이사는 자기 애로사항이랍시고 안 해야 될 신세타령을 아버지한테 혼난 자식이 할아버지한테 하소연 하듯이 정사장 앞에서 늘어 놓는다.
"강과장보다 적다니! 농담은 아닐 테고, 그래 얼마나 되길래?"
"300도 안됩니다 사장님! 창피해서 어디 가서 얘기도 못합니다."
"설마 그러겠나! 내자식이긴 하지만, 정부장이 회사 규정대로 400이 넘는데.. 거, 태성 이사장이 너무 하는 것 같고만! 음.. 박이사가 이사장 고교 후배라고 하지 않았던가?"
"선배면 뭐합니까? 아니할 말로 뭐처럼 부려먹고 뼈다귀도 제대로 안 주는데요!"
"어 허~ 그래서야 쓰나! 내, 이사장을 그리 안 봤는데.."
정사장은 자기가 의도 했던 대로 박이사가 말려들어오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더 본격적으로 비틀어 놓기 시작한다.
"자, 박이사 한잔 받고 잊어벼려! 세상은 넓고 박이사는 능력있는데...태성 특허가 뭐 오래 가겠나? 혹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도 무전기 중계 특허방식 하나 갖고 있다!"
박이사는 그제서야, 오늘 정사장을 만나는 목적이 떠올라서 눈을 크게 뜨고 안경을 쓸어 올리며 더듬거려 묻는다.
"아~참, 사장님께서 그 뭐냐, 두 줄 방식.. 무전기를 만드셨다면서요?"
박이사는 벌써 또 취기가 돌기 시작한다. 2년 전에는 건설회사 부장을 접대하다가 네가 뭔데 반말 비슷하게 지껄이냐고 멱살잡이를 해서, 그 건설현장에 출입이 통제되어 이재성 사장이 크게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응, 두 가닥 방식으로 특허 내었고, 거.. 박이사도 잘아는 소방설계회사 부국방재 도면은 전부 우리 방식으로 변경 될 거야!"
"예? 부국방재 도면이 전부 사장님 방식으로 변경이 되어요? 에이~ 설마요. 거, 부국방재 황상무는 제가 꽉, 잡고 있는데요 사장님!"
그렇다!
5개 설계실에 설계 전담 직원만 80명이 넘고, 소방기술사만 7명이나 되어 소방설계회사 중에서 넘버원인 부국방재는, 이재성 사장이 특별히 공들여 어렵게 유치한 고객회사로, 어제 동남무선(주) 에서 설계의뢰 들어와 추정견적 4억이나 되는 부산 광안리 Y아파트도 소방부분 설계회사는 바로 (주)부국방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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