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중세 X 좀비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대체역사

떼오
작품등록일 :
2022.10.03 23:59
최근연재일 :
2022.10.04 00:15
연재수 :
3 회
조회수 :
137
추천수 :
9
글자수 :
18,086

작성
22.10.04 00:03
조회
43
추천
2
글자
13쪽

1. 세 명의 생존자 (1)

DUMMY

“그리고 제노바 영사관에 소식을 전해야겠다. 카파가 완전히 끝장났다고. 악마가 도시를 통째로 집어삼켜 버렸다고···.”


한 줄 한 줄 ‘안프레오노의 일지’를 읽어 내려가던 놀포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 끝내 차오르는 화를 참지 못했다.


“카파가 완전히 끝장났다고? 덕분에 온 유럽이 끝장났다, 이 새끼야!”


놀포는 외마디 욕설과 함께 일지를 갑판 위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목소리 낮추게. 혹여나 놈들이 들을지도 모르니···.”

“해가 지고 있어요. 이제 곧 망자들이 활동적으로 변할 시간이라구요.”


두 일행이 한마디씩 핀잔을 주자, 놀포는 미간을 찌푸리며 멋쩍은 듯 혀를 찼다.


“쳇, 괜한 걸 읽어서 기분만 잡쳤군.”



놀포 일행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한 도보 여정 중이었다.


날이 빠르게 저물고 있었기에, 몸을 누일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던 중 눈에 들어온 것이 이 배였다. 해변의 모래톱 위에 처박힌 갤리선 한 척. 부러진 돛대에는 반쯤 찢어진 제노바 공화국의 깃발이 힘없이 매달려 있었다.


파선된 지 족히 수개월은 지났을 것이다. 배 바닥에 들러붙은 따개비들은 오래전에 말라 죽었고, 배에선 나무 썩는 냄새가 진동했으니···.


그런데도 놀포 일행은 조심스레 배 위에 올랐다. 해변에서 잠을 청할 바에야 나무 썩는 냄새 좀 들이마시는 게 훨씬 나았다. 요즘 같은 시기에 노숙을 하다가는 객사하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배 안에 건질 것이 좀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주린 배를 채워줄 곡물이나 꿀 따위 말이다. 가득 찬 술통이라도 하나 발견하면 그야말로 횡재였다. 놀포는 술 냄새만 맡더라도 흠뻑 취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배는 텅 비어있었다. 요긴한 물건은 옛적에 깡그리 털렸는지, 삭은 밧줄과 부러진 노, 한때는 누군가의 팔다리였을 뼈다귀들만이 여기저기 널려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뼈 무더기 아래에서 놀포는 색 바랜 두루마리 종이를 하나 찾아냈다. 군데군데 찢어지고 얼룩이 져 있었지만, 빼곡히 쓰여 있는 제노바어 대부분을 그런대로 읽을 수는 있었다.


배를 타던 상인의 장부려니,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주 끔찍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불사병(不死病)이 한 도시를 어떻게 멸망시켰는지에 대한···.


‘안프레오노의 일지’를 읽으며 일행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마다 불사병이 고향을 덮쳐온 날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으니까.


“어쨌든 떠돌던 소문이 사실이었군.”


놀포는 부러진 돛대의 밑동에 등을 대고 털썩 주저앉았다.


“불사병을 유럽 땅에 옮겨온 건 제노바 뱃놈들이었어. 자기들끼리나 뒤질 것이지, 온 세상에 재앙을 퍼뜨리다니.”


놀포는 불사병 난리 통에 용병대 동료들을 몽땅 잃었다. 재수 없고 천박한 놈들뿐이었지만, 어쨌든 함께 전장을 누빈 전우였다.


“원망할 수야 없잖는가. 그 사람들도 그저 살기 위해 도망친 것일 테니 말이야. 게다가 어떤 경로를 통하든, 불사병이 유럽에 상륙하는 건 결국 시간문제였을 걸세.”


늙은이 미하일이 달래듯이 말했다.


미하일 역시 아내와 자식들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차오르는 슬픔을 참기 위해 한껏 애쓸 뿐이었다.


“불사의 저주에 걸린 사람들 모두가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얻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해주세요. 아멘.”


두 눈에 알밤만 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꼬맹이 테오도라는 여느 때처럼 틈새 기도를 올렸다.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데도 용케 흔들림 없는 신앙심을 유지하는 아이였다.


열두 살의 수련수녀 테오도라는 일곱 살 적부터 함께 지낸 수도원 식구들을 불사병에 모두 잃었다.



···전부 특별한 것 없는 사연들이었다.

불사병 시대를 살아가는 생존자들은, 누구든 이런 사연 하나씩은 갖고 있기 마련이니까.


“놀포, 일지에 다음 장은 없던가? 괴물로 변하는 과정에서 쓴 필기 같은 것 말일세.”

“아니, 방금 읽은 게 전부야.”

“아쉽구먼. 저 괴물들에게도 의식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됐을 텐데···.”


선루(船樓) 계단 위에 걸터앉으며 미하일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놀포는 미하일이 마음속으로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괴물이 되어버린 가족들, 지금도 세상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을 그들에게 실낱같은 의식이 남아 있다면···? 썩어가는 몸뚱이 안에 갇혀 영원토록 끝나지 않을 고통을 받고 있다면···?


“할아범, 놈들에게 인간의 의식 같은 건 없어. 그냥 먹고 뛰는 것밖엔 할 줄 모르는 짐승들이라고.”


놀포가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확신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이런 말 이외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미하일을 위해서, 그리고 놀포 자신을 위해서도.


“허허, 그렇지···. 미안하네. 이 늙은이가 괜한 소리를 했구먼.”


그런 놀포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미하일은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아저씨!”


어느새 눈물을 닦아낸 테오도라가 미하일의 옆에 자리 잡고 앉으며 말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의식해서인지 짐짓 밝은 목소리였다.


“같이 기도해요! 제가 기도문 읊어드릴게요.”

“그래, 그러자꾸나.”


미하일은 주름진 손으로 테오도라의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이 차가 오십 가까이 나는데도 둘은 무척이나 긴밀한 사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잃어버린 가족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존재로 자리 잡은 것이다.


“죽음을 짓밟고, 마귀를 짓밟는 주님. 생명을 내려주시는 주님···.”


테오도라가 미하일의 손을 맞잡은 채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어떻게 눈만 감으면 기도가 저리 술술 나오는 건지···. 놀포는 혀를 내두르며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질병도 슬픔도 없는 안식의 장소에서, 죽은 종들이 평화를 누리게 하시옵소서···.”


테오도라가 읊고 있는 것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 테오도라는 걸어 다니는 망자들 역시 주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언젠가는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구원의 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기도할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주님, 어째서 무고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큰 고통을 주시나요?’


테오도라는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의문 하나를 애써 지워버렸다. 그리고 기도문의 나머지를 빠르게 읽어나갔다.


“···주님의 종들에게 부활과 생명을 내려주시옵소서. 영원하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아멘.”


미하일의 아멘 복창으로 기도는 마무리 지어졌다.


“그런 뻔한 기도 말고, 먹을 것 좀 내려주십사 하는 기도를 해줄 수는 없냐? 조만간 신발이라도 삶아 먹게 생겼다고.”


이제는 꼬르륵 소리조차 나지 않는 배를 문지르며 놀포가 무심히 물었다. 빵이나 죽은커녕, 순무 뿌리 한 조각 입에 넣지 못한 게 벌써 이틀째였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도 조금 내려주시옵소서. 아멘.”


테오도라는 어쩔 수 없이 즉석 기도 한 줄을 추가했다. 배가 고프기는 테오도라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확실히 큰일일세. 멀쩡한 농지를 찾는 게 이렇게나 힘들 줄이야···.”


미하일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놀포 일행은 여정 내내 버려진 농지에서 먹을 것을 구해왔다. 곡식 이삭을 조금 베어다가 죽을 쑤기만 해도 한 끼 식사로는 충분했다. 주인 잃은 거위라도 한 마리 잡을 수 있으면 더더욱 좋았고.


하지만 트라키아 지방에 접어들며 사정이 달라졌다. 불사병이 닥쳐오기 이전, 수년간이나 계속되었던 그리스 내전의 상흔이 이 땅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했다. 농지란 농지는 죄다 불탄 채 허허벌판으로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에 기아에 식인 역병까지···. 묵시록의 그날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 같군. 아니, 이미 온 건가?”


놀포는 허벅다리 사이로 퉤, 끈적이는 침을 내뱉었다.


“우리야 좀 참으면 그만이지만, 도라에겐 어떻게든 밥을 먹여야 하지 않겠는가?”

“할아범, 그 ‘어떻게든’이 더럽게 어렵단 말이야. 맨손으로 고기를 낚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일은 근처 마을의 방앗간이라도 뒤져 보세. 먹을 것이 조금은 남아 있지 않겠나?”


미하일의 제안에 놀포는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정말로 그 수밖에 없나?


마을 안에는 대체 몇 마리나 되는 식인 괴물이 우글대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가 도리어 괴물들의 한 끼 식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이대로 계속 굶어도 어차피 죽는 건 매한가지인가?


“에라, 모르겠다.”


귓가의 바다 파리를 손사래로 쫓아내며 놀포가 투덜거렸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기분도 엿 같고. 이럴 땐 그 괴물 놈들 머리통이라도 맘껏 박살 내고 싶단 말이지.”

“어··· 놀포?”


그때, 테오도라가 경직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테오도라의 가느다란 두 눈은 어느샌가 뱃머리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바람 이루어질 것 같아요.”


정확히는 해변 위로 풀풀 피어오르는 모래 먼지를···.


“저기 망자들이 몰려와요! 우리를 봤나 봐요!”


해변을 둘러싼 절벽, 그 든든한 높이와 우거진 수풀에 마음을 놓아버린 게 잘못이었다. 절벽의 조그마한 틈, 한때는 물이 흘렀을 마른 계곡 안쪽에 괴물 한 무리가 쥐 죽은 듯 자리 잡고 있었을 줄이야.


말소리를 들었든 갤리선 갑판 위를 거니는 그림자를 보았든, 일단 놈들에게 존재를 들킨 건 틀림없었다. 놈들이 한꺼번에 해변 위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크아아아아―!”

“키에에―!”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와 함께 말이다.


“이놈의 입방정이 문제지.”


해변 가득 울려 퍼지는 괴물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놀포는 자책하듯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나 후회하기엔 이미 때가 늦었다.


“도라, 몇 마리나 되는 것 같아?”

“모르겠어요! 확실히 열은 넘어요!”

“염병.”


놀포의 입에서 욕설과 한숨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일어나게. 싸울 준비를 하세.”


미하일은 덤덤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등에 매두었던 쇠스랑을 몸 앞으로 돌려 쥐었다.


땅 파먹는 농군 생활만 사십 년을 했다. 그에게 쇠스랑은 무엇보다도 듬직한 무기였다. 불사병 사태 이전까지 그가 주로 상대해온 적은 조그마한 두더지나 고슴도치였지만 말이다.


“나의 피신처, 나의 산성이신 주님. 부디 저희 모두를 지켜주세요···.”


테오도라는 재빨리 쇠뇌의 시위를 당겨 화살을 메겼다. 어린아이나 여자라도 시위를 당길 수 있게끔 장력을 낮춰 둔 호신용 쇠뇌였다. 그래도 제대로만 맞힌다면 사람 머리통 정도는 충분히 박살 내고도 남았다.



해 질 녘의 노을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끝내주는 운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배 주위로 몰려드는 괴물 놈들만 없었더라면 말이지.


“크어어―!”

“키에에에―!”


이제 놈들의 울음소리는 곧장 발아래에서 들려왔다. 끼익 끼익 널빤지 흔들리는 소리가 갑판 위까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놈들이 배를 기어오르는군.”


미하일이 꿀꺽 침을 삼켰다. 쇠스랑을 쥔 손바닥은 양쪽 모두 이미 땀으로 축축했다.


갤리선의 높이는 겨우 7피트 남짓. 괴물 놈들의 썩은 몸뚱이로도 뱃전을 기어오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놀포, 그만 꾸물대고 빨리 일어나요!”


테오도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놀포의 기상을 재촉했다.


“걱정하지 마. 이 냄새 나는 배를 무덤 삼을 생각은 없으니까.”


놀포는 그제야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바닥에 내려두었던 둔기를 주워들었다.


그 둔기는 망치나 철퇴 따위가 아니라 좀 더 특별한 물건이었다. 금도금 십자가 위에 고난받는 성자의 형상이 새겨진 성물. 교회 제대 위에서 통째로 뜯어낸 커다란 십자고상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할 말은 아니지만요! 암만 생각해도 그건 신성모독이에요!”


테오도라가 잔뜩 긴장한 채 소리쳤다.


“신성모독이라니? 성경 말씀 열심히 실천 중이잖냐.”


십자고상을 어깨에 둘러메며 놀포가 대꾸했다.


“주님, 원수들의 턱과 이를 몽땅 깨부수소서!”

“···시편 3장 8절.”


반사적으로 답한 뒤, 테오도라는 마지못해서라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성경에 그렇게 좋은 말씀도 쓰여 있나? 나 같은 무지렁이들은 못 읽게 하는 이유가 있었군그래.”


뒤이어 미하일도 껄껄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 따먹을 기운은 남아 있어서 다행이군.’


놀포는 손마디를 뚝뚝 꺾으며 뱃머리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팔이 뜯겨나간 놈.

배알이 터져 나온 놈.

눈알이 흘러내린 놈.

그 밖에도 각양각색의 송장들이, 하나같이 끔찍한 악취를 내뿜으며 배를 기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크에에에―”


그리고 마침내 괴물 한 놈이 뱃전 위로 머리를 쑥 내밀었다. 새까맣게 썩어버린 얼굴 거죽 위에서 수백 마리 구더기가 꿈틀대는, 참으로 끔찍한 몰골을 한 녀석이었다.


놀포가 십자고상을 머리 위로 번쩍 쳐들며 소리쳤다.


“시끄러워, 이 새끼야!”


그리고 곧장 괴물의 머리통을 내려쳐 박살 내버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중세 X 좀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 2. 세 명의 생존자 (2) +1 22.10.04 32 4 12쪽
» 1. 세 명의 생존자 (1) 22.10.04 44 2 13쪽
1 0. 안프레오노의 일지 +2 22.10.04 62 3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