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Chapter 59. 결전의 고성 (9)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메마른 땅을 울렸다.
“······!”
그들의 등장을 눈치챈 아군이 곧바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공성현이 ‘속박’을 영창했고 다른 이들도 공격을 퍼부었지만······.
“후후··· 이런 게 통할 줄 알다니 다들 순진하네요.”
디스트로이아는 바닥에 고인 마혈로 방패를 펼칠 뿐이었다.
촤아아악······!
흐르는 핏줄기가 모든 공세를 녹여버린다. 그사이 악신은 포탈을 생성해 권속을 회수했다.
치이익···!
연기에 휩싸인 여왕이 할로윈 장난감 크기로 줄어들었다. 신성으로 취약해진 육신이 과다 출혈을 버티지 못한 탓이다.
《주, 죽음의 신이시여 부디 한 번만 기회를―.》
“흐음······.”
디스트로이아가 손바닥만 한 광대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매드 퀸이 머리를 조아리며 빌어도 소용없었다.
철퍽―
“완패한 주제에 기회는 무슨. 이래서 인간 시절 습성을 못 버린 머저리들은······.”
진창에 인형을 내팽개친 악신이 권속을 무참히 짓밟는다. 발버둥 치는 꼴을 비웃어주던 그녀가 내게도 살벌한 눈을 흘긴다.
“하여간, 멍청한 것들은 방심해서 그림을 전부 망쳐 버린단 말이야······.”
명백히 나를 향한 조롱이었다. 천리안을 가지고서도 신의 변덕을 당해내지 못한 운명 파괴자를 향한 모욕.
“큭, 저게···!”
“참아.”
발끈해서 나서려는 최요환을 팔을 뻗어 만류했다. 가까이 가면 위험하다. 디스트로이아는 말할 것도 없고, 최호준도 곁을 호위하고 있으니 자칫 덤벼들었다간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
분하지만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다. 아군이 반격당할 위험이 있는 지금으로서는······.
《우우······.》
웅덩이에 고개를 처박은 매드 퀸이 잠잠해질 즈음에야 그녀는 발길질을 거두었다. 더럽다는 듯이 구두를 털어내고는 최호준의 귓가에 속삭인다.
“플랜 B를 시행할 수밖에 없겠네요. 먹어버리죠, 최호준. 이런 한 입 거리 따위······.”
턱을 쳐든 그녀가 멸시로 눈을 내리깐다.
“가소로워서 입가심도 안 되니까.”
그 아래서 광대는 어깨만 부들부들 떨었다. 뒤늦게 제 운명을 예감하고 두려워진 거겠지.
나조차도 방도가 없어 눈을 돌렸다. 일종의 딜레마다. 지킬 인류가 있는 나는 그들을 저버리고 악마를 구할 수 없다. 여기서 선을 넘어버리면 아군이 다친다.
그런 미래를 봤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후웅······!
“푸훕··· 뭐예요, 영웅. 지금 그걸 기습이라고 한 건 아니겠죠?”
탁.
검격을 피해 물러난 죽음이 가까운 절벽 위에 착지했다. 포탈이 열리며 나타난 침묵의 암살자가 여전히 그녀 곁을 지켰다.
“······바꿀 수 없는 미래라고 저항도 못 해보는 건 성미에 안 맞으니까.”
그럼에도 역시, 이 정도로는 턱도 없다.
디스트로이아는 그런 나를 깔아보며 입을 가리고 조소했다. 그리고는 인형에게 ‘흡력’을 발동해 검은 구체를 응집했다.
“자아, 방해가 들어오기 전에··· 이건 당신 거예요, 나의 계약자여.”
방금만 해도 살아서 허덕이던 매드 퀸이 숫제 에테르화하여 그 손에 사로잡혔다. 악신이 그것을 최호준에게 건네려던 그때였다.
“큭, 수아 씨······!”
터엉······!
임수아의 화살이 불시에 그들을 노렸다. 그러나 디스트로이아는 간단히 혈의 장막을 펼쳐 공격을 막아낼 뿐이었다.
“······후우.”
그사이 최호준은 구체를 받아 흡수를 끝냈다.
“‘포식’으로 힘이 강해진 상태군. 흡수할 가치 정도는 있었다.”
놈이 충만감을 만끽하듯 손을 쥐었다 편다.
직전까지 제 수족이었던 자다. 그런 부하를 입맛대로 휘두르다가, 쓸모를 다하자마자 영양분으로 소화해버렸다.
소모품.
놈에게는 물건일 뿐인 거다. 신실하게 뜻을 따르는 충복이라도, 혹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던 동료라 할지라도.
한때 영웅이었던 녀석이 언제부터 악마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된 것인지 나는······.
그 대상이 무수한 실험체를 고문한 거악이라 한들 혐오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악마의 본성, 동족을 간단히 배신하는 면모를 목도하고야 말았기에.
“······괴물은 너다, 최호준.”
대검을 겨눌 방향이 더욱 명확해졌다. 그 말이 거슬렸는지 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쓸데없는 걸 봤나 보군. 네놈의 그 눈으로.”
돌아선 놈은 포탈을 열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번 기회에 그 성가신 눈알을 도려내 주지. 남설이와 김재우의 시체라도 회수하고 싶다면 따라오는 게 좋을 거다.”
“후훗, 피눈물 흘리고 싶지 않다면 그의 말을 잘 새겨두는 게 좋겠군요. 어리석은 십자가의 영웅이여.”
디스트로이아도 조소를 흘리며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곳곳에 운석이 추락했다. 아니, 그것은 저주의 관문이었다.
쿠웅···!
개방된 문에서 악마 군단이 대거 출현했다. 놈들은 삽시간에 밀려 들어와 윤하얀을 위시한 아군 진영을 덮쳤다.
“젠장, 악마의 수가 너무 많아···!”
“마주열 교관과 제가 전후로 엄호하겠습니다! 마스터 윤하얀은 빨리 결계를······!”
“키에에에에엑――!”
돔 형태로 전개된 푸른 방벽 너머로 드래곤 군주가 숨결을 내뿜고, 촉수 괴물이 사지를 뻗어왔다.
터엉, 터엉――!
촉수 다발이 송곳처럼 방어막을 두드릴 때마다 마력 구조가 불안정하게 번뜩였다.
최호준은 우리를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이대로라면 아군이······.
“걱정 마요.”
곁을 스쳐 간 임수아가 단숨에 날아올랐다. 공중에서 대형 화살을 장전하고 시위를 당긴다.
“그쪽이 구해준 목숨, 여기서 끝낼 생각 없으니까.”
“저도요. 아직··· 몇 번이고 싸울 수 있어요.”
콰가가가각――!
지면에서 ‘엔트’의 손아귀가 솟구쳤다. 몸통을 꿰뚫린 마물이 촉수를 허우적대며 괴성을 질러댄다.
“······하아, 빌어먹을.”
절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최요환도 머리를 헤집으며 돌아섰다.
“순식간에 정리하고 우리도 따라갈 테니까, 아재들은 길이나 잃지 말고 서둘러요.”
드물게 침착해진 녀석이 양손에 나이프를 장전했다. 사삭, 결계 밖으로 나간 녀석은 혈혈단신으로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최요환······.”
그때 결계를 사수하는 최전선에서도 고성이 터져 나왔다.
“곧 송명학 교관께서 합류하실 겁니다! 캠프는 무사히 루나리움으로 이동했답니다! ”
“······‘오염’은 이제 걱정 없겠네요. 그러니 여긴 저희에게 맡기세요.”
전위에서 주문을 지휘하던 윤하얀이 망토를 펄럭이며 결계로 돌아왔다. 그곳에 자리 잡아 완드를 전방에 겨눈다.
“동료를 구하는 일, 구명이야말로 신유헌 간부님께 어울리는 역할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지팡이를 내려찍자 상공에 예비 결계가 우수수 생겨났다. 설령 전선이 뚫린다 해도 공습을 방어하고, 아군을 수호해낼 방어막이다.
“기다릴게요. 간부님이 다른 불사대분들을 구하고··· 마스터 홍시현 님과 돌아올 때까지.”
의연하게 입꼬리를 올린 옆얼굴에 차마 반발할 수 없었다. 내가 그렇듯 그녀도 고성의 끝에 다다를 날만을 고대해왔다.
“······알겠습니다.”
푸른 빛으로 수놓은 천공을 올려다보며 결심을 굳혔다.
“가자, 공성현 씨.”
넘실거리는 검은 물결 너머로 단 하나의 관문을 눈에 담았다. 그곳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머뭇거릴 여유 따윈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저는, 우리는··· 오늘 여기서는 죽지 않을 겁니다.”
날개를 펼친 누군가의 아래를 지나며 예언을 남겼다.
그것은 아군 전체를 축복하는 가호였다. 나는 승리를 내다보는 눈을 가졌으니까. 악몽을 끝낼 시기도 물론 알고 있다.
「나는, 여기선, 절대로, 죽지 않아.」
나를 닮아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겠다는 그녀에게 줄 대답은 이걸로 충분하겠지.
“신유헌······.”
진심은 제대로 전해졌다. 아군의 함성 속에서 등대와 같이 반짝이는 청록을 눈에 담았다. 이제 어디서든 저 날개만 찾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뒤돌아보지 않고, 대군을 물리치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저 문이야.”
머잖아 중앙 게이트 앞에 당도했다. 공성현과 눈으로만 신호를 나누고, 앞장서 그곳으로 향했다.
스르륵···
칠흑 같은 소용돌이에 녹아들자 모든 소음이 어둠에 잠겼다.
***
도착한 곳은 어두컴컴한 터널이었다.
성내임은 분명하나 환경이 달랐다. 검은 혈관이 복도와 천장, 카펫까지 온통 뒤덮은 채로 맥박쳤다.
두근··· 두근···
동맥이 살아서 꿈틀거릴 때마다 공간 전체가 들썩인다. 반사적으로 허스타로스의 적벽이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 원천은 만악의 심장이 아니었다.
“······죽음의 기운이로군.”
공성현이 불쾌한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대로 이곳은 디스트로이아의 영향력이 무척 강한 장소였다.
“마력장의 기운도 강하게 느껴져. 경고해두는데 쉽지는 않을 거야. 이 앞에 있는 건······.”
경고판 하나 없는 악마의 뱃속을 가로질렀다. 질척, 질척··· 혈관을 밟을 때마다 끈적거리는 체액이 흘러나왔다.
“······데빌 클로가 지금까지 감춰왔던, 희생자들의 고혈로 이룩한 감옥일 테니.”
말을 마치자마자 녀석이 검을 빼 들었다.
스릉―
‘시간’을 흡수하고, 마침내는 ‘파멸’의 지배권을 벗어나 ‘죽음’을 집어삼키려는 러스트 인 베인. 이번에는 그걸 쓸 작정이다.
악신에게 놀아난 녀석으로서는··· 일종의 복수나 다름없는 행위겠지.
마침내 복도 끝에 다다라 원형 홀로 들어섰다.
까마득한 상층부까지 이어진 핏줄이 거세게 고동친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실제로는 무수히 많은 이들이 우리를 기다렸다.
“아··· 으아······.”
“으으··· 으으으···.”
사방에서 신음성이 들끓었다. 마력을 추출하도록 설계된 수직형 인큐베이터. 좁은 포드에 갇힌 검은 마법사가 어림으로도 족히 수백에 달했다.
사면에 얽히고설킨 혈관이 그들의 마력을 흡수하여 운반하고 있었다. 그 끝에는······.
“저거야. 대륙 전체에, 아니 지상 전역에 깔린 마력장을 유지하는 원천.”
중앙에 자리한 마법석 발전기를 가리켰다. 요컨대 이곳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데빌 클로의 마력 공급실이었다.
물론 불쾌한 진실은 그러한 참상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홍시현······.”
방벽에 둘러싸인 대형 크리스탈에서 그녀의 기운이 느껴졌다. 춤추듯이 타오르는 불꽃의 아우라가 마력석에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러니 지상과 차원을 아우르는 대규모 마력장의 중심은 아마도······.
흔들리는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본 그때였다.
“아아··· 역시나. 그런 표정을 지을 것 같아서 여기로 부른 거거든요. 건방지게 나대는 게 주제를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이죠.”
끼익··· 끼익···
저울처럼 매달린 샹들리에에 디스트로이아가 로브 자락을 드리우고 앉아 있었다.
“······디스트로이아.”
“네, 그래요. 영웅의 소중한 옛 동료는 내가 데리고 있었어요. 당신이 없는 동안, 몰래 납치해서 쭈욱.”
그녀가 로브를 털고 떠올랐다. 그리고는 360도로 펼쳐진 포드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둘러본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 여깄네요.”
철컥, 쉬이익···
나란히 세운 두 포드의 뚜껑이 개방되었다. 그곳에 의식을 잃은 두 연인이 잠들어 있었다.
밭은 숨을 내쉬는 남설이와 김재우. 둘 다 안색이 창백한 ‘오염’의 징후를 보이며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떻게 저 둘을 사로잡은 거지? 남설이에겐 청룡이 붙어 있을 텐데.”
“흐음··· 그 애완용 말이죠? 사이가 각별한 거 같아서, 특별히 계약자의 심장에다 봉인해줬죠.”
“심장이라고······?”
자세히 보니 정말이었다.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왼쪽 가슴팍에서 냉기가 새어 나왔다. 이 순간조차도 그녀의 심장이 얼어붙고 있다.
“한쪽은 너무 뜨겁고··· 한쪽은 너무 춥겠죠.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포드 문을 쾅 닫아버린 디스트로이아가 발전기 유리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잠자는 숲속의 마녀가 되어서, 얼간이처럼 스스로는 일어나지도 못하고요.”
우리를 오만하게 내려보며 조소한다.
“멋지지 않아요? 화무십일홍이라더니, ‘악의 시대’를 종식한 불사대조차 별거 아니잖아. 내가 조금 건드리기만 하면······.”
그녀가 체스 기물을 쓰러뜨리듯 툭, 하고 손가락을 민다.
“전부 도미노처럼 쓰러지니까. 자, 그럼··· 여왕은 이쯤에서 물러나고, 여기선 왕이 등장하는 게 인지상정이겠죠.”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체스에서 왕은 할 수 있는 게 그다지 많지 않을 텐데?”
그녀를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킹을 두고 전능한 퀸이 먼저 내빼다니. 게임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후훗, 글쎄요. 난 말이죠, 게임에서 가면을 쓰고 포커페이스를 가장하는 데는 선수이거든요. 덜떨어진 영웅 따윈 그 눈이 있어도······.”
로브를 나부끼며 그녀가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내 수를 읽지는 못해.”
그녀가 공중에 포탈을 열어 사라지자 홀은 정적에 휩싸였다. 기묘한 긴장감만이 전신을 감싸고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 뒤로 붙어, 공성현 씨.”
신속히 지시를 내려 녀석과 등을 맞대었다. 후방을 내주지 않는 것. 암살자에게 대비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당장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지만······.
섣불리 구출에 나설 수는 없다. 우선은 포드로 채워진 공급실을 쭉 훑었다. 어딘가에 놈이 있다.
여태 그래왔듯, 비열한 잔재주를 발휘해 어둠에 은신하고서.
찾았다.
“―공성현 씨, 머리 조심해!”
캐앵――!
머리를 노린 비수가 검날에 부딪혀 날카로운 비명을 올렸다.
- 작가의말
마법 통신에서 알려드리는 두근두근 오늘의 하이라이트!
“저는, 우리는··· 오늘 여기서는 죽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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