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Chapter 59. 결전의 고성 (4)

휘리리릭― 기긱―!
문예린이 순식간에 날벌레 무리를 사로잡았다. 수레바퀴의 중심이 된 그녀가 다시금 정령석을 빛낸다.
[‘청나비의 날갯짓 Lv. ??’을 파티 전체에 시전합니다.]
“지금이에요, 최요환 씨―!”
“하핫, 본부대로 모시죠···!”
자신 있게 외친 최요환이 ‘자상’을 날려 보낸다. 회전하는 칼날이 한 바퀴 돌아 곤충 여럿을 일도양단한다.
촤아악―!
그사이 녀석은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징그러운 놈들은 얌전히 번데기로 돌아가라고···!”
스슥―
적 진영에 나타난 녀석이 곤충을 내려찍으며 낙법을 구사한다. 와그작, 몸통을 뚫은 뒤에는 점액을 흩뿌리며 잔당을 차례차례 해치운다.
지형을 자유자재로 이용해 적을 빠르게 섬멸하는 ‘데스 퍼레이드.’ 이동속도 버프를 받은 녀석은 마치 ‘가속’을 쓴 것처럼 쌩쌩 날아다녔다.
착.
‘자상’을 회수한 최요환이 뒤돌았다. 행진이 끝나자 난장판에는 녀석과 문예린뿐이었다.
‘자상’이 돌아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몇 초. 찰나에 군체를 섬멸할 정도로 녀석은 성장했다. 물론 문예린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핫, 죄다 독침 한번 못 쏴보고 나가떨어졌군. 역시 우린 무적이라니까.”
“헤헤··· 안 다치셨어요? 최요환 씨?”
문예린이 넝쿨을 회수하며 녀석에게 합류한다.
“힐러 있는데요, 뭐. 크게 다치는 게 이상하지. 근데··· 이거 떨어지긴 하는 거야?”
최요환이 지저분해진 어깨를 털어낸다. 진물을 뒤집어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문예린과 마주 선 뒷모습이 제법 늠름했다.
그 등을 생채기 하나 없이 지켜낸 파트너도 기대 이상이었다.
“······멋진 협력 플레이 잘 봤습니다. 저희가 끼어들 틈도 없던데요.”
갈채를 보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우리가 온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탱커 아재? 검사 아재까지?”
“앗, 수아 언니···! 한참 찾았는데···!”
반색한 문예린이 한달음에 달려와 임수아에게 붙었다. 무사히 재회해서 둘 다 어지간히 기쁜 기색이었다.
“다행히 예린 씨랑 요환이는 악몽 상태가 아니었네요. 둘이 어떻게 만난 겁니까?”
“아, 그게요······.”
“어··· 그게 말이죠.”
그들은 멋쩍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
끈적이는 소굴을 벗어나 상층으로 향하며 문예린에게 설명을 들었다.
“······해서, 저는 어떻게든 탈출했거든요. 그런데 또 다른 목소리가 저를 불러서 가보니까··· 거기에 최요환 씨가 계시더라구요.”
듣자 하니 문예린은 악몽을 제대로 경험하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죽음의 성소 때처럼, 정령이 그녀에게 위험을 속삭여준 덕분이다.
그 뒤에 어디선가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들려 그곳으로 달려갔는데, 그 정체가 바로······.
“이거였겠죠. 그때 난 의식이 없다시피 했으니까.”
최요환이 제 옆에 떠오른 그림자를 가리킨다.
그 혼령은 척 보기에도 암살자였다. 얼굴 전체를 복면으로 가리고, 다부진 팔로 팔짱을 낀 채 스카프를 휘날리는 장정.
《이거라니? 구해줬더니 말버릇 한번 건방지구나.》
다름 아니라 그가 바로 어둠과 그림자의 신, 에레보스였다.
《네 녀석이 코찔찔이 시절에 매몰되어 자력으로 헤어나질 못하니,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선 것이거늘.》
그림자 무사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든다. 성별이 모호한 신답게 제법 기묘한 음성이었다. 날카로운 쇳소리로 메아리를 울리는 듯하다고 할까.
‘그늘이자 에테르 형태인 그에게는 육신이 없으니, 물론 성별 또한 무관하겠지.’
어느새 돌아온 인도자가 묻지 않은 정보를 나불댔다. 정작 필요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이 뒤늦게 나타나니 기가 찼다.
하여간 사내자식 확정인 놈들은 하는 짓도 마음에 안 든다니까.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나 같은 상황에선 누구나 그렇게 될 테니까.”
최요환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그러다 꼴이 엉망인 것을 깨닫고는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는다. 그 모습에 문득 궁금해졌다.
“······어떤 악몽이었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 창으로 들이치는 빛이 어둑한 실내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그 아래서 녀석은 잠시 일행들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있어요.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뭐··· 숨길만 한 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렇지. 출신이나 과거 따위를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역경이란 무릇 다가올 여명을 위한 암흑기일 뿐이니.》
그림자 신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최요환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어릴 때 산적 동굴에 버려졌다가 지금 부모님이 입양해주신 거거든요. 사실 무지하게 어릴 때라 기억도 안 나는데··· 하필이면 그 빌어먹을 환상이 동굴 속이었다고요.”
창을 지나는 녀석의 낯빛이 밝아졌다 한순간에 짙어졌다.
“약탈에 실패해서 굶주린 산적 놈들이··· 칼을 들고 죄다 나한테 달려드는 꿈이었어요.”
때는 녀석이 아카데미 생이던 시절이었다. 마을 뒷산에 식인종으로 전락한 산적이 횡행한다는 괴담이 떠돌았다.
어린 녀석이 무리에서 소외된 데는 그런 이유도 적지 않았겠지.
소문은 금세 공공연한 두려움이 되었다. 그 공포는 출생의 비밀과 맞물려, 어느덧 녀석의 마음에도 자리 잡았다.
“놈들이야 뭐, 대충 견적 나오잖아요. 용병하다 온 놈들이라 꽤 그럴싸하게 무장했지.”
녀석이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한다.
“반면 난 고작 단검 하나뿐인 꼬맹이였고, 고전악투 끝에 놈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려 줬다는 얘기죠. 거의 뭐 영웅 소년의 무용담이랄까?”
그리고는 손을 꺼내서 주먹을 쥐었다 펴본다.
“한 놈만 더 처치하면 완승인데, 그걸 깨웠단 말이지··· 지상 최강의 어쌔신이 이제 막 탄생할 참이었는데.”
“으음··· 저는 그것도 모르고···.”
문예린이 볼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로부터는 잠시간 정적이 이어졌다. 요환이 녀석이 가볍게 군들, 그 사연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쪽은······.”
내게 운을 뗐던 임수아가 금방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하려던 말을 나는 단번에 알아챘다.
“저랑 공성현 씨는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동굴 건은 잘은 몰랐지만요. 그리고······.”
나는 추궁당하기 전에 스스로 유죄를 시인할 셈이었다.
“사실 그전부터도 알고 있긴 했습니다. 악몽을 잇는 저주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소년 소녀의 고민을 해결해줘야 했으니까요.”
“······뭐요?”
“그게 무슨······.”
영문을 모르는 최요환과 문예린이 심오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뻔뻔스레 양손까지 들어 보였다.
“수아 씨한텐 이미 들켰고, 여기까지 온 이상 밝혀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바로 여러분의 꿈을 방문한 침입자 맞습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지. 게다가 침체한 분위기를 상쇄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폭탄은 터뜨려 줘야 옳다.
“뭐, 뭐야··· 잠깐만, 탱커 아재 그럼······.”
“아··· 수아 언니랑 그런 얘길 하긴 했었는데··· 혹시 그, 기사님···?”
“세계 최강의 탱커······?”
그들이 입을 틀어막고 나를 삿대질했다. 공성현은 무심한 눈길만 주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죽일 놈이죠. 꿈에서 살아나가겠다고 파티원 비밀을 들추고 다녔으니.”
그 뒤로는 범행 사실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사건을 세세하게 검토한 대법관들은 잠시 넋이 나간 듯했다. 그러나 곧 상황을 받아들이고 형량을 감해주었다.
“뭐, 이러나저러나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어요. 우리도 어릴 때부터 1세대 불사대 불화설 같은 거 듣고 자랐거든.”
아.
“전 조금 부끄럽긴 한데요··· 그래도··· 파티끼리 비밀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괜찮아졌어요. 오히려 후련하다고 할까···.”
문예린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칼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다 곧 채민서를 떠올리고 침울해졌다. 오랜 친우가 현재 고성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그 사실을 알고서 최요환은 학을 뗐다.
“탱커 아재야 그렇다 쳐도 우리 편도 아닌 놈들이 장난질하는 건 못 참지. 만약 데빌 클로 수장이라는 놈이 나랑 뭔가 연관이 있어서 그런 악몽을 보여준 거라면······.”
녀석이 뿌득 이를 갈았다.
“바라는 대로 끝까지 쫓아가서 멱살 잡고 심문해주죠. 악마의 피로 썩어 문드러진 그 머리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니까.”
복도 끝을 노려보는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실로 한결같은 녀석이었다.
「나한테 부모님은 딱 두 분뿐이니까.」
제가 뱉은 호언장담은 신념이자 철칙처럼 지킨다. 사람 보는 안목도··· 최소한 나보다는 나은가.
“최요환 씨······.”
“나도 동감이야. 그놈은 전쟁 범죄자지. 그러니 인류에게 악몽을 선사한 죗값을 물어야 해. 우린 사람들을 대표해서 여기에 온 거니까. 그놈을, 데빌 클로를 심판하기 위해서.”
문예린과 달리 임수아는 확고한 결심을 세운 태도였다. 냉철한 기운을 두른 그녀도, 분을 삭이는 최요환도 저마다 이곳에 온 이유가 있었다.
사정을 귀담아듣던 문예린도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저도··· 사람들을 구하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함께 싸울게요. 무고하게 희생되는 생명을 두고 볼 수 없으니까요.”
그게··· 최요환 씨를 돕는 일이기도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나도 동의했다.
“동감입니다. 옛 동료의 악행은 같은 불사대였던 제게도 책임이 있으니까요. 어쩌면···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오직 나만이 최호준이 등장한 악몽을 꿨다. 핏줄인 최요환조차 과거의 아픔을 비추었는데, 나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 사실이 단서일지도 모른다.
최호준이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함정에 빠트린 이유. 오늘 이 순간을, 내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증오를 벼려 온 까닭을 헤아릴 실마리.
문은 점차 가까워졌다. 저 너머에 아군이 기다린다. 기척과 함께 고통스러운 신음이 문 틈새로 흘러나왔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란히 걷는 공성현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나는······.”
녀석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합세했다.
“당신들 모두의 복수를 돕기 위해 여기에 왔어. 그것뿐이야.”
지독히도 녀석다운 동기였다. 우리의 복수를 돕기 위해서. 그 말에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돕기 위해서··· 동료는 일심동체니까요.”
“그리고 우리 모두의 복수를 위해서이기도 하고요. 간만에 맞는 말이네요.”
“복수 좋지. 이제 끝장 볼 때도 됐으니까.”
스스슷···
공기에 녹아든 최요환이 우리를 앞질러 문 앞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리고,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자고요, 다들.”
우리를 돌아본 녀석이 씩 웃었다. 겁도 없이 선수 치려는 녀석을 얼른 뒤쫓았다.
“그런 건 내 역할이거든? 그리고 마음 단단히 먹어. 여기부턴······.”
녀석을 대신해 양손으로 문을 열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싸움이니까.”
덜컹, 소리를 낸 문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순간 시야가 ‘팟’하고 점멸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성벽이 사라져 주위가 휑했다.
“여긴······.”
“성안이 아니잖아?”
태양이 뜨지 않은 적벽 아래 황량한 대지. 지하 세계를 재현한 차원 필드였다.
“여러분, 저기······!”
문예린이 까마득한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 반투명한 고치가 무수히 달려있었다. 이전 곤충 소굴에서 본 종류였다. 숫자는 스물에서 서른 정도 될까.
“뭐야, 또 몬스터인가?”
‘자상’을 집어든 최요환이 천장을 노려본다. 다른 이들도 무기를 들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아니, 이번에는 아냐.”
나는 고치 속에 담긴 알맹이를 하나하나 투시했다. 그 정체는······.
“······사람. 전부 우리와 갈라진 아군 병사들이야.”
개중에는 ‘오염’된 나머지 악몽에 빠져든 불사자도 있었다. 꿈틀거리던 고치가 이윽고 하나둘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저적···!
찢긴 틈새로 삐져나온 사지가 위태롭게 허우적거린다. 비명을 지르며 달려 나가려는 임수아와 문예린을 손을 뻗어 말렸다.
“유헌 씨······.”
나를 돌아보는 그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허공에 시선을 고정했다.
스르륵···
안개 속에서 거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요동치는 지면 위로 육중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쿠웅···!
마침내 멈춰 선 놈은 하나가 아니었다.
- 작가의말
마법 통신에서 알려드리는 두근두근 오늘의 하이라이트!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리고,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자고요,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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