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멈추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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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강긴극
작품등록일 :
2022.09.2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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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9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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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4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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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 받은 저녁식사

DUMMY

“축제날이라 다르네. 고기도 들어있고.”


그 옆에 앉은 노인도 이를 드러내며 맞장구를 친다.


“양도 많아. 흘흘.”


동의를 구하듯 목동을 바라본다. 그렇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웃을 때 드러난 더러운 치열 때문에 식욕이 다 사라질 지경이지만 그냥 고개만 꾸벅 숙여 보인다.


국에 숟가락을 담그고 헤집어본다. 반평생 음식을 만들어 팔아온 자영업자는 금방 알아차린다. 음식찌꺼기를 모아서 다시 끓인 게 분명해. 종량제봉투에 넣어도 이상할 것 없는 수준인데? 이걸 먹으라고 준 건지 버리라고 준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아니.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는 나을까.


그나저나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오래 생각해보지 않아도 대답을 얻을 수 있다.


못 살지 당연히.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도망쳐야 해.


혀를 내밀고 헥헥대며 꼬리를 흔드는 개가 안쓰럽다.


배고프냐? 대강 영양가 있어 보이는 것만 건져먹고 개나 줘야겠네. 탈출 준비는 언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게...


어억! 이거 뭐야?!


그렇게 마음을 먹자마자 몸이 공중에 붕 떴다가 홱 날아가더니 돌바닥에 그대로 처박힌다. 너무 놀라 비명도 못 지르고 있다가 간신히 고개를 든다. 마치 목동을 죽이려고 찾아온 듯한 남자가 서 있는 게 흔들리는 시야 안으로 꽂혀들어온다.


뭐야? 이제 서른 갓 넘었을 어린놈이 감히... 아 아니구나. 내가 소년이 됐으니까 그게 아니지.


남자는 너무나 크고 포악해 보인다. 놈이 목동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일으킨다. 발이 거의 허공에 뜰 지경이다.


야야야! 탈모! 탈모! 아 이 개새끼가 안 그래도 요즘 많이 빠져서 걱정이었는ㄷ... 아 맞다. 나 다시 어려졌지?


모발도 다시 풍성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지은 죄 없이 밥 먹다가 봉변을 당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것만은 다행스럽다.


크지 않은 창으로 들어온 석양이 놈의 눈 안에서 핏빛으로 번들거린다. 꼭 마귀의 눈 같다. 더럭 겁이 난다. 몸이 떨린다.


“야 이 개새끼야! 양이 한 마리 비잖아.”


애초에 몇 마리인지 몰랐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늑대가 풀려나면서 겁을 집어먹은 개들이 물러날 때 양들이 잠시 흩어져 잃어버린 것 아닐까. 그렇지만 그 정도는 급여에서 제하면...


퍽! 투벅!


억! 아억!


예고도 없이 주먹과 발이 쏟아진다.


양을 잃어버린 목동이 매를 맞는다. 몸이 아직 다 자라지 않아서 그런지 한 대 한 대가 다 끔찍하게 아프다.


컹컹컹! 개가 미친 듯이 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지만 누가 붙들고 있는 건지 아니면 겁을 집어먹은 건지 때리는 놈에게 달려들지는 못한다.


다 자란 어른의 주먹은 무자비하다. 코와 턱과 얼굴을 맞아서 바닥에 쓰러졌다가 발에 차여 거북이처럼 다시 뒤집힌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다시. 쓰러져 있는데도 주먹이 날아와 얼굴에 퍽퍽 꽂힌다. 고만고만한 삶이 당장 깨져버릴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살아도 산 게 아니다. 고통만이 살아 숨 쉬는 시간. 끝날 때도 된 것 같은데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바지자락을 붙잡고 매달리지도 못한다. 그랬다가는 더 큰 화를 당할까봐. 살기 위해 그저 낮게 몸을 웅크리고 쏟아지는 충격을 줄일 뿐이다.


숨을 헐떡이면서까지 폭력을 행사하던 가해자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몽둥이를 집어 든다.


야이 시발롬아! 너무 막나가는 거 아니냐? 그러다 머리라도 맞으면 어쩌게?


그렇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막아낼 방도가 없다.


하늘로 치켜 올라간 몽둥이가 막 목동의 몸으로 떨어지려는 순간, 놈의 손을 누군가가 붙든다. 겨우 고개를 들어보니 흰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남자다.


감사하다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머리만 조아리는 목동 앞에


“야이 등신새끼야. 여기서 뼈를 부러뜨리면 양을 어떻게 찾아 오냐.”


라는 말이 던져진다. 불쌍해서 도와주려던 게 아니었다는 건가.


그제야 젊은 남자는 매질을 멈춘다. 하지만 소년의 저녁이 담긴 죽 그릇을 들더니 보란 듯이 눈앞에서 기울여 쏟아버린다. 바닥에 쏟아진 죽이라도 손으로 훑어 입에 넣고 싶지만 그러면 그런다고 또 두들겨 맞을까봐 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건 뭐지? 개 짖는 소리가 당장 멈춘다. 어? 그리고 뭔가를 할짝할짝 핥아먹는 소리가...


와 나 이 개새끼 진짜!


“양을 잃어버려? 뭘 하다가?”


초로의 남자는 매질이 끝난 뒤에 대화를 시도한다. 더 능숙하고 여유 있고 악랄하다. 핑계 하나도 만들어두지 않은 채 무턱대고 성으로 들어왔던 목동은 혼비백산해 대꾸도 하지 못한다. 온몸이 덜덜 떨린다.


“대답 안 해? 그럼 네가 한 마리 훔쳐다가 몰래 팔아먹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


물론 이유는 있었지만... 덫에 걸린 늑대를 풀어주다가 그랬다고 하면 정말 죽일 것 같은데.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좋겠다.


“이 병신새끼가 감히 영주님 재산을!”


목동이 입을 꾹 다물자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른 듯한 젊은 놈이 소리를 지른다.


“영주님은 너 같은 병신새끼들까지 보호하시려고 전쟁터에 나가신 거야. 알아? 이 곱사등이 새끼야.”


곱사등이라는 말을 듣고 난 뒤에야 어깨와 목덜미에 얹혀 있는 커다란 혹이 느껴진다. 마치 젊은 놈의 말 한마디가 마법의 주문이 되어 그것을 만들어낸 것 같다.


실로 마법적인 폭행이다.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동안 계속 병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지.


“그러고 나자빠져있으면 다야? 편하냐? 잠 오지? 일어나 이 개새끼야. 주워다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아이고. 곱사등이에 고아이기까지 했다는 건가.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날 수도 없다. 그러나 젊은 남자는 소년의 멱살을 단단히 잡아끌며 밖으로 나간다. 목동은 자루처럼 질질 끌려 나간다.


꺅!


누가 놀랐는지 쇳소리를 지른다. 소리 나는 쪽을 확인한 젊은 놈이 그쪽을 향해 급히 머리를 조아린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놀라시게 해 죄송합니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른 것은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다. 남자의 인사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엉망이 돼있는 목동의 얼굴을 바라본다.


옷 입은 모양새만 봐도 지체가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들이 옷이다. 젊은 여자시종들과 함께 어딜 놀러 나가는 모양이다. 여자아이의 등 뒤에 선 시종들이 남자를 나무라듯 쳐다본다. 그 시녀들의 시선에만도 젊은 놈은 긴장해 쩔쩔매고 있다.


목동이 몸담게 된 작은 세계의 명암이 크게 엇갈리며 일렁이기 시작한다.


같은 또래의 소년소녀지만, 한쪽은 양 한 마리를 잃었다고 곤죽이 될 때까지 두들겨 맞아야하는 목동이고, 한쪽은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시녀들까지 대동해 팔자 좋게 놀러나가는 귀한 집 아가씨다.


어깨와 등 한복판에 흉한 혹을 얹은 곱사등이와, 온 세상의 첫눈을 모아 빚어낸 듯한 미모를 발산하고 있는 경국지색.


지독한 구타에 넋이 반쯤 나가 있던 와중에도 목동의 눈길은 소녀에게로 가 붙들린다.


아름답다...


길지만 과하지 않은 목, 깊은 쇄골, 희면서도 창백하지 않은 살결. 누군가 예술을 아는 이가 영혼을 소진해가며 조각해놓았을 것이 분명한 얼굴이 소년의 눈과 마음을 마구 흐트러뜨리고 있다.


말은 하지 못해도 마음으로는 이미 도움을 구하고 있다.


제발 도와줘. 더는 두들겨 맞지 않게 해줘.


창고 안에 있던 초로의 남자가 밖으로 나온다. 목동의 뺨을 후려갈기더니 머리를 억지로 눌러 숙이게 한다. 그런 뒤에야 자신도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한다.


“아가씨. 송구스럽습니다.”


사람을 엉망이 될 때까지 두들겨 팬 데 대한 사과가 아니라, 목동이 멍청히 고개를 들고 서있게끔 한 것에 대한 사죄다.


소녀는 좀체 속을 짚어낼 수 없는 눈으로 목동을 살핀다. 설움이 복받쳐 울음이 나오지만, 신분이 어떻든 간에 여자애 앞에서 우는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은 소년은 꾹 누르고 삼킨다.


목동에게서 시선을 거둔 소녀는 몸을 돌려 뒤에 선 시녀를 바라본다. 다 자라지도 않은, 나뭇잎처럼 얇은 잔등이 돌아선 것뿐인데 온 세상이 목동을 등진 것만 같다.


애써 틀어 올린 머리카락에서 삐져나와 몇 가닥 뒷목에 드리워진 잔머리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소녀의 볼이 약간 달아오른 듯 보이는 건 착각일까. 밥을 먹던 노인의 말이 불쑥 떠오른다. 축제라고 했었지? 혹시 축제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소녀는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멈춰 서서 손짓으로 목동을 가리키며 동동 발을 구른다.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시녀에게 뭐라고 속닥거린다.


목동에게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 시녀는 몸을 조금 기울여가면서까지 귀를 기울인다.


속삭임이 끝나자 소녀를 대신해 앞으로 나선 시녀가 뱉듯이 말한다.


“저녁은 먹게 해요.”


바닥에 엎질러진 죽그릇을 본 것일까.


금방 큼지막한 빵 한 덩이가 던져진다. 빵을 받아드는 찰라 소녀의 얼굴은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고작 빵 한 덩이에 그 아름다움을 저버린 소년은 자신의 과오를 깊이 뉘우친다. 잠시 외면하게 된 것만으로도 자책하고 싶어질 정도의 미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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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늑대의 숲 22.10.02 22 0 10쪽
2 전생의 마지막 22.10.01 24 0 9쪽
1 영웅전 22.09.30 33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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