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더 사가 - 1부 별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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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현
작품등록일 :
2022.07.21 18:13
최근연재일 :
2023.03.3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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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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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DUMMY

애런이 한 층을 올라가자 계단 옆으로 이어진 긴 복도에 칸칸이 문들이 줄지어 있었다. 바로 옆의 문으로 가보니 밖에서 본 배의 모습에 비해서 장식이 수수한 것이 선원들 방인 것 같았다. 확인을 위해 방문을 살짝 여는데 저쪽에서 덜컹 소리가 났다. 애런은 재빨리 계단 옆의 벽에 몸을 숨겼다.


“에잇! 출발할 때만 해도 별이 가득했는데 갑자기 웬 비바람이람. 이게 다 머피 그놈이 돼지고기가 먹고 싶다고 난리를 쳐서 그래!”


갈색 두건을 쓴 선원이 투덜거리며 계단 쪽으로 바삐 왔다. 배가 창고에 있을 때보다 기울기가 좀 더 커졌지만 선원은 평지를 걷듯 빠르게 발을 놀렸다. 애런은 검집을 풀어 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선원이 계단 앞에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애런이 정수리를 강타했다.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지는 남자를 붙잡아 눕힌 애런은 옆의 문을 빼꼼 열었다. 단출한 침대와 벽선반이 있는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런은 선원을 방에 끌어다 놓고 두건을 벗겨 머리에 쓰고 문을 닫았다.


계단을 하나 더 오르자 뚫린 천정에서 빗방울이 들이쳤다. 갑판까지는 두 계단을 더 올라가야 했지만 비바람 소리와 선원들이 질러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애런은 복도의 양측을 돌아봤다. 열 걸음 정도마다 걸린 작은 유리벽등의 불빛이 길게 이어진 붉은 양탄자를 둥글게 비추었다. ‘여기가 2층이겠구나. 선미는 어느 쪽이지?’


애런은 다시 계단을 올라 갑판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거센 비바람 속에서 많은 선원들이 여기저기에서 씨름하듯 굵은 밧줄을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는 애런의 얼굴에 굵은 빗방울이 따갑게 달려들었다. 애런은 자기가 후미에 있는 돛대 근처인 것을 확인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복도를 따라 배의 뒤쪽으로 가자 금색 넝쿨로 화려하게 장식한 문들이 늘어선 공간에 이르렀다. 애런은 옆에 있는 문에 귀를 대고 인기척을 살폈다.


“정말 대공을 직접 뵈었어? 소문에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차가운 눈빛이라던데 정말 그래?”


“말도 마. 그냥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건 데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심장이 멎는 게 아니라 터지겠더라.”


“카스노아 님이 잘 대해주시지만 난 차가운 남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겠어.”


애런은 다른 문으로 옮겨 귀를 대었다.


“그 여자 말이야. 백작님이 또 새 부인으로 맞이하려는 것이겠지?”


“어머, 부인들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너그러우신 디아나 님께서 벌써 질투를 하시는 건가요?”


“질투가 아니야. 그런 머리색을 가진 여자는 흔하지 않잖아. 난 왠지 그 머리색이 불길해 보여. 그 여자의 분위기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아.”


‘이게 무슨 소리야? 백작이란 사람이 결혼하려고 아자니를 데려갔단 말이야?’ 애런은 직접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둘러 움직여서 벌어질 일을 막아야 했다. 몸을 옮겨 앞에 있는 방에 귀를 기울였는데 이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음 문을 살피려는 순간 등 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났다.


“괜찮아요, 제가 가져올게요.”


애런은 따질 겨를도 없이 황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몸을 숨겼다. 방안은 천정에서 머리 위까지 밤하늘의 먹구름 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그 사이로 늘어뜨린 여러 개의 등불에서 은은한 빛이 내려와 화려한 가구와 장식품들을 비추고 있었다.


네 개의 창살로 나눠진 창문이 벽을 따라 있고 방 끝에 놓인 기다란 책상 너머에 사람 하나가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두툼한 카펫 때문에 발소리가 나지 않아서인지 애런이 들어온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창밖에서 눈부신 빛이 번쩍였다. 호리호리한 몸을 감싼 하얀 옷 위로 칠흑 같은 검은 머리가 잘록한 허리까지 내려온 모습이 드러났다.


“리케!”


쿠르릉! 우렛소리가 터졌다. 여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또 한 번 강렬한 빛이 번쩍이며 하얀 바탕에 거미 문양이 반쯤 걸친 가면이 드러났다.


“당신은 거미?”


콰콰쾅! 천둥 소리에 애런의 말이 묻혔다. 거미는 들어온 선원이 눈만 껌뻑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먼저 입을 떼었다.


“무슨 일이냐?”


“당신이 어떻게 여기 있죠? 설마! 스승님을 죽였나요?”


거미의 가면이 옆으로 기울었다. 애런이 몇 걸음 앞으로 나오자 그늘 속의 얼굴이 드러났다. 거미는 그가 선원들의 두건을 썼지만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스승? 그자가 또 다시 제자를 둘리가 없는데. 스스로의 맹약을 깼단 말인가?”


“그분은 인정하시지 않지만 저에게는 유일한 스승님이세요. 아무튼 당신이 그분을 해쳤다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애런은 미간에 힘을 주고 검을 뽑아 거미에게 겨눴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빠르게 프라나를 모아 검에 엮었다. ‘지금 이 여자를 상대할 때가 아닌데···, 어쩔 수 없어. 이 방에서 날 그냥 내보낼 리가 없잖아.’


거미는 물끄러미 애런을 보다가 뭔가 생각난 듯 가면을 끄덕였다.


“호호호.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걱정 마라. 그자는 불구덩이에 빠져도 죽지 않을 거다.”


애런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거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때 폭포 연못에서 만난 여자애도 같이 왔느냐?”


“폭포 연못? 여자···!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애런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자신도 모르게 거미를 겨눈 자세를 풀었다.


“자기 일도 아닌데 죽으려고 나서는 품이 그때랑 똑같구나.”


“그럼 그때 그 남자를 죽인 사람이··· 당신?”


“목숨 값은 안 받아도 되니 그 아이가 어디 있는지나 말하거라.”


“그.. 그게···. 저도 알고 싶어요.”


애런은 아자니를 구하려다 리케와 함께 낭떠러지에 떨어진 이야기를 했다. 거미의 가면 속에 눈빛이 점점 매서워졌다.


“그러니까 네 여자친구 때문에 그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되었단 말이지?”


“틀림없이 리케도 저처럼 살아있을··· 컥!”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미가 소매를 떨치자 애런은 뒤로 나가떨어져 벽에 부딪혔다. 펜이 박힌 오른쪽 어깨에서 찌르는 고통이 퍼졌지만 검을 쥔 손에 프라나를 모았다.


“네놈이 여기 있다는 건 이 배에 그년이 있어서겠지? 내 그년을 찾아 네 눈앞에서 바다로 던져주마.”


거미의 목소리가 펄펄 끓는 찻주전자의 덮개처럼 부들거렸다. 애런이 벌떡 일어나 검을 겨누자마자 슉! 하고 뱀의 머리 같은 채찍끝이 세차게 날아들었다. 검으로 공격을 받아내자 몸이 공처럼 튕겨며 콰쾅! 소리와 함께 등 뒤의 벽을 뚫고 들어갔다. 방 안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두 여자가 화들짝 놀라 찻잔과 접시를 위로 던지며 요란한 비명을 질러댔다.


거미는 채찍으로 문을 두 쪽을 내고 성큼 걸음으로 방을 나와 계단에 올랐다. 애런은 등이 쑤시고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다. 검에 의지해 으- 소리를 내며 겨우 몸을 일으키자 여자들이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갔다.


애런은 어깨에 박힌 펜을 잡아빼고 망토를 찢어 단단히 묶었다. 시큰하고 쓰라린 통증이 있지만 다행히 뼈를 다치지 않아 그런대로 팔을 움직일만 했다. ‘왜 갑자기 아자니에게 해코지를 한다는 거지? 이유가 뭐든 거미보다 먼저 아자니를 찾아야 해. 뒤렉씨랑 나즈는 아직 인가?’


서둘러 계단을 오르자 아래층처럼 화려한 문과 복도가 보였다. ‘거미를 쫓아야 하지 않을까? 아냐. 두사람을 믿고 빨리 인질부터 확보하자.’ 애런이 문 쪽으로 가려는데 바로 위 갑판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저놈들이 어떻게 나온 거야!”


“호위병! 호위병!”


“한 놈도 놓치지마라!”


애런은 갑판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천둥과 비바람 속에서 사람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갈색 두건을 쓴 선원들과 군인들이 빛바랜 셔츠를 입은 사람들과 맞서고 있었는데 그중에 바삐 몸을 놀리는 은발 여자와 난쟁이가 보였다.


‘뒤렉씨? 나즈?’ 그들 주변에 어지러운 사람들의 사이를 눈에 힘을 주고 살폈지만 아자니는 보이지 않았다. 군인들이 두 사람 주변으로 몰려들자 애런은 갑판에 올라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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