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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한 소년은 고귀한 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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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2.10.04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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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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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범이 할 수 있는 것 -6-

DUMMY

“위험하게 어딜 돌아다녀요!”


꾸역꾸역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에이지는 다리를 저는 남자의 오른팔을 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이내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누구니?”


에이지는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퍼실과는 남자라는 것을 제외하면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은 에이지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 못 봤습니다.”


남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사람들 틈을 걷기 시작했다. 곧 사형대 앞에 도착한 남자는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를 만나 손을 꼭 잡고 집행인의 연설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퍼실은 잘 있겠지?’


착각으로 시작되었을지라도 한 번 일어난 생각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퍼실이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왔던 길을 돌아 수많은 인파 속을 빠져나온 에이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퍼실이 이미 여기 있다면, 이 많은 사람의 얼굴을 다 확인할 수는 없다. 퍼실이 만약 여기로 오는 중이라면 집으로 가는 길에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퍼실이 올지 말지 고민하는 중이라면 집에 가서 설득할 수 있다. 무엇보다 퍼실이 집에 얌전히 있는지 궁금했다.


결론을 내린 에이지는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달리는 건 아니었다. 그의 집까지는 30분이 넘게 걸렸고 호흡을 맞추지 않고 뛰는 건 효율적이지 못했다. 가벼운 조깅을 하듯 자세를 잡고 숨을 고르며 보폭을 벌렸다.


‘있을까? 퍼실은 지금 집에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달렸다. 그가 아직 집에 있길 바라며.


광장으로 가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반대편으로 향하는 에이지를 이상하게 봤으나 이내 관심을 껐다. 시간이 지나니 마주치는 사람도 점점 적어졌다. 시장을 나가고 들판들 가로질러 밭을 지나치니 곧 눈에 익은 허수아비, 높이 낮은 집이 보였다. 에이지는 도착하자마자 문을 벌컥 열었다.


“퍼실, 있어요?”


퍼실은 짚 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로 에이지를 바라봤다. 그다지 놀란 눈치는 아닌 것 같았다.


“일하고 있을 때 아니냐?”


질문을 받자 에이지는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 오늘 일은······. 그러니까 점심때 다른 게 있고요.”

“참 지리멸렬하게도 말하네. 숨이 차서 그런 거냐,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냐?”


에이지는 자신이 숨이 차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이렇게 소리를 내며 들어왔으니 퍼실이 놀라지 않을 법도 했다.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자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걱정돼서 왔어요.”


그 말을 들은 퍼실은 굳은 눈길로 에이지를 쳐다봤다.


“뭐가 말이냐?”


에이지는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잖아요.”

“알지.”

“괜찮으세요?”


퍼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찌푸려진 미간, 고심하는 눈, 손으로 가린 입. 그것들 또한 대답이었다. 괜찮지 않다는 대답. 에이지는 그 답에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여기는 왜 온 거냐?”


퍼실이 너그러운 투로 물었다. 최대한 자신을 신경 쓰지 말라는 의도가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도 신경이 안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에이지는 울적한 투로 답했다.


“걱정돼서 왔다니까요.”

“그런 것 때문에 왔냐.”


그렇게 운을 뗀 퍼실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리로 돌아가라.”

“가보고 싶지는 않으세요?”

“내가 간다고 죽을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니고 얼굴을 들키면 매우 위험해지겠지.”

“그렇군요.”


에이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용건이 끝나자 집 안이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곧 에이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전 가볼게요.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그래. 잘 갔다 와라.”


감정 없는 승낙을 들은 에이지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감정이 없다는 건 동료보다 역시 자신의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일까. 이제 그들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는 걸까. 그것은 에이지가 근래 봤던 퍼실과는 달랐다. 그는 감정에 휘둘리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명예를 알고 주군과 동료를 걱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무런 감정 없이 동료의 처형장에 잘 갔다 오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해는 이미 중천이었다. 지금 광장으로 달려간들 사형집행은 끝났을 것이다. 에이지는 불편한 감정을 가진 채 다시 몸을 돌렸다. 그렇게 집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이건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 당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야. 왜 그렇게 담담할 수 있는 거야. 그런 질문을 한 아름 안고 퍼실에게 달려가는 기분은 유쾌하지 못했다.


집에 거의 다다르자 낯선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예민한 에이지의 귀에 잘 들려왔다. 에이지는 창문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그 안에서 퍼실은 울고 있었다. 짚 더미 위 시트에서 그야말로 서럽게. 에이지는 문을 열 수 없었다. 들어가서 위로할 수 없었다. 그것이 슬픔을 흘리는 사람에게 큰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 그에게도 슬픈 마음이 있구나. 그도 우는구나. 그걸 알기만 하고 다시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차마 제자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었던 퍼실을 존중해야만 했다. 그가 스승이라서가 아니다. 그가 기사라서가 아니다. 그가 감정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동료들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그는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니다. 의리를 알고 명예를 알고 지난날을 추억할 줄 아는 훌륭한 사람이다. 당당한 기사다. 그것이 그가 지금 울 수 있는 이유다.


에이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곧바로 뤼제의 가게로 돌아갔다.


“어딜 갔다 온 거야?”


문을 열자 와인병을 들고 있던 에밀리가 날카롭게 쏘았다.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허락도 없이 일터를 떠나고 말이야.”

“아, 미안. 아는 사람을 본 줄 알았는데 아니지 뭐야? 그러다가 뤼제 씨랑 너를 찾다 보니 늦었어.”

“우릴 못 찾으면 곧바로 여기로 왔어야지!”

“그러게나 말이다.”


천연덕스럽게 받아넘긴 에이지는 문득 뤼네가 가게 안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뤼네 씨는 어디 가셨어?”


“사형이 끝나고 팍 오빠가 부르더라고. 아빠뿐만이 아니라 다른 상인들도 대부분 불러 모으던데?”

“나스하 씨가?”

“응, 지금 다들 교회에 있을 거라고 했어.”

“교회엔 무슨 일인데?”

“그 연단에 섰던 남작의 집행관이 할 말이 있다나 봐. 조합장님도 같이 가셨을 거야.”


‘올 것이 온 건가.’


에이지가 신음했다. 귀족의 신하와 상인 조합이 한자리에 모인다. 뤼제 씨가 말하기를 새로운 남작은 상인에게 부담을 줄 것이라고 했다. 심각한 듯 말한 뤼네 씨와 상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다. 직접 가서 들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에이지가 말했다.


“나도 교회에 다녀올게.”

“뭐? 여기 정리를 나 혼자 하라는 거야?”


에밀리는 진열한 와인의 빈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보기에는 혼자 못 할 것도 없어 보였다.


“미안, 금방 갔다 올게. 아니면 갔다 와서 내가 다 해도 되니까 그대로 둬.”


에이지가 그렇게 말하고는 휙 나가버리자 에밀리가 말릴 새도 없었다. 에밀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툴툴댔다.


“정말 아빠한테 말해서 일당을 깎든지 해야지!”


에이지가 교회에 도착할 때쯤, 남작의 집행관은 화려한 마차를 타려 하고 있었다. 그의 볼일은 끝났지만, 상인들은 아직 교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상인들끼리 상의할 것이 있음을 짐작한 에이지는 교회로 들어가려고 했다. 문 앞에는 경비를 서는 사람이 있었고, 그는 에이지를 보자 몸으로 막아서며 말했다.


“상인 조합원분들이 회의 중이다. 일이 있으면 나중에 오거나 신부님 방으로 찾아가렴.”


에이지는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와인 가게 하는 뤼제 씨네 직원이에요. 저도 상인 조합원의 직원이니 들어갈 수 있지 않나요?”


경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묵직한 말투로 말했다.


“조합원이 아니면 안 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에이지가 그의 신분에 불만을 가질 때였다. 뒤에서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에이지 아니냐?”


뒤를 돌아보자 상인 조합장의 아들, 팍 나스하가 서 있었다. 에이지가 당장 말했다.


“나스하 씨! 잘 됐다. 저 여기 들어가게 해주시면 안 되나요?”


팍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라. 뭐 신성모독도 아닌데.”


경비가 꺼리며 팍에게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조합원도 아닌 꼬마인데.”

“괜찮아, 괜찮아. 애들이 들으면 안 되는 내용도 아니고. 에이지, 들어가자.”


조합장의 아들이란 위치가 이 마을에서 꽤 대단한 것이란 건 알았지만 원칙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도 가능하게 할 줄은 몰랐다. 에이지는 이게 잘난 사람을 사귀어야 하는 이유인가 생각하며 감탄했다.


교회 안에 들어서자 연단에는 상인 조합장 데시 나스하가 올라와 있었다. 시장통의 소음을 담당하는 상인들은 그의 말을 기다리는 건지 조용했다. 이윽고 데시 나스하가 헛기침하자 좌중의 시선이 온통 그에게로 꽂혔다.


“아까까지 이 영지에 새로 온 개스 남작님의 집행관과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 상인 조합에 바라는 것이 있다고 하셨고, 여기 이 문서에 그것이 적혀 있습니다.”


데시가 종이를 폈다. 연단은 높고 글씨는 작았다. 그것이 무언가 쓰였다고만 인식할 수 있던 상인 중 한 명이 물었다.


“조합장님,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읽어 주실 수 있을까요?”


늙은 조합장은 다시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그럼요, 그럼. 물론이죠.”


하고는 종이를 보며 글을 낭독했다.


“하나, 상인 조합에는 조합세를 걷으며 3개월에 한 번씩 조합이 번 이익의 3할을 징수한다. 둘, 이 마을로 들어오고 나가는 지정한 물품에는 각기 법이 정한 바에 따라 관세를 매긴다. 셋, 30지그의 통행세를 50지그로 올린다. 하바스의 발전을 위한 상인 조합과의 새 조약. 이상”


잠시 조용했던 청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상인 조합에 직접적으로 징세하고, 관세를 붙여 징세하고, 상인들의 통행세를 늘려 징세하고. 온통 징세 방안만이 적힌 짧은 글에 사람들은 실망하기 시작했다. 곧 한 명이 소리 내어 물었다.


“두 번째의 지정한 물품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데시 조합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세칙을 살폈다.


“적힌 것으로는 와인, 위스키, 밀, 목재, 말, 쟁기 등······. 뭐 이런 것들이 있다네.”


술과 밀. 집을 짓거나 보수할 목재와 농사에 필수적인 말과 농기구. 자주 사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농민들에게도 꼭 필요한 물건들마저 목록에 있었다. 농민들이 여기 있었다면 반발이 컸을 것이었다. 다른 이가 손을 들고 물었다.


“그만큼 우리를 빨아먹겠다는데 뭐 당근 같은 건 없나요? 우리한테 유리한 조항이 있어야 할 것 아니오.”


조합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그런 건 없소. 나도 집행관님께 말씀을 드렸지만, 남작님이 직접 결정을 내리신 거라는 말만 돌아왔소.”


교회 안은 점점 시끄러워졌다. 상인들은 시장 바닥으로 돌아간 듯 떠들었고 개중에는 욕을 하며 소리치는 자들도 있었다. 조합장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봐라. 이게 귀족의 민낯이야. 종일 자기 배를 불릴 생각이 아니면 하지 않지.”


팍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에이지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에이지의 우리는 술 장사꾼 위네 뤼제와 그의 딸 에밀리, 그리고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팍 나스하의 우리는 그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길을 가야 하겠지. 그것이 비참하고 잔인한 길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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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린 범이 할 수 있는 것 -4- 22.10.10 37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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