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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멈추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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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강근극
작품등록일 :
2022.09.27 14:39
최근연재일 :
2022.10.09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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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7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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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악마의 연기

DUMMY

굴 바깥으로 나와 선다. 아무도 없다. 아무리 주변을 살펴봐도 마찬가지.


공기는 맑지만 날씨는 차다. 바람이, 들과 숲에 자란 잎들을 한 호흡으로 핥듯이 쓸고 흔든다.


풀 냄새. 향긋하다. 전날 무자비하게 폭행당한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몸이 가볍고 정신이 맑다.


얼마나 잔 거지? 하루 동안이 아니라 이틀 혹은 사흘 동안 잠이 들었던 게 아닌가 싶어질 정도다. 혹시 동굴에서 먹었던 말린 버섯 중에 약효가 있는 게 있었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려보지만, 다시 동굴로 돌아간다고 해도 답은 낼 수 없다.


동굴에서 나와 마을 쪽을 보고 걷는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나무들이 걷히자 뜻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이 불타고 있다.


새벽이다. 낮이었다면 잘 보이지 않았을 시뻘건 불길과, 밤이었다면 어둠이 숨겨주고 있었을 검은 연기가 모조리 선명하다. 새벽은 잔인하게 두 가지 색을 모두 머금고 회색악마처럼 웃고 있다.


멀다. 공격을 한 대상이 무엇인지조차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냄새도 비명도 아직은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목동에게 그 광경은 먼 세상의 일인 것만 같다.


무엇인가에게 공격을 받은 것은 분명하나 어린 소년 혼자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리 없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도리어 목동은 모든 것을 갖게 된다.


등 뒤에는 몸을 숨길 은신처와 이틀 정도 버틸 수 있는 식량이 있다. 한 번 모른 척 등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하늘이 벌을 내린 걸까.”


개는 대답하지 않는다.


일말의 안타까운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도망쳐온 곳이 불타는 광경을 본 소년은 도리어 안도를 느끼고 있다. 난파선에서 뛰어내린 마지막 생존자가 느낄 법한 소회다.


이제는 양을 찾아내지 못한다고 해도 두들겨 맞지는 않겠지. 동굴에 숨어서 한숨 더 잔다고 한들 세상 어떤 것도 나를 벌주지 못할 거야.


그런데 다시 동굴로 돌아들어가려는 순간, 소녀의 얼굴이 불현듯 떠오른다. 소년으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복잡한 매듭으로 묶어 뒤로 넘기고 있던 머릿결의 검은 윤기. 하얀 살결, 크고 아름다운 눈. 나들이옷.


나들이옷. 나들이옷.

나들이옷?


그렇다면 성 밖에 있었을 텐데.


싸한 절망감이 아래쪽 창자에 고이며 소년의 뱃속을 차게 식힌다.


애써 고개를 흔든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소녀의 미모 때문이 아니다. 딱딱한 빵 한 덩이의 식감 때문이다.


파삭, 부스러지며 입 안에 고인 피를 빨아들이던 빵조각의 감각이 문득 선연해진다. 그것이 어쩐지 따뜻했던 것만 같아 목동은 우뚝 멈춰 선다.


*


간밤에 공포와 절망으로 걸었던 길을 되짚어 성을 향해 걷는다. 따지고 보면 같은 거리일 텐데 밤의 길보다는 아침 길이 더 쉽다.


성은 건재하다. 사람 눈에는 높은 곳이 먼저 들어오는 법이니까.


성벽이 불에 그슬리고 화살 박힌 자리가 이곳저곳에서 관찰되기는 하지만 함락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마을은 엉망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참상은 자세해지고 절절해진다.


겨우 하룻밤 만에 거의 모든 지붕이 다 불타 사라진 뒤다. 아직 눈에 익지도 않은 풍경의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는 목동이 사방팔방으로 두리번거린다.


사람의 살이 타는 냄새가 아직 다 가시지 않은 마을에서 파리와 까마귀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 윙윙거리고 까악 깍 울어댄다. 그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죽어 넘어진 살과 뼈에 흥미를 보이는 개를 억지로 잡아 떼어놓는다.


아 이 개새끼 진짜. 아무거나 다 쳐 먹으려고 하네?


징그럽고 역하다. 허리에 매고 있던 끈을 풀어 개의 목줄에 매고 잡아끈다.


피를 빨아들인 흙이 이곳저곳에서 무너지면서 사람의 길은 엉망이 돼있다. 혈액으로 개어놓은 길에 찍힌 무수한 말발굽 모양이 마치 지옥으로 가는 이정표 같다. 그 말발굽을 따라 걷는다.


사람의 마을을 이렇듯 도륙해놓은 병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목동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다.


다들 도망치다가 죽었다. 등에 꽂힌 화살이 묘비처럼 하늘을 가리키고 서 있다. 불어오는 바람에 꼬리깃을 부르르 떤다.


화살이 아닌 칼에 목숨을 잃은 이들도 더러 있다.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었거나 순찰을 하고 있던 병사들 같다. 도망치는 사람들의 뒤를 막고 시간을 끌었을 것이다. 저항한 대가로 사지가 잘린 채 사방에 내던져져 있다. 그러나 죽었다는 사실만큼은 도망친 이들과 다름이 없다.


갑옷은 벗겨져 없어졌고 칼과 칼집은 보이지 않는다. 부러진 창 한 자루가 떨어져 있을 뿐이다. 가져가봤자 쓸 곳이 없었던 듯하다.


계급까지 알 길은 없으나 영웅적인 죽음이었다. 사체를 모아 수습하고 수통을 열어 사자들의 입에 물을 흘려 넣는다. 죽은 이들의 얼굴을 손으로 문질러 닦아내고 부러진 창을 집어 든다. 단순한 모양의 보병용 창이다. 적들조차 버리고 간 물건이지만 소년의 키에는 걸맞다.


도망친 사람들은 닫힌 성문 앞에서 죽었다. 용사들이 목숨을 걸고 분전한 보람도 없이


성은 건재하다. 오직 성만이 남았다.


이미 죽어 넘어진 몸들이 다시 말발굽에 밟혀 으깨어져 있다. 성에서 날아온 아군의 화살에 훼손된 시신도 간혹 있다. 남들보다 앞서있다고 안도했을 사람들은 뒤에 서있던 이들에게 떠밀려 해자에 빠졌다. 해자에 빠진 뒤에도 성벽을 향해 헤엄쳤던 모양이다. 해자의 중간쯤에 장애물로 세워둔 목책과 창에 찔리고 걸려 죽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성문은 참담히 닫혀 있다. 아무도 수습하지 않는 시체들이 그대로 썩을 준비를 하고 있다. 죽지 않기 위해 도망쳐온 이들을, 죽지 않기 위해 저버린 거다. 살기 위해서였다.


이 참상의 진정한 가해자는 누구인가. 모두 사람이었을 터인데.


매처럼 날카롭게 생긴, 그러나 확실히 지쳐 있는 노인이 닫힌 문 위의 성벽 너머에서 얼굴을 내민다. 나를 내려다본다.


“누구냐.”


고함을 지르지 않았는데도 목소리가 또렷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군인이거나 군인출신 같다.


갑옷을 갖춰 입었으되 투구는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험은 지나간 듯하다. 소년을 첩자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합당한 의심이다.


“...목동이오.”


존댓말이 나오질 않는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본 뒤여서다.


물론 무례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지체가 높을 노인의 눈썹은 한 번 꿈틀하기만 하고 곧 누그러진다. 마지막 남은 양심 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대신 말이 던져진다.


“묻겠다. 어째서 너 혼자 살아 있느냐.”

“...”


초면에 살아가는 이유를 묻다니. 꿈속에서든 현실에서든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대답이 없자 한 번 더 묻는다.


“어째서 너 혼자 살아있는 것이냐 물었다...”


스스로에게 묻는 듯한, 그래서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듯도 한 질문이다. 말꼬리를 흐린 노인이 풍선처럼 쪼그라든다. 그러면서 그의 고개도 숙여진다. 마치 소년이 누리고 있는 삶과 젊음에 경배라도 하려는 것처럼.


붕괴되기 직전의 사람이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은 아닐까. 지위로 보아 성 밖에 거주하고 있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러고 보니 사람들의 퇴로를 지키고자 싸우다가 사지가 잘린 젊은이와 이목구비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순간 노인이 안쓰러워진다.


“양을 잃은 죄로 두들겨 맞고 성에서 쫓겨났소. 숲에서 밤을 보냈고,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습니다.”


노인은 숙인 고개를 들지도 않는다. 그대로 목을 부러뜨려 땅에 머리를 떨어뜨릴 것 같은 모양새다. 그러다가는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야만인들이다. 야만인들이 쳐들어왔어. 도대체 어떻게 국경을 넘은 건지...”


소년에게는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다.


소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고 싶으나 망설여진다. 소녀에게 품고 있는 관심을 들키고 싶지 않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한다. 죽은 이의 얼굴을 구름 너머에서 찾아내려는 듯한 눈이다.


“...양을 잃은 것이 네게는 도리어 복이 되었구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물음으로 갈음한다.


“나들이옷을 입고 성을 떠난 여자들은 무사합니까.”


노인은 당황해 소년을 쏘아본다. 눈이 벌겋다.


“나들이? 여자들? 무슨 말이냐.”

“...”


대답하지 않는 목동을 못마땅해 하는 기색은 잠시 스쳐갈 뿐이다. 사안이 심각한 모양이다.


“...거기서 기다려라.”


뒤로 돌아서더니 사람들을 불러 묻는다. 점점 언성이 높아지더니 목동에게까지 말소리가 들려온다.


“호수? 호수에 가셨다고!?”


다시 소년을 향해 돌아선 노인이 한 순간 비틀거린다. 진정되지 않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금방이라도 쓰러지려는 사람처럼 성벽의 돌에 몸을 기대더니 뱉듯이 말한다.


“...놈들은 아마도 호수를 거쳐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지금 가봤자 구할 수 없다.”


소녀가 호수에서 죽었으리라는 말은 소년에게도 쓰디쓰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살려낼 도리는 없다. 다시 은신처로 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린다. 노인이 다급히 소리를 지른다.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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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택 이후의 저녁식사 22.10.03 17 0 10쪽
3 늑대의 숲 22.10.02 21 0 10쪽
2 전생의 마지막 22.10.01 22 0 9쪽
1 영웅전 22.09.30 31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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