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몹이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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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2.08.10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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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6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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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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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7. 잡몹 각성하다 (2)

DUMMY

눈을 뜨자마자 맞닥뜨린 건 피를 토해내는 오우거의 얼굴이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놈의 표정은 괴기스러웠다. 내 몸은 오우거가 흘린 푸른 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뒤늦게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팀원들의 얼굴도 보였다.


‘실린더에 다녀온 건 꿈이 아니었구나.’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나는 실린더에 있었다. 그게 내 심연을 형상화한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물리적인 장소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내가 지금 여기에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괜찮아, 안 대리?”

“야, 현중아. 정신 좀 차려봐!”


팀원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엄청난 타격으로 아직도 고통스러웠지만, 다행히 나는 살아 있었다. 몸속에서 두 가지 힘이 내 육체를 지탱하는 게 느껴졌다. 하나는 라이칸스로프의 강건한 육체에서 오는 회복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열쇠의 보살핌이었다.


“이 망할 개새···.”


개의 형상을 한 위키를 생각하니 또 욕지기가 치밀다가도, 고통이 밀려와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망할. 기껏 얻은 힘에 ‘락(Lock)’을 걸어놓다니. 문을 부순 앙갚음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대뜸 욕을 하자 팀원들은 내가 오우거에게 분통을 터뜨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우거 이제 죽었어요 안 대리님. 진정해요.”


서윤지 사원이 마치 처치 곤란한 취객을 다루듯 나를 가만히 타일렀다. 그래, 진정하자. 중요한 건 지금부터라도 시나리오대로 하는 것이다. 신평재와 이서영도 지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이 몸으로 탈출은 어려워요···우선 504호로 갑시다.”


팀원들의 부축을 받아 처음에 목표했던 504호실로 들어갔다. 팀원들은 아직 공포에 떨고 있었다. 조금 전에 목숨이 날아갈 뻔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오우거의 등장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지만, 우리 계획은 오히려 더 그럴싸해졌다. 그건 바로 공포에 질린 팀원들에게 타협안을 내미는 것.


‘올 때가 됐는데···.’

“으아아아악.”


옳지. 황재영이 비명과 함께 발작하듯 방아쇠를 당겼다. 덜걱. 하지만 탄창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다른 팀원들도 모두 놀라서 혼비백산했다. 황재영의 총구가 향한 곳에는 로봇 고블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팀원들이 한바탕 난리 치는 걸 지켜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위층에서 왔다.”


아니, 그 말투는 뭐야. 떡이라도 돌릴 거야? 다행히 잠시 침묵한 직후 로봇 고블린의 말투가 싹 바뀌었다.


“내 건물에 숨어든 쥐새끼들이 너희냐.”


너무 뻔해서 민망할 정도이지만 저건 좀 낫군. 우리 눈앞에 나타난 건 신평재의 ‘가상의 파트너’ 스킬로 만든 파트너다. 가상의 파트너 스킬은 로봇 고블린에게든 인간형 로봇에게든 그의 권한을 거의 위임할 수 있다. 지금의 말투는 아마 신평재가 이서영의 협박 취향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결과겠지.


“무슨 생각으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허락한 적이 없다.”


팀원들은 일제히 나를 돌아봤다. 믿을 건 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팀원들의 표정이 다시 공포로 물들었다. 물론 저 로봇 고블린을 배후 조종하는 신평재와 ‘짜고 치는 고스톱’이긴 하지만, 지금은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때 고 부장이 앞으로 나섰다.


“여긴 원래 우리 건물이에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 부장의 집안을 얘기하는 것이다. 로봇 고블린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미안하군.”

“네?”

“내가 빼앗은 후로 줄곧 내 소유인 줄 알았어. 그런데 사실 내 착각이었다는 거지?”

“네.”


고 부장은 당차게 대답했다. 대화가 통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로봇 고블린은 다음 순간 잔인하게 말했다.


“그럼 다시 빼앗아가.”


고 부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억지인가. 그런 말을 하고 싶을 거다.


“인간의 기준으로 소유는 계약에 따라 주고받는 것이겠지만, 게이트 몬스터는 뺏거나 빼앗기는 게 전부야. 내가 이미 한 번 빼앗은 걸 다시 너희들 소유로 하려면 나한테 빼앗아가라고.”


엄밀히 따지자면 논리라는 것 자체가 오롯이 인간의 방법이다. 게이트 몬스터는 인간을 만나면 죽이는 것 이외에는 별생각을 하지 않는다. 만약 팀원들이 게이트 몬스터를 접한 경험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이 상황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고 부장이 지지 않고 대꾸했다. 기계 고블린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말했다.


“정 그러면 너희 식대로 계약서를 쓰는 방법도 있어.”

“계약서요?”


기계 고블린이 고 부장에게 서류 하나를 건넸다. 의무 사항이 공란으로 돼 있는 아주 간단한 양식의 계약서일테지. 내가 작성했으니 잘 알고 있다. 고 부장이 부들부들 떨며 다가가 서류를 받아오자 기계 고블린이 이어 말했다.


“공정한 거래를 위해서 솔직하게 말하지. 나도 너희가 드나드는 게 성가셔.”

“더 정확히 말해요.”

“너···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계 고블린이 갑자기 정색하고 말했다. 고 부장은 헛숨을 들이키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건 기계 고블린 너머에서 신평재에게 조언하고 있는 이서영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겐 고 부장과 회사에 대해서 여러 번 말한 바 있다. 지금쯤은 아마 고 부장과 유 차장을 같은 부류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들이 자꾸 여기 오는 게 마뜩잖다. 죽이면 그만이지만, 그러다 보면 결국 강한 놈들이 오거든.”


기계 고블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죽이면 그만이라고. 저 말은 누구의 진심일까. 이서영, 신평재, 미믹, 기계 마이스터. 아니 누구의 것도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아쉬운 입장일 거로 생각하진 않는 게 좋아. 너희는 물론이고 아주 많은 하찮은 인간들의 시체가 쌓이고 나서야 락스미스가 올 테니까.”

“그렇다면···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너희가 나에게 임대료를 내는 것으로 하지.”

“하지만 우리 소유의 건물을 되찾기 위해 임대료를 내야 한다고 보고할 수는 없어요.”


정말 담이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안을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말을 끊는 바람에 실랑이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기계 고블린이 빽 소리를 질렀다. 고 부장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물고 늘어지자 신평재도 당황한 것 같았다. 나도 몸이 아파서 도저히 이 논쟁을 오랫동안 기다려줄 수 없었다.


“이봐···. 대체 원하는 게 뭐야. 그 임대료라는 게 인간의 돈은 아닐 텐데.”

“아···.”


당연한 얘기지만 게이트 몬스터는 돈이 필요 없다.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기준으로 상대의 사고방식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로봇 고블린이 돈을 요구한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고 부장은 민망한 지 얼굴이 발개졌다.


“이 건물의 주인이 나라는 걸 명확히 해주면 좋겠군. 그 대가로 나는 너희들이 건물 5층 이하를 자유롭게 쓰도록 허락하겠다.”


6층을 중간지대 삼아 게이트 몬스터의 영역과 영업 2팀의 영역을 분명하게 나누자는 것. 여기에서 내 제안이 중요하다. 나는 무너질 것 같은 몸을 추스르며 말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당신이 우리 대표를 설득할 수 있게 돕는다면 말이죠.”

“안 대리!”


고 부장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네가 뭔데 나서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겠지. 확실히 이 자리의 협상 주체는 그녀다. 나는 지금 로봇 고블린이 아니라 그녀를 설득해야 한다.


“부장님, 문제를 해결하든 못하든 우린 또 다른 전장에 내던져질 거예요.”


뻔하지. 바리 오피스텔을 탈환하지 못하면 그걸 문제 삼을 테고 탈환한다고 해도 또 다른 위험한 일을 떠맡길 것이다.


“우리에겐 제3의 해결책이 필요해요.”

“제3의 해결책?”

“예를 들면 매일 하루에 한 번씩 6층에서 우리가 기계 고블린과 전투를 벌이는 거예요.”

“그게 말이···.”

“말 돼요. 미리 합을 맞추면 누구도 다치지 않고, 이 건물을 떠날 필요도 없어요.”


그때 기계 고블린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더니, 팔을 들어 올려 벽을 겨눴다. 퉁. 둔중한 소리와 함께 날아간 총알이-사실은 볼트와 너트 따위를 뭉쳐 만든 쇳덩이-고 부장이 들고 있던 K-579 소총 자루를 맞췄다. 고 부장은 힘없이 총을 놓쳤으나, 곧 안간힘을 써서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이 나오려는 걸 참는 중이리라.


“나도 보증하지. 이 몸은 너희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만큼 정밀하다.”


합의는 고 부장이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이는 것으로 끝났다. 계약서에 쓴 양자의 합의사항은 갑과 을이 6층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각자의 영역에 일절 침범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여기에 사소한 특약사항도 몇 개 붙긴 했다.


-‘을’ 측은 오전 9시 이전과 오후 6시 이후엔 바리 오피스텔에 머무를 수 없다.

-‘을’ 측은 바리 오피스텔 내에선 인간 사회의 위계질서를 전적으로 배제한다.

-‘갑’과 합의가 필요한 ‘을’ 측의 의사결정 권한은 안현중에게 전적으로 일임한다.


“아, 안현중 대리한테요?”

“너희 중에 가장 강한 인간 아닌가?”

“하지만 여기는 회사고···.”

“바리 오피스텔 내에선 인간 사회의 위계질서를 전적으로 배제한다. 그걸 받아둘여야 계약할 수 있다고 했잖아.”


앞으로의 작전 구상을 위해 계약사항에 꼭 포함해야 한다고 내가 강력히 주장했던 것들이다. 잡몹들은 바리 오피스텔을 아지트로 사용할 작정이다. 그러기 위해선 바리 게이트라는 회사의 영향력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는 건 반쯤은 핑계고, 고 부장을 좀 엿 먹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고통 혹은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억누르며 고 부장에게 말했다.


“수, 수비대장, 나 이제 몸이 좀 힘들어···얼른 서명 좀 해.”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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